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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라 - 일어나라 (사 51:9 ~ 11, 고후 1:8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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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종 화 목사 (경동교회)
  깨어라 - 일어나라 (이사야서 51:9 ~ 11,  고린도후서 1:8 ~ 11)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51:9 ~ 11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힘으로 무장하십시오, 주의 팔이여! 오래 전 옛날처럼 깨어나십시오! 라합을 토막 내시고 용을 찌르시던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주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입니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후서 1:8 ~ 1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신뢰하지 말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우리는,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하나님께 둡니다.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받은 은혜의 선물을 두고,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4:35 ~ 41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께서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깨우며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할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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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에 재미있는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지나 건너편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밤이 되어 어두운데,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어서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제자들이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전히 뱃머리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서 죽게 되었다고 호소했더니, 예수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그러자 바람이 잠잠해지고 바다가 고요해져서,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들 두려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여러분이나 저나, 모든 사람이 한번만 아니라 아마도 여러 번씩 죽을 고비를 당하게 됩니다. 혹시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생의 격랑이나 풍파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나 비극을 여러 차례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누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뭔가를 잡고 싶어합니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아픔에 빠질 때,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장면처럼 풍랑 때문에 배가 뒤집어지게 되면, 배는 다시 건지거나 새로 마련하면 되지만,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생명은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물건은 대치가 가능합니다.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얼마든지 대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번 끝나면 대치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마 사람이 갖는 불안, 전율, 두려움이 큰지도모르겠습니다. 사람은 한번 엎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배가 흔들리고 물이 차서 죽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사람이 깨우지 않으면 주무신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24시간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깨우지 않으면 주무십니다.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않 계신 것이 아니라 편하게 주무십니다.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십시오! 그러나 깨울 수 있는 사람은 잠들지 않은 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깨워 일으켜서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 요청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풍랑을 다 제어하고, 사납게 날뛰는 파도도 고요하게 해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인간에게 묻습니다. “나를 믿느냐?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느냐? 과거에 내가 너를 구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믿느냐? 지금도 건져준다는 것을 믿느냐? 내일도 내가 풍랑에서 건져 주리라는 것을 믿느냐?” 나를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세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 때문에 내가 대신 죽고 그대를 구원했다는 것을 믿는가? 지금 아무리 격랑이 심해도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준다는 것을 믿느냐? 그러면 미래에 다시 와서 그대를 건져줄 것을 믿는가?”
오늘 봉독한 구약 본문 이사야서를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과거에 바다의 깊고 넓은 물을 다 말려버리시고, 그 바다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주님, 주님의 팔을 지금 내가 봅니다.”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로해주고 구원해주는 사람은 바로 야웨 너희 하나님이 아니냐. 그런데도 자꾸 죽을 거라고 두려워하는 너희들은 누구냐? 과거에 너희를 지어주고 건져주고 구원해준 분, 하늘을 만들고 땅을 세우신 분, 그분을 잊었기 때문에 너희는 지금 두려워하는 것이다.”

맥락이 같은 말씀이 오늘의 서신서인 고린도후서에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선교여행을 하다가 고난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에게 밝힐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들을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주고 계시고,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배를 함께 타고 온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묻습니다. “구원받은 사실을 믿는가? 그대들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는 것도 믿는가?”
중세기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를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된 때라고 합니다. 중세와 근대의 분수령을 종교개혁으로 보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어서 로마의 국가 종교가 된 다음부터 1500년대 전반에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교회가 태어나기까지의 약 1200년 동안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깨운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자 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정황, 남들 모르는 골방에 모여서 살짝 예배드리고 몸을 피해야 했던 상황, 로마의 지하 묘지 카타콤이 집회 장소였던 그런 상황이 처음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어서 떳떳하게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아니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오히려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야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차라리 지하에서 어렵사리 믿던 때의 신앙이 더 순수했고 그 심정이 더욱 진지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떳떳하게 믿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으면 안되게 되자 나태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루터는, 사자 밥이 되던 그 시절에는 하나님이 사자 밥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계셨지만, 교회가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할 그때에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통로가 막힙니다. 인간의 교만이 최고조로 달해서 중세기가 늘을 가리고 있을 동안, 하나님은 깊이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대신 인간이 들어서고, 윤리가 들어서고, 종교가 들어서고, 교리가 들어서고, 권위주의가 들어섰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가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잠자고 계셨고, 격랑을 맞은 인생은 구원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살려달라고, 아니 인간적인 삶을 돌려달라고, 누구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 삶을 좀 회복시켜 주시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종교개혁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하는 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12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찾으셨던 것은, 인간이 입으로, 몸으로 고백하는 믿음,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함께 삽니다” 하는 이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이 사회 여러 분야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만, 미술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르네상스 시대라고 하면, 종교라는 울타리, 교회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던 예술이, 인문학이, 인간 이성이 그 속박을 벗어나 다시금 자유를 누리며 꽃을 피운 시절입니다. 그 전까지 미술가들, 특히 교회에서 일하던 미술가들은 예술활동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얼굴은 그림으로나 어떤 형상으로도 그리거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모든 미술품과 조각품에는 기독교적인 신의 모습이 없습니다. 있었다면 희랍신화나 로마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모습 뿐이었습니다.

교회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미술 작품은 미술가들의 창의적인 작품이 아니라 교회와 왕과 영주가 주문하는 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맞춤형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라는 위대한 화가가 유명한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최후의 심판! 천정  벽화인 이 그림을 보면 여러 가지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성 바톨로매오라고 하는 한 성자의 찢겨진 살갗을 어떤 사람이 손으로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찢겨진 살갗 안에 사람의 얼굴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화가 자신의 얼굴입니다.

이 화가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찢겨진 살갗, 인간의 아픔 속에서 질식해 가는 이 화가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 때에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 옆에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 둘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 하에서 식민 생활을 하던 변두리 지역 아프리카의 흑인 두 사람입니다. 당시에 자기들만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프리카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저항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나고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교회마다 이것을 카피한 그림을 걸어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통해서 정말 인간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인간의 모습,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정해준 지침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능력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림뿐만이 아니었죠. 음악도 그랬죠. 조각도 그랬죠. 문학도 그랬죠. 우리 인간 문화의 모든 분야가 이제 다 해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반종교 운동, 반교회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인문학을 찾았다고, 신앙의 감옥을 부수고 인간의 이성을 되찾았다고,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찾았다고, 인간은 자유롭게 되었노라고. 다 옳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배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격랑을 잠재우는 그분의 능력을 보고 잃었던 평안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평안을 찾고서도 여전히 믿음이 없는 것 같구나.” 이 말씀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중세를 부정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신을 거부하자 인간이 되살아났다. 하나님을 부정하자 인간이 긍정되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말을 빌어서 거꾸로 말씀드립니다. 중세기 말, 인간 스스로를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이성이 해방된 때에, 사람이 진실로 인간의 참 모습을 찾는 그 순간에, 하나님도 그 자신을 회복했습니다. 신이 죽어야 인간이 살고, 신이 살면 인간이 죽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살면 창조주 하나님이 깨어나시는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의 참 관계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하나님은 그 죽음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인간의 발견은 사실은 신의 발견입니다.

종교개혁이 왜 우리에게 복입니까? 인간자신의 오만과 무지 속에 가두어 놓았던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주 하나님으로 등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세계와 문화와 예술이 다시 살아 생동하게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회개하는 외침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우리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부활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와 약속하십니다. 먼 훗날, 하나님의 시간으로, 곧 인간의 시간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어느 날, 다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하나님, 부활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이제 미래에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죽었던 신이 따로 있고 다시 오실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하나님이 창조 때, 십자가 때, 부활 때, 재림 때 우리에게 오셨고, 오시고,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다시 만나야 합니다. 진실로 만날 때 인간은 해방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과 함께 있음을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발견은 신의 발견입니다. 진실로 신앙이 깊은 사람은, 믿음이 깊은 사람은 진실로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인간 쓰레기처럼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오늘 예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가난을 없애실 수 있습니다. 질병을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시켜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지금 나와함께 있음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이 바라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기도하면 다 고쳐주신다고 합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진실로 인간다운 우리, 온전히 회복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교류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깨어서 그분을 깨우십시오.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분은 원하십니다. “깨어나자. 나와 함께 살자. 재림하는 그날까지 내가 함께 있겠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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