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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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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자 :손상률
† 설교제목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 성경본문 :사도행전 3:1~10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오순절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성령강림의 역사는 교회사적인 의미에서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와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으로 나타난 성령이 거기 모인 사람들 위에 작용하면서 큰 능력을 힘입게 하였습니다(행2:1-4).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다 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 때 마침 세계 도처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와 있었기 때문에 전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때를 같이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여러 방언으로 말을 하게되니 듣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의 언어로 듣게되고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2:41).

성령의 역사는 전도자들에게 방언뿐만 아니라 온갖 능력을 행하게 하여 여러 가지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을 설명하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였습니다(마11:5).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개하는 복음 운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교회 곧 생명력이 발동하는 교회의 능력을 과시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새봄의 문턱에 들어서는 3월 첫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마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서고 뛰어가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같이 우리 교회에 새로운 활력이 넘치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말씀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Ⅰ. 기동력을 잃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지식적인 믿음이나 오랜 경륜을 통하여 경험하고 있는 과거의 믿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나의 삶과 직결되는 믿음이어야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약2;22). 그는 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으로 비유하면서 그것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2:26). 식물인간처럼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믿음이 대부분입니다. 의식을 가졌으니 식물인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면 앉은뱅이의 상태라고 할 만합니다.


(1) 신체적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건강한 몸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물며 병약한 몸으로 지체의 정상적인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된다면 그 불편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질병이나 사고, 또는 뜻하지 않은 재난 등으로 이와 같은 불행이 누구에게나 부닥쳐옵니다.

이 불행한 사람이 성전의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 미문(美門))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린도 양식의 황동으로 만든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합니다. 대궐이나 성전이나 또는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지칭되는 장소에도 인간이 사는 곳에는 불행이 있고 질병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야 했고, 교회와 복음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요5:2-9).


(2)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앉은뱅이는 다리의 힘이 없기 때문에 걸음을 못 걷는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 공간의 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의 눈치를 봐야되고 어느 것 하나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을 때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스스로 삭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선한 뜻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신앙의 상태를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힘을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믿음이 있다고 하나 그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앉은뱅이 상태에서 머물게 되고 맙니다.


(3) 범죄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신체적인 장애보다 더 큰 정신적인 불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을 만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 불행은 자기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류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면서부터 원죄 아래 매여있는 자들입니다. 죄는 인간의 육체도 정신도 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기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이 앉은뱅이에게도 올바른 정신력이 발휘되었다면 비록 불구자의 몸일지라도 더 고상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 병약한 몸을 가지고도 참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처럼 신령한 세계를 동경하지 못한 채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질에다 목을 메고 그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빌3:19).


Ⅱ.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령 받은 사도들에 의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된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1) 사도들을 만난 것입니다.

본문 말씀 1-2절에는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본문 3절을 보아서 그 만나게 된 경위는 누가 계획을 했거나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우연히 조우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거기 나와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많은 시간 중 특별히 지금 이 시간에 사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 앞으로 지나가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얼마만큼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사도들을 만나고 그들과 눈빛을 마주치며 대화를 시작하므로서 신령한 세계에 접근하는 계기를 잡았습니다.


(2) 복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실 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마10:8). 그런데 사도들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앉은뱅이는 “우리를 보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에 돈을 얻을까 생각하여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는 복음입니다. 세상의 은과 금에 비교될 수 없는 존귀한 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과 금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귀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물론 이 앉은뱅이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가 이 진리를 진작 알았더라면 벌써 앉은뱅이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은과 금을 구했으나 거기에 비교될 수 없이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3) 은혜로 되었습니다.

자기가 알고 찾아가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시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서 생각 밖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받고 보니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런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0).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 은혜입니다(요3:16). 또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되어진 것이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Ⅲ. 변화를 받은 자입니다.

쇠붙이가 전기에 접속되면 동력이 생겨나듯이 범죄한 인간이라도 그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게 되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사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였습니다. 매우 희망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1) 다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더라”고 했습니다(6-8절).

복음의 능력은 사람의 영혼과 함께 그 육체도 치유하게 합니다. 지금껏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 때문에 자기 발로 걷지 못하던 사람이 마음대로 뛰며 걸으며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자기 발로 걸으며 뛰어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갖게 하여 준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다니면서 사람 구실을 못했던 사람이 자기의 의지대로 활동하고 오히려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삶의 패턴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힘입게 되면 그 신앙의 양상이 달라지고 활동의 공간이 넓어집니다. 놀라운 변화와 기적을 실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신령한 세계가 열려졌습니다.

앉은뱅이가 발목에 힘이 생기면서 벌떡 일어서서 성전을 향하여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안이 밝아지고 신령한 세계를 동경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펼쳐진 것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있었던 앉은뱅이의 세계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은과 금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구걸하여 모아 놓은 동전 그릇은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부터가 변화된 증거입니다(빌3:8). 그리고 가장 먼저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성전 문 밖에 죽치고 앉아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한 세계에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으나 은혜를 받고 나니 누가 끌어 주지 않아도 자기 발로 뛰며 걸으며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3) 활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동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일하는 교회는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복음운동의 역사가 실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 증거의 임무를 맡기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은 권능을 행사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작용하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합니다. 교회 활동을 하되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보고 있지만 않습니다. 전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교회를 받들며 성도를 섬기는 일에 발벗고 나서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작용하는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자기 방어적인 모습의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뛰며 걸으며 생명운동의 전위대가 되어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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