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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고후 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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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본문 : 고린도후서 1:15-22 
설교 ; 황광민 목사 (석교교회)


이전에 숭실대학교에 한국말을 잘 하는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어 김기수 박사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시험시간이었습니다. 앞뒤로 앉은 두 학생이 시험지를 서로 보여주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두 학생의 성이 하는 표씨이고 다른 하나는 이씨였습니다. 이에 선교사는 즉석에서 문자를 써서 "표리부동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옛날 희랍에서는 거짓 증언하면 시민권을 박탈했습니다. 로마에서는 거짓 증언하는 자를 '타피안'이라는 바위에서 거꾸로 내던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코와 귀를 베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거짓 증언하는 자들에게 중형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은 하나님도 싫어하고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신실성의 문제

오늘 봉독한 본문 고린도후서 1장 15-25절은 신실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울선생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두 번 들르겠다고 계획을 세워 알렸습니다. 마게도니아로 가는 길에 한번 들르고 다시 마게도니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약속대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신실성 문제가 대두된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이에 대한 바울의 변명입니다. 17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진실성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진실하지 못한 거짓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특히 정치가들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거짓말이 내일이면 드러나는데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이 드러날 때 드러나더라도 거짓말을 하고 봅니다. 거짓말을 하다가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이로써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말할 수 없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이 어디 정치가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밥먹듯 거짓말을 합니다. 지금은 종교인들의 말도 그리 신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여튼 거짓의 문제는 사회전반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번 대구 지하철 호재 사건에서도 여러 사람이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났습니다. 130여명이 죽고, 또 120명이 크게 다친 사고에서도 책임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제 하에서 낮이나 밤이나 매일 겨레의 구출을 위하여 일하신 민족지도자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거짓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다. 군부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했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거짓말을 아니하리라." 거짓이 나라를 망치는 원수라고 하였으니 그의 판단은 높이 사야 하였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안창호선생이 평양에서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열심히 수고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학생이 결석계를 냈는데 남의 도장을 빌려서 찍고 손으로 살짝 비벼서 제출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니지만 안창호선생은 중벌로 다스렸습니다. 그것은 대성학교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요 그런 학생이 대성학교에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나쁜 정신으로 공부를 해봐야 나쁜 짓 하는데 쓸 것이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회를 하는 자리에서 전 학년 학생들 앞에 그 학생의 무기정학 처분을 발표하였습니다. 밥먹듯 거짓말하는 이 시대에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아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가 한 말은 모두 신실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19절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말하였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노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아멘. 여기서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한 입으로 Yes와 No를 동시에 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0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셨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구약에 언급된 메시야 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성취될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이번에 로또 복권 사셨던 분계십니까? 복권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빈자의 세금"입니다. 좋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사행심을 조장하여 국민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 로또복권에서 1등이 될 확률은 1년에 벼락을 두 번 맞을 확률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살아도 벼락 한번 맞지 않고 사는데 1년에 두 번 벼락 맞을 확률이니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보다 더합니다. 어떤 분은 이 확률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25센트 짜리 동전을 무릎까지 쌓아놓고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확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신실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시간이 우리의 계산보다 길어져서 그렇지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창대 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은 오백 년 만에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치밀하게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키우시면서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관영 하여 심판하실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자

우리 성도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신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신실해야 합니다. 18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아멘. 여기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우리는 한 입으로 동시에 두 말 하지 않고 신실하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는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바울 선생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3절-37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가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왜 예수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도 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같이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은혜의 빛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신 권사님들을 보면 영락없이 권사님의 얼굴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권사님 같고, 장로님같이 보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얼굴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문제입니다. 속사람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신실함을 닮아야 합니다. 겉이 닮았으니 속도 닮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의 속사람도 신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십시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실하게 사십시다.

성령의 보증을 받으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실하게 살려면 성령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름 부어 세우시고 보증하시기 위해 성령을 주셨습니다. 21절에 보면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2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명을 감당할 때 성령의 보증을 받음으로 신실하게 충성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신실함을 증명하려면 증인이 필요합니다. 오해를 받더라도 옆에서 보증을 서 주면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보증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중심까지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실한지는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사람은 외형의 결과만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짓겠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내가 성을 갈겠다", "내 말이 거짓이면 내가 개 아들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써서 자신의 신실함을 애써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신실함을 어느 정도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보증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보증을 받아야 참으로 신실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에 의지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양심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에 의하여 화인맞은 양심이 살아납니다. 양심보다도 성령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정을 받을 때 신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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