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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하나 강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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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하나 강한자"
                            구리영락교회        김 성 기 목사

무디는 7남 2녀의 8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무디가 5살 때 아버지는 갑자기 일하다가 쓰러져 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무디의 어머니는 막내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무디의 어머니 벳시여사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슬픔과 빗쟁이들이 땔 나무까지 다 가져가버리는 가난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편 5절]은 무디의 어머니가 애송하는 성경귀절 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미약한 한 사람을 어떻게 쓰시는 가를, 1800년대 미국과 영국을 대 부흥의 불길로 인도했던 드와이트 무디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 저 오늘 본 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인간의 생각과 관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기독교의 역사는 결코 화려한 역사가 아닙니다.
1.기독교는 권력자의 종교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데 마치 회교처럼 권력의 힘이나 무력으로 전파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가 정치와 야합해서 서로를 지탱해주는 정치 이념으로 사용되는 것을 허락치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정 교의 분리를 견지하셨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에수님의 가르침중에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에 항거하여 싸우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무저항주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눅 22:51절에 보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중의 한사람을 제자중 하나가 칼로 그 귀를 잘라 버렸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하시면서 그 떨어진 귀를 다시 붙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넘겨준 빌라도가 처음에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23:4]라고 유대인들에게 말했던 것은 로마의 법을 어긴 것이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생명운동,구원운동,진리운동을 하셨지 정치운동을 하시지는 않은셨습니다.
2.기독교는 약자의 종교입니다.
세계의 3대 성인이 예수님, 석가 ,공자라 한다면 세분의 삶은 참으로 좋은 대조가 됩니다.
석가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왕자의 부귀영화를 맛 보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처음엔 석가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엔 인정하고 반대하지 앟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리 큰 핍박이 없었습니다.
공자는 자기의 가르침을 정치의 치세의 도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공자 자신이 나라의 재상을 맡아 실제 정치를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는 공자를 상가집을 기웃 거리는 개로 비유하며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비우고 이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가난하고 약하고 핍박이 따르는 삶의 연속 이었습니다. 탄생부터 드라마틱한 출생입니다. 결혼도 안한 약혼 남녀의 사이에 태어나십니다. 장소는 여관의 마굿간이었습니다. 그 거룩하신 분이 처음 태어나서 뉘여진 곳은 말구유였다고 합니다. 말구유는 말의 먹이를 놓는 곳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만 예수님의 마굿간 탄생은 바로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먹이로 주어질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헤롯에게 죽을 뻔 한 것, 애굽으로의 도피와 나사렛에서의 목수로서의 삶은 결코 화려하거나 여유있는 구도자의 삶과는 거리가 먼것이었습니다.
마태 8:17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바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나사렛의 목수의 종교인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를 이루었습니다. 지난번 국민일보에 보니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자장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고 그중 개신교 자체만으로도 불교를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목수의 종교, 지하의 종교, 노예의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무디의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무디는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다섯 살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일부를 양자로 주라는 동네사람들의 충고를 거절하고 힘은 들었지만 끝까지 신앙으로 길러냈습니다.
무디는 17세가 되자 가난한 자기 집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자기 하나라도 없으면 어려운 가정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발가게를 하는 친척집에 있게된 그는 신앙보다는 돈을벌기위해 온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는 당시로는 거금인 10만 달러를 모을려고 작정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날 나가는 교회의 킴볼이라는 한 주일학교 교사가 심방을 와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릅을 꿇고 영접기도를 시켰습니다. 이 날 이후로부터 무디는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디는 그 날이 바로 거듭난 날이라고 늘 간증했다고 합니다.
무디는 열심히 교회에 나갔고 자기도 주일학교 교사가 되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학 벌이 미천한 그는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교회의 의자 몆개를 돈을 주고 빌린다음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무디의 주일학교는 수천명이 모이는 주일학교로 부흥되었으며 나중 링컨대통령이 무디의 초청으로 그곳을 방문하여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무디 보고 자격이 없다고 하였는데 과연 누가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하나님게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것들을 택하사  강한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27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한 모세는 물에 던져진 아이였으며,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 가장 빛나는 제국을 건설하였던 다윗은 이새의 8아들 중 여덜번째였으며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당시 기름부으러 간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하나님이 사랑하고 함께하시는 사람이 과연 어떤사람인가를 멋지게 보여준 사건 이었습니다. 키가 장대같고 갑옷을 입고 큰 칼을 들고 그 앞에는 방패를 든 병사가 지켜주는 불레셋의 거인장군 골리앗과 이제 홍안의 소년이요 갑옷은 커녕 목동의 옷차림세에다 손에는 목동들이 가지고 다니는 막대기와 물맷돌 다섯 개와 물매 뿐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 왔느냐 "[삼상17:43]
골리앗의 말입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 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외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싸움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환경이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과연 함게하시나에 있는 것입니다.
링컨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의 부모가 남겨준 유산은 가난한 오두막 한 채와 다 떨어진 성경책 한 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결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링컨은 언제나 신상명세서 학력난에 교육부족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한번은 링컨이 전쟁이 끝난 후에 "톰 아저씨"라는 유명한 소설을 써서 흑인 노예제도와 매매가 잘못된 것임을 비판한 스토우 부인을 백악관으로 초청했습니다. 만나고 보니 이 부인은 아주 왜소하고 약한 사람 이었습니다. 사실은 이 부인도 가족을 사별하고 너무나 그리움에 가슴 아파하면서 어느날 시장에서 흑인노예 가족들이 팔려 가면서 애타게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가족이 죽었어도 이렇게 슬픈데 생이별하는 흑인노예들은 얼마나 가슴 아플까하는 마음으로 그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링컨은 스토우 부인에게 "그 대담한  소설을 보고 나는 부인이 아주 당차고 강하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연약한 부인 이시군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도 링컨에게 말하길 "저도 남 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께서 아주 우락부락하고 용감하게 생기신 분이실꺼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시군요"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 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바울은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내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능력이 없지만 그 분은 능럭이 많으십니다. 그 분의 능력을 덧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무디는 그 후 10만달러의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영혼구원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바꾸었습니다. 아예 전도자로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와 YMCA운동 즉 기독청년운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결국 부흥사가 된 그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수많은 교회를 부흥시키며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한 번은 어떤 비평가가 무디의 언어사용의 결함을 지적하였습니다.
"당신은 대중 앞에서 말해서는 안된다.당신은 문법적으로 많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러자 무디는 그 비평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문법에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잇다. 뿐만 아니라 크고 많은 일을 하기에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여 유효적절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친구여! 잠깐 내말에 귀를 귀울이게. 당신은 완전한 문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과 판단력,신랄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당신의 재능을 주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또 어떤 웅변가가 무디를 웅변가운데 비판 하였을 때 뮈는 그를 직접 찾아가 그에게 자기의 결점을 지적해준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해주시면 보다 나은 설교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무디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온전하게 바친자와 함께 하시며 그를 위하여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역사 하신다."
여러분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믿음을 보십시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잠언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나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나와 함께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솔로몬의 일천번재는 결코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울며 부르짖는 자의 기도가 결코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수 있다는 믿음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니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8]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돌아가셔서 이 믿음으로 평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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