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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로 충성하신 예수 / 히 3:2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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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아들로 충성하신 예수
  히브리서 3장 2절 -6절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에게 돈을 가져다 준 것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급기야는 대통령이 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 고 하는 담화문까지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직접 전달 해준 사람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지시하고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나간 특사들이 그 일을 한 것입니다. 특사들은 문자 그대로 특별한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을 맡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특사를 보낸 최고 통수권자의 의도를 충실히 전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이 사람에게 없습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그 특사를 보낸 사람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대통령 자신이 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사도이심과 대제사장이심을 나누었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로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그 임무를 충실히 해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히브리서를 읽은 독자들 가운데 충성의 모델로 모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공통점은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깊이 들어가 보면 충성에서부터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언제부터 모세가 하나님께 충성하였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했습니까? 아닙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광야에서 양치기를 하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고급 공무원이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애굽 땅에서 끌고 나오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엉뚱한 위로가 우스개 소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에 신음하는 백성을 끌어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어서 죄에 대하여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신음 소리를 듣고 나가야겠다 고 결단하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명령 앞에서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광야에서 양들을 키워보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끌고 광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 인지 모세는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양들은 사나운 성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무지 무지하게 말을 듣지 않는 동물인지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양들이 아니라 사람을 끌고 광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다 듣고 난 모세는 하나님! 사람 잘 못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일은 아마도 애굽 군대 총사령관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애굽 장교 가운데에서 찾아보시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물러서지 않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면서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런 문제를 겪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망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이런 부르심 앞에서 망설 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명령이 자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거나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망설이면서도 결국은 순종하고 애굽에 지팡이 하나 들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의 순종이요 충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나의 처지에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나 야심에서부터 출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나아가는 방향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의 상태는 어떤가? 나는 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사역이 출발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광야로 나가는 것보다는 제가 애굽 말도 능통하니 애굽에 고급 공무원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지를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맞지도 않았고 내키지도 않는 사역이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고 충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세를 본문은 칭찬합니다. --2절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쉽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때 모세처럼 칭찬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타협하지 마십시요. 비록 내키지 않는 말씀이지만 기꺼이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내키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 마굿간으로 가라 말씀하시니 마굿간으로 오셨습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시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왜 내가 아기의 모습으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왜 내가 냄새나는 마굿간으로 가야합니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5-6절

그렇습니다. 모세는 사환이고 예수님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환과 아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환은 서로 계약을 맺고 일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환은 그 계약을 끝나면 자신의 충성됨도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공부를 더 잘 하기 위하여 가정 교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가정 교사는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을 맺은 가정교사는 온 힘을 다하여 충성을 다 합니다. 그러나 계약이 끝나면 그 일도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아이들은 얼마나 영악한지 끊는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기업들도 계약직 사원들을 선호 쪽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끊지 못하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관계입니다. 부모는 가정교사의 책임 같은 책임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프면 같이 아픈 법입니다.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아 온 것을 보고 가정교사는 계약을 연장하거나 끊거나 하면 되는 것이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이 나쁘면 책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과 모세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3절

모세가 집이라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주 멋진 건축물을 보면 그 건축물을 누가 설계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어서 나도 집을 짓는다면 그 설계자에게 맡기고 싶어합니다. 만약 설계자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없고 그 집 자체만 관심을 갖는다면 자기에게 집을 지을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그런 집을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지으신 건물 안에 누가 사느냐가 또한 중요합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그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아름다워도 그 교회에 사는 사람이 추한 사람이고 썩은 사람이라면 그 교회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가 바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집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외모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외모 때문에 교만하고 자신의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과 고민의 차이는 점하나 차이입니다. 획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만과 고민이 바뀌는 것입니다. 60킬로로 인하여 고민하는 사람이 있고 59킬로로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바로 이렇게 한 획 때문에 웃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인생은 집 지은 자를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인생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인생이십니까? 그러면 교만도 고민도 우리 사전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인생을 보고 내 인생을 지은 분을 알리는 일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내 인생을 설계하신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내 인생을 이렇게 아름답게 설계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신 예수님이 드러날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모세와 예수님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은 사환이 지은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들이 지은 집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 예수님은 우리의 선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 자식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비록 선생님이 잘 못 가르쳤다 할지라도 그 책임은 선생님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과 계약 관계를 맺은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위하여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실험한 이야기입니다. 원숭이 우리에 전기 코일을 깔아서 전기를 흐르게 했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그리고 놀랄 만큼 전기를 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수컷들은 전기가 들어오면 새끼들을 발 밑에 놓고 그 위에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컷들은 전기가 들어오자 새끼들을 들어 머리 위로 올리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누가 지은 집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지십니까? 우리가 집을 얻을 때에도 은행 융자가 많이 들어간 집은 전세 얻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집 주인의 재정 능력이 분명하면 우리는 안심하고 그 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책임을 질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부도가 나더라도 누군가가 내 인생을 책임을 진다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세상이 그 책임을 진다고 말합니다. 철학과 사상이 나를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돈이 내 인생을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철학과 사상은 가르침일 뿐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은행에 융자가 들어가 있는 집과 같은 것입니다. 불안합니다. 언제 주인이 바뀔지 모릅니다. 언제 그 사상과 가르침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도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 예수님이 부도가 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영원합니까?--4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설계도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사상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책임지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부도를 내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집에 거할 때 우리는 절대로 쫓겨 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부도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신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집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축복합니다. 부도나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믿음 생활하는 내가 여리고 성 앞에서 참으로 보잘 것 없이 비쳐질 때 아닙니까? 세상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항복할 줄 알았던 세상이 절대로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로 도망을 옵니다. 교회로 도망 온성도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학원 강사들처럼 강의하고 떠나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놓지 말아라 끝까지 붙잡으라고 권면 하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자포자기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왜 인생을 포기하십니까?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은 인생을 자기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아들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상속자의 시각에서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우리를 붙잡으시는 예수님을 놓지 마십시오.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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