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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옷으로 갈아입고 / 삼하 12:15-20,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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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담임목사
새 옷으로 갈아입고
( 삼하 12:15-20, 눅 15:20-24 )

 
창세기 38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입니다. 유다를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엘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그 당시의 법에는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게 되어 있는데 동생 오난은 형수를 취하기 싫어 범죄하여 다시 죽었습니다. 그 때 막내는 어렸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혹시 또 아들이 죽을까 하여 다말에게 막내 셀라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 유다가 딤나에 양털을 깎으러 올라갔습니다. 다말은 이 말을 듣고 창녀처럼 옷을 입고 면박을 하고 딤나 길에 서 있었습니다. 유다는 이미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이기 때문에 이 창녀에게 염소 새끼를 주기로 하고 들어갔습니다. 염소 새끼를 주는 약속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맡겼습니다. 유다는 후에 염소 새끼를 가지고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찾으러 갔지만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소문에 다말이 임신했다는 말을 유다가 듣고 당장 며느리를 불사르라고 하였습니다. 과부가 임신을 하였으니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이치였습니다. 그 때 다말은 자신이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유대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합니다. 후에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쌍둥이인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베레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간혹 알 수 없는 진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수까지도 하나님은 선용하시고 거룩한 후사를 욕된 조상을 통하여 주시기도 합니다.


옷이란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합니다. 창녀차림을 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창녀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다말의 차림은 시아버지도 실수하게 하였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가 실수하게 하려고 그 차림을 한 것입니다. 남이 실수할만한 옷은 금물입니다. 여름이 되면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의 옷차림에 유혹을 당합니다. 여름이면 성추행이 겨울보다 훨씬 늡니다. 그런데 남성뿐만 아니라 유혹할만한 옷차림을 한 여성들에게도 성추행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옷이란 인격이며 직업을 나타내며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한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중요한 도구입니다. 나 자신을 바르게 판단 받고, 바르게 인정받고, 바르게 표현하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중심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외모를 보고 사람을 추측하게 됩니다. 외모 보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편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성과 예의와 최선의 외모가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옷이 중요한 민족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옷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주를 중요한 삶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먹는 것과 사는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옷입니다. 옷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도 옷이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에게는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옷은 우리의 성품을 상징할 수 있다. 예수님의 성품은 그분의 옷처럼 솔기가 없다. 즉 여기저기 이어 붙인 데가 없었다. 통일과 연합. 그분은 자신이 입은 옷 같았다. 나누인 데 없이 온전하셨다”고 합니다. 옷은 성품입니다. 옷은 인격입니다. 우리의 옷을 보세요. 우리의 옷은 우리의 성품입니다. 옷을 보면 대개 그 사람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옷을 갈아 입히시는 분입니다. 창세기 3장에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가죽옷을 친히 지어 입히셨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흰 세마포로 지은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는 훈장 대신 옷을 갈아 입힙니다. 마치 명예 훈장을 받는 사람처럼 대우합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의복으로 갈아 입히라고 합니다. 새 집에 돌아온 아들은 새 옷이 필요했습니다. 남루하고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는 옷을 벗고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제 먼 방황의 길을 끝내고 돌아온 아들처럼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첫째, 새 집에 돌아오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남루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아들이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옷을 갈아 입히는 일입니다. 남루한 옷, 더러운 옷, 냄새나는 옷은 아버지 집에 맞는 옷이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는 아버지 집에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옷만 봐도 가슴이 아픕니다. 아들의 옛날 생활을 보는 것 같아서 그 옷만 봐도 싫습니다. 제일 먼저 빨리 그 옷을 갈아입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집이든 그 집에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새 집에는 새 집에 맞는 옷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잔치에 초청된 사람이 예복을 입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예복이 없으므로 책망을 당하고 쫓아냄을 당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잔치에 가면서 예복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잔치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 갈 때에 예복을 갖추지 않고 가는 것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소란하게 하는 것은 결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가급적이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기를 원합니다. 한쪽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잘 설득하고 이해시켜 교회에서 하세요. 왜냐하면 우선 교회에서 해야 하나님이 새 가정에 복을 더 주십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훨씬 소란하지 않고 경건합니다. 교회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결혼식에 와보고는 다들 좋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회에서 하면 돈이 적게 듭니다.

하나님의 집에 초대된 사람은 예복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온 사람은 아버지의 집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스가랴 3장에는 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의복을 벗고 아름다운 예복으로 갈아입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옷을 갈아 입히는 것은 이 일을 방불케 합니다. 우리의 옷이 아버지의 집에 초대받기에 어울리는 새 옷입니까? 돌아온 아들의 옷답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다시 돌아오려면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해야합니다. 허랑방탕하게 살 때의 옷을 그대로 입고 아버지의 집에 버틸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 4:22-24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필수 과목입니다. 골로새서 3:9에도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라고 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벗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옛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옷을 찢는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 41번이나 나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깊이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는 사람은 옷을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완전한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레위기 6:10-11에는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번제하러 나갈 때는 세속 옷을 벗고 신령한 옷으로 갈아입고 재를 가지고 나가고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옷이 신령한 옷, 진리의 옷이 되어야 참 예배가 됩니다. 교회에 나올 때는 먼저 더러운 옷을 벗는 회개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시는 중에 변화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환히 빛났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는 우리는 우리의 옷도 신령한 옷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옷이 눈부신 옷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들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다시 돌아온 아들은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야”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 같지도 않은 아들에게 아들로 인정하는 옷을 입힙니다. 아들은 아들의 옷이 있습니다. 종은 종의 옷이 있습니다. 아들이 종의 옷을, 종이 아들의 옷을 입지 않습니다. 그 옷으로 아들인지, 종인지 압니다. 우리가 옷만 봐도 어느 편이 이도령인지, 어느 편이 방자인지 금방 알아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많은 종들 앞에서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종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궁핍, 고독, 기근, 절망에 헤매는 심령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아들이 종들 앞에서 당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권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새 옷을 입으면 아들딸처럼 권위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용서하심과 환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1에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살 권리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8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살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새 옷을 입었으면 자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사랑을 입을 자격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할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사십시오.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나 먹는 탕자가 아닙니다. 회복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찬송가 495장 1절의 가사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 영혼이 은총으로 죄짐을 벗고 자녀가 되고 이제 세상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려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다시 살려면, 다시 얻어지려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의 수의를 입지 않습니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들에게는 다시 살아나는 옷이었습니다. 로마서 13:14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산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육신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옷을 다 벗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읍시다.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만 보이게 합시다.

바다에 가면 소라게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소라게는 백여 종이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것은 날 때부터 자기가 살 수 있는 껍질을 가지고 나옵니다. 또 어떤 것은 날 때부터 자기 껍질을 가지고 있지 못한 소라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집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집을 못 가진 게는 자기 눈에 들면 아무 데나 들어가서 제 집처럼 삽니다. 기어 다니다가 빈 소라껍질 가운데 하나를 고릅니다. 그리고 집게발을 벌려 그 소라껍데기 입구를 재어 봅니다. 재어 보고는 그 집이 자기 몸에 맞겠구나 싶으면 지체 않고 배부터 밀어 넣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삽니다. 살다가 나중에 몸이 커져 그 소라 껍질이 불편하게 되거나 싫증이 나면 금방 껍질을 벗어버리고 다른 소라 껍질을 찾아 나섭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들어가 살다가 싫으면 또 벗어 던집니다. 이것이 소라게의 생태적 습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소라게처럼 자기 마음대로 집을 바꾸고 껍질을 바꾸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이면 주일에 맞는 껍질을 쓰고 가고, 주일이 지나면 세상에서 부담 없이 쓰고 살 수 있는 껍질을 또 골라 쓰는 편의주의적 신앙입니다.

신자의 껍질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옷은 절대로 벗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옷을 입고 어디든지 다녀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 옷이 우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누구나 내 옷을 보고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다녀야 합니다. 인간이 경험한 첫 개혁(改革)은 나뭇잎을 가죽옷으로 갈아 입히신 것입니다. 가죽옷은 동물을 잡아 희생으로 드려진 옷입니다. 희생의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옷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어줍니다. 예수님의 가죽옷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가리어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많은 재물과 식구들을 데리고 형님을 만나러 옵니다. 야곱이 형님 에서를 만난 다음 이유 없이 세겜이란 곳에서 오랫동안 머뭅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소중한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그 오라버니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다음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다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자행한 것입니다. 야곱은 딸 디나가 욕을 당한 것도 속이 상하지만 아들들이 하나님의 성례를 이용하여 살인한 것이 마음 아파 다시 벧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가 처음 아버지 집에서 도망쳐 나와 삼촌의 집에 갈 때에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단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 때 야곱은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창 35:2). 옷을 갈아입는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나올 때마다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입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옷을 갈아입지 않는 제사는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둔하여져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이란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죄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어린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윗은 아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아들이 죽자 그는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먹었습니다(삼하 12:20).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는 자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허물을 다 벗어 하나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옷을 갈아입고 죄에서 해방되고 새롭게 거듭나고 죽었다가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에머슨은 “옷을 깔끔하게 입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개들도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공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개의 공격을 받지 않을 만큼 깨끗한 옷을 입고 다녀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을 만큼 정결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결론

리처드 포스터의 ‘심플 라이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스는 재단사로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 도시의 어느 유력한 사업가도 새 양복이 필요하자 한스에게 가서 양복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 사업가가 양복을 찾으러 가보이 한쪽 팔은 이쪽으로 뒤틀려 있고 다른 한쪽 팔은 저쪽으로 뒤틀려 있고 한쪽 어깨는 불룩 솟아 있고 다른 한쪽 어깨는 푹 꺼져 있었습니다. 그는 옷을 잡아당기면 고생을 하다가 결국 몸을 꼬고 비틀어 이상한 양복을 가까스로 꿰입었습니다. 공연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그는 재단사에게 감사한 뒤 값을 지불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한 버스 승객이 사업가의 이상한 옷차림을 한참 뜯어보다가 재단사 한스가 만든 옷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에 승객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세상에, 한스가 뛰어난 재단사인 줄은 알았지만 당신같이 기형인 사람한테도 완벽한 맞춤옷을 지어줄 수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합한 옷을 지어주시는 재단사이십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시는 옷을 입으면 누구에게나 맞습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시는 옷을 입으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책에서 어떤 사람이 ‘베스트 드레서’인가에 대하여 난 것을 보았습니다. 베스트 드레서의 요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세 가지만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숙함으로 자신을 장식합니다.
둘째는 선행의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어떤 연령층의 사람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옷차림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너무나 죄악이 많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죄악으로 휩쓸려 들어가 우리의 옷을 더럽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보다 도덕성이 월등히 높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따를 수 없는 밝은 빛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우리의 옛 옷을 벗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지어주신 내 몸에 맞는 새 옷으로 갈아 입읍시다. 또 한 주간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예수님의 인격으로 장식하고, 베스트 드레서로 하나님의 당당하고 멋있는 아들딸로 새 옷을 입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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