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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 계 2:8-11, 마 25: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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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30)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계2:8-11, 마25:34-36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 보면서 많은 도전과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2월 18일 손양원 목사님의 시신과 정양순 사모님의 시신과 두 아들의 시신이 묻혀 있는 여수 애양원 묘지 앞에 서서 또 한번 가슴이 저려오는 아픔과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사진이 아래 층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의 폴리캅이요 한국의 프랜시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은 한국교회를 위해서 바쳐진 순교의 제물이었고 한국 땅에 던져진 십자가 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와 주기철 목사가 남북화해의 사자였다면 손양원 목사는 동서화해의 사자였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 사람으로 전라도에 가서 죽었고 주기철 목사는 경상도 사람으로 평양에 가서 죽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경상도 사람으로 전라도에 가서 죽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에게는 지역감정이 없었습니다. 예수사랑과 동포사랑만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공산당도 사랑했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도 사랑했고 버림 받은 나환자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이다지도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날 아침 남대문 네거리에 있던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사 들고 남산에 올라가 숲 속에서 하루 종일 어두운 저녁이 될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기도하면서 그 책을 읽은 때가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92년 4월 29일 베를린에서 템플턴 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수상 연설을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세 다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의 원수 사랑의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수교회 옆에 세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 목사는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랑의 본보기를 손수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사랑의 사람이었으며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가 좀 깁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보낸 시간보다는 훨씬 짧습니다. 긴 설교지만 너무나 귀중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설교이므로 잘 들으시고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짧게 줄이려고 해도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 손양원 목사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한경직 목사님과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해인,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손종일씨와 김은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손양원은 믿음의 유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가장 귀한 유산은 재물의 유산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입니다. 손종일씨는 1908년경 이웃에 사는 형뻘 되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 믿고, 상투도 자르고, 술과 담배도 끊고, 밤새워 성경을 읽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설날 아침 문중의 일가가 다 모여 조상의 묘에 절하는 도중 제사상을 뒤엎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한 후에는 매일 아침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손종일씨는 장로로 김은순씨는 집사로 칠원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한번은 칠원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했는데 은혜를 받은 손 장로는 집에 돌아와 기뻐하면서 아내에게 논 다섯 마지기 중 세 마지기를 바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는 비 새는 교회당을 짓는다는데 두 마지기만 남겨 두어서 무엇 하겠느냐 면서 남은 두 마지기를 다 바치자고 해서 결국 다섯 마지기를 다 바쳤습니다. 손 장로는 자녀들에게 논 밭이나 재물보다는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후에 그의 세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고 두 명의 손자는 순교자가 되었고 두 명의 손자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큰아들이었던 손양원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새벽 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힘썼습니다. 손양원은 11살 때 칠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은 매일 일본 왕을 향하여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방요배를 거절했습니다. 어느날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로 교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십시오." 손양원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라면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므로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7살 때 서울에 가서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을 하면서도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했습니다. 주일날 일 안 한다고 만두가계로부터 쫓겨나면서도 그는 주일을 지켰습니다. “굶어도, 못 배워도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는 만두가계에서 쫓겨나서 이리 저리 일자리를 찾아 다니면서 그간 모아 두었던 돈도 다 써 버리고 삼일을 굶어야 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손양원은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 70전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십일조였습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십일조 도둑은 안 돼" 하며 그 돈을 당시 그가 다니던 안국동교회에 바쳤습니다.

손양원은 19살 때인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중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1923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면서도 산 기도와 노방전도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22살 때인 1924년 귀국하여 19살의 정양순양과 결혼을 했고 칠원교회의 집사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1926년 3월에는 진주에 있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여기서 성경학교의 강사였던 주기철 목사를 만났습니다. 손양원은 3년 동난 경남 성경학교에 다니면서 주기철 목사에게서 순교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성경학교 졸업 후 여러 교회를 개척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5년 4월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7월에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경상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한 인연이었습니다. 그 때 손 전도사가 장갑은 물론 까운 조차 입지 않고 나환자들에게 다가서며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애양원 교회의 성도들은 큰 감동을 받았는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전도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던 손 전도사를 애양원 교회로 청빙한 것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9년 7월부터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손양원 전도사를 연행해 갔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일경들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경성 구치소, 청주 구치소 등에서 8. 15 해방까지 5년 간의 옥고를 치루며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 단심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전도사가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의 기도와 격려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양순 사모는 남편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아내였고 자식들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였습니다. 여수 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는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 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어디로 가십니까?' '광주로 ...' 채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어머니는 숨겨 가지고 온 성경책을 펼쳤다. 반갑다고 인사나 나누고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간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남편의 육신의 삶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아버지가 당할 고초가 아니라 혹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서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손양원 목사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손양원 전도사가 감옥에 있던 1945년 4월 13일 부친 손종일 장로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불효자식”이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또한 평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와 박관준 장로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종도 신앙의 진리를 굳게 지켜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이틀 뒤인 17일 청주교도소에서 손양원 전도사가 석방되어 애양원 교회로 돌아왔을 때 1 천 여명의 나병환자들이 뛰어나와 손양원 전도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5년 뒤인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는 공산군들에게 끌려가며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을 당하므로 결국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죽도록 충성하며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수 애양원 교회의 양원과 손양원 목사의 양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뗄 내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양원 교회는 손양원 목사와 뗄 수 없게 되었고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양원은 윌슨 박사가 1909년 설립한 나환자 병원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45년 8월 해방 후 다시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그의 남은 생애를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출옥 후인 1946년 3월에야 비로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 목사는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 목사가 나환자의 환부를 입으로 빠는 그림이 아래 층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나환자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은 한국의 프랜시스였습니다. 그의 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병든 육신일지언정 저 바깥의 표리부동한 자들보다 몇 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라 하며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노래도 그런 심정의 한 표현이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애양원 나환자들에 대한 손양원 목사의 사랑은 노래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딸은 나환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냈다. 틈만 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늘 가슴 한 구석이 빈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 놓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다. 보통의 나환자들보다 훨씬 병이 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14호실이다. 아버지는 14호실 환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더욱 많이 쏟았다. 환자들이 거부하는데도 그들의 손을 잡고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피고름 나는 손을 거침없이 부여잡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 자주 스스럼없이 나환자들과 어울리는 아버지였기에 결국 나병에 걸렸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극구 사양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피 검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피가 더 맑다는 것이다. 검사 결과를 전해 들은 아버지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그래? 그러면 이번에도 틀린 건가?' 할 뿐이었다. 자신의 나병 감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를 지독하게 미워하고 헐뜯는 폐병에 걸린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마치면, 자기를 가장 미워하고 헐뜯는 그의 집을 심방하여 안수 기도를 해주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가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계속해서 손 목사를 미워했습니다.  목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 집엘 갑니까?"고 물으면,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당회가 그를 치리하자고 했지만 손 목사는 결국 사랑으로 그 여자의 마음을 녹여 항복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의 프랜시스요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 목사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손목사는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아 부산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여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한신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서울 이태원 외국인 아파트 경비의 일을 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는데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어둡게 살다가 1979년 12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손동희씨를 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이젠 이런 것, 저런 것, 슬픔도, 미움도 한갖 꿈에 본 듯 잊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떠나려는 그의 옷자락 붙들고 우리는 목을 놓아 소리 높여 울었다. 한이라도 풀듯이 .... 미움이 애처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여전히 울음 섞인 음성으로 나에게 자기의 진실을 말했다. '동희야,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곧 하늘 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꿇고 사죄하련다.' 그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난 그는 정확히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 지금쯤 저 천국에선 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오빠와 재선 오빠가 손에 손을 잡고 이 시간 집필하는 내 모습을 지켜 보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10월 27일 애양원에서 치러진 두 아들의 장례식 때 다음과 같은 9가지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서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나는 지난 2월 18일 여수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에 걸려 있는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습니다. 여수 바닷가에 떠 있는 배 한 척의 사진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1950년 7월 경 손 목사님과 가족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배 한 척을 마련했습니다. 손 목사님의 짐을 다 실었습니다. 부흥 집회에서 돌아온 손 목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자기는 피난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마지막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배에 올라 피난을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자기들도 다 손 목사님과 함께 애양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짐을 다시 내려 놓았습니다. 손 목사는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마지막까지 몸으로 실천한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셋째 손양원 목사는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 목사는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심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손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의 천국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간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는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동안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손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이 아래 층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정양순 사모는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과 합장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가 순교하던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난 아기 동길은 후에 커서 아버지를 따라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 지금 필립핀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순교적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들이었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산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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