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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로마서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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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자 :손상률 목사 (후암교회)
† 설교제목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성경본문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세상을 사는 사람 중에는 가치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가지지 못하므로써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실체가 없는 대상이 좌우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경우는 막연하게 팔자소관을 들먹이거나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다고 말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자기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철학을 과신한 나머지 잘살고 못사는 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도 자기 중심의 신앙생활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한 때 자기의 열심만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자기의 감정에 따라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불러 놓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고 하시며 의미 심장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지혜가 있고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제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게되면 자기의 인생을 주님께 맡겨 놓고 오직 그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Ⅰ.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롬11:33,36).
본문 말씀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1) 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모델로 하여 흙을 빚어 육체를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창1:26, 2:7). 인간의 시조가 범죄하므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거기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롬8:1-2).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죄 아래서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성령으로 깨우쳐서 하나님께로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6:20-21). 소유물은 소유주의 손안에 있습니다. 주인은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자기 손안에 있는 진흙덩이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처럼(렘18:6),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벗어날 수 없는 종의 신분입니다.

고린도전서 7:22-23에 보면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한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감정이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인의 의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여야만 됩니다. 만일 종이 주인의 요구를 거역하거나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하게되면 주인으로부터 엄한 벌을 받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저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미친 듯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방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백주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를 강타하여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놓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26:14). 여기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가 주인의 뜻을 거역하고 딴 길로 가게 되면 가는 그 발걸음마다 가시채에 뒷발이 찔리는 것 같은 아픔만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3)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자기 품에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그 마음을 알아챕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안에 있는 우리들을 그 깊은 곳까지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앉고 일어서는 것과 마음 속의 생각까지 다 통촉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39:7-10에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1).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정확하게 인식한 바 있었기 때문에 훗날 하나님께서 저를 이방의 전도자로 부르시는 싸인(Sign)을 하셨을 때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고, 또 먼저 사도 된 자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멀리 아라비아로 가서 하나님께 서원하며 그 길을 추구하였습니다(갈1:15-17).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Ⅱ.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창조 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되고 거기 비추어 인간 자신의 초라함을 인식 하게되면 절대로 자기를 내세우거나 과신할 수 없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을 위시하여 당대에 최고의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의 주장을 펼치며 지식 논쟁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능을 고백하고 맙니다. 욥기 38:1-2절에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하였습니다. 또 4절에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하여 욥은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고 하였습니다(욥40:4).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미천한자요 무가치한 실체임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어느 것 하나도 아는 것이 없고 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1) 몸이나 물질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오늘날처럼 인간의 지식이 고도로 발달하고 과학 문명의 눈부신 업적을 과시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매우 간단한 것 하나도 사람의 마음대로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머리터럭 하나도 희고 검게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5:36). 마태복음 6:27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신체적으로 키가 크고 윤기 나는 머리숱에 아름다운 미모를 가꾸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검은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염색을 하고 그나마 빠져 없어져 버리는 대머리가 싫어서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하지만 그것 하나도 막아낼 능력은 없습니다. 건강을 자기 마음대로 지킬 수 없고 흘러가는 재물을 붙잡을 수 없으며, 자기 속에서 낳은 자식을 마음대로 키울 수도 없습니다. 돌발하는 사건이나 사고를 예방할 수 없으며 엄청난 자연의 재난 앞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2) 자기 마음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나 군자도 자기의 감정이나 의지를 믿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한 잠언 16:32의 말씀은 인간 실존에 대한 지혜자의 고백입니다.
가장 자기를 잘 알면서도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한 자로 알려진 모세는 일어나는 혈기를 삭이지 못해서 실수를 범하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민20:10-12). 다윗은 평생동안 온갖 시련과 환난을 이겨낸 사람이지만 자기 속에서 끓어오르는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였기에 일생에 오점을 남겼습니다(삼하12:7-10).

성령의 지혜로 자기의 한계를 알게된 사람은 자기의 무능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롬7:21).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장담할 수 없는 자신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요21:5).


(3) 주어진 시간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고 하였으나(히9:27), 그 시간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예기치 못한 시간에 도적이 오는 것처럼 임한다고 하였습니다(살전5:2).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기간이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르면서 자기 인생을 자기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이와 같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6-22에 보면 한 부자가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며 자기 도취에 빠져 있었는데, 같은 시간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이 있고 훌륭한 계획이 있고 행복을 즐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더라도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는 이상 자기의 뜻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4:13-14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Ⅲ. 최상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에게 좋고 나쁨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없으면 우매 무지한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시73:22). 솔로몬은 올바른 지혜야말로 진주보다 귀한 것으로써 그 오른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왼편 손에는 부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잠3:15-17). 그는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9:10).

일찍이 솔로몬은 그가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왕상3:9). 그는 장수나 부귀나 정적을 물리치고 오래도록 집권하는 일들보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정치하는 일을 최상의 가치로 여겼던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이 자기 인생의 성공이요 가장 큰 가치임을 알아야됩니다.


(1)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라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1:20-21).
어느 때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자기가 수행하여야 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고전10:31). 이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자들입니다(행20:23).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그것을 위해 자기를 던지는 사람이야말로 그 인생을 주님 뜻에 맡기는 사람입니다.


(2) 참 행복을 즐기는 자입니다.

행복을 누리고져 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공통적인 욕망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가지는 가치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자기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의 목적 성취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게됩니다. 한편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성경 적인 축복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축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행복의 가치를 느낍니다(창22:18).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막10:45)고 하신 말씀도 이와 같은 원리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3:29-30). 자기 몸을 오직 주님 뜻에다 맡긴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여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피력하였습니다(빌1:20-21).

(3) 소망의 확신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의 몸을 자기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 온 사람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도 없는 영광의 소망이 있습니다(롬8:18). 고린도전서 15:42-22에 보면 썩을 것으로 심었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거두며, 죽을 것으로 심었으나 죽지 아니할 것으로 거두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투자한 것에 비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존귀한 축복으로 이윤을 거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한번 나서 죽을 목숨이지만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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