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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알고 나면 / 빌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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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을 알고 나면
본문 : 빌립보서 3:4-9
설교 : 김학현 목사 (예은교회)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배하게 할 목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드리는 사람을 창조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리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드리는 것도 안 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잘못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시간이든, 삶을 드리는 세상에서의 예배이든 주님을 알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배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진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울이 바울이 된 이후의 고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4-6절)은 사울이었던 시절 바울이 얼마나 자랑거리가 많은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7-9절)은 예수님을 알고 나니 그런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생각이 달라집니다

EX) 자전거, 아주 좋은 자전거를 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닦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다가 자전거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자전거 아주 비싸죠?” “아니, 이 자전거는 형님이 내게 주신 거란다.” 그 말에 소년은 부럽다는 듯 “나도....”라고 말하곤 그 뒷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무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나도 그런 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런 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심장이 약한 동생이 있는데,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주고 싶어요.” 생각이 다르니 신성합니다.

생각의 변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런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이런 생각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생각이 육신에 멈춰있는 사람들처럼 바울이 생각한다면, 자신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럽지 않은 육체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른 이”는 아직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이미 바울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알고부터 변한 것은 그의 생각입니다. 그의 생각은 아주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5,6절)이 바울이 예전에 좋은 것이라 생각하던 육신적인 자랑거리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생각이 달라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8절)고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이 변했는가 아닌가를 보면 됩니다. 아직도 넓은 평수의 집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고급 승용차 자랑에 혀가 달 정도라면, 가문에서 장차관이 나왔다고 열을 올린다면, 일류대학 박사학위를 자랑한다면, 연봉이 얼마인가에 생의 성공여부가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가치가 달라집니다

EX) 소꿉장난,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합니다. 엄마아빠놀이를 하고, 밥 짓고, 빨래하며 재미있게 놉니다. 때로는 자신이 좋은 조가비를 가지겠다고 아귀다툼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와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밥 먹으라고 하면 조가비를 내팽겨 둔 채 자기 집으로 갑니다. 소꿉놀이 할 때 조가비가 최고의 가치였지만, 모래로 지은 밥이 아니라 진짜 밥이 기다릴 때는 그까짓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가치이동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변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이 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가문이나 친척이 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벼락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외모도 환경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가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타도해야 할 이단의 괴수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그의 복음을 따르고 전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옥에 잡아 가둬야 할 족속들로 알았습니다. 자신의 로마 시민권이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가치 있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8,9)

세상의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최고라고 합니다. 가치가 그 자리를 옮겼습니다. 육체의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단계로 옮겼습니다. 가치관의 상승이동,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배는 예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투자하고, 모든 것을 투자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긴다면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예배의 성공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목적이란, 왜 사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우냐 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울이 사울일 때는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인생의 목적을 삼고 산 사람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는데, 다메섹으로 간 이유도 바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같은 곳으로 갔지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일과 예수님을 알고 난 후의 일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의 인생목적이 달라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섬기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바꾸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로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것은 인생관이 변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바탕에는 항상 자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일을 하고, 자기를 위하여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성도들은 이제 자기를 위하여 하던 일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는 자라야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모습으로, 그럴 듯한 직분으로 포장을 해도 예배드리는 이유가, 살아가는 이유가 나 때문인 사람은 예배의 실패자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의 모든 행위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돈이라면 그는 돈을 예배하는 사람이고, 명예라면 명예를 예배하는 자이며, 가족이라면 가족을 예배하는 자이고, 자기라면 자기를 예배하는 자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제 그런 예배를 끝내고,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만 인정받겠다고 외칩니다. 자신의 의(義)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살겠다고 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로 돌아 온 자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 가지가 달라진 사람만이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가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진 사람이 사는 생애 자체가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예배자가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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