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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도의 십자가 교훈 / 눅 23: 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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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의 십자가 교훈 (눅 23: 39-43)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누가복음 23장 39절에서 4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강도의 십자가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갈보리산에서 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 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시고 양쪽에는 강도 둘이 못 박혀 죽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강도의 십자가는 십자가라고 하는 말 자체는 같아도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강도들의 십자가가 주는 의미 역시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강도들이 진 십자가, 즉 못 박혀 죽는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죽고, 강도들도 죽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교훈이 우리들에게 주는 바가 있는가 하면, 강도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도들의 죽음이 주는 교훈 혹은 삶이 주는 교훈이라도 해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강도들이 진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심판의 교훈 (39-)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뒤집어 놓으면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 다른 한 면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온갖 것을 베푸시고, 우리를 위해서 온갖 것을 희생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시고 가차없이 죄에 대해서는 심판을 하십니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신 만큼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믿으면 그것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죄꼬리 만한 것이라도 타협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럼 우리는 야단났구나'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쥐꼬리만한 죄까지라도 예수님이 대속해서 즉 뒤집어쓰시고 강도들이 죽는 것처럼 내 대신 죄인이 되어 죽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벌써 내 대신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을 면하는 것뿐이지 심판이 없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주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믿지 않던 강도들은 강도짓을 하다가 나중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죄를 지을 때는 그날 그날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을 위해서 다시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화를 위해서 매일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할지라도 지옥에 가는 일은 다시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채찍을 들어 치시는 것만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채찍을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 딸들이기 까닭에 잘 못 되었을 때 채찍을 들어서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채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채찍을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현세적 심판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한창 부흥이 될 때 굉장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고 유무상통 할 때 재산 절반을 떼어서 바치기도 한 사람들이 그들 부부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절반을 바치면서 전부인양 거짓을 하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할 적에 그 자리에서 징계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을 해서 죽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들이 지옥에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재산 절반을 팔아 바친 일이 있습니까? 믿음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헌금을 합니까? 그러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절반을 바치면서 전부인 것처럼 하나님을 속였다고 징계를 받았는데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속인 일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나니아가 옛날에 예루살렘에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적인 징계는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구원은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그들이 행한 짓에 대해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이었습니다.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강도 둘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은 한 번 두 번 강도짓을 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이요, 반복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남을 가차없이 희생시키면서 재미를 보던 자들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은 로마 식민지 백성들 중에서 아주 흉악한 죄인들만 처형하는 방법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칼을 갖다 대고 한 두 번 강도짓을 했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까? 이 사람들은 둘이서 평생 강도짓을 동업하면서 그 생활을 즐기던 사람들입니다. 그 동안에 하나님이 한 번, 두 번, 열 번 , 스무 번 강도짓을 했을 때 참아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강도들처럼 남모르게 감쪽같이 나만 아는 죄를 계속 반복하고 계신 분들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참아주심에 재미를 붙이고 계시는 분들은 없으십니까? 그짓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전부 아시면서도 참아주시는 것뿐입니다. 강도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재미를 붙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중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는 강도짓을 가차없이 하면서 반항하면 사람을 죽여 버리고 순순히 따르면 있는 것만 빼앗아 갖고 가 버리는 악마의 짓을 했습니다. 낮에는 손을 씻고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다정한 이웃으로 행세하였습니다. 즉 밤에는 악마요, 낮에는 천사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중적으로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회에 나와서는 천사인양 거룩하게 행동하고 집에 갔을 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로 돌아가면 개와 고양이가 싸우듯이 싸웁니다. 장터에 가서는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고사하고 할 짓 못할 짓을 다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나오면 "거룩 거룩"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본문의 강도처럼 칼을 들어야만 이중 생활입니까? 그네들은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광성교회에 온지 만 37년이 되었습니다. 37년 전에 처음 부임해서 세들어 살던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은 토끼장 집이라 하여 흙벽돌을 길게 짓고 토끼를 기르다가 망했습니다. 담벽에 철망을 대고 시멘트를 발라서 방을 꾸며 세를 놓고 살아가는 집이었습니다. 일곱 집이 그렇게 세 들어 살았습니다. 제일 안 쪽에는 주인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당시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그 집주인이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 동네에 전화가 없었습니다. 전화를 하려고 하면 우체국을 경유하는 전화기로 우체국을 불러서 '여보세요'라고 소리를 칩니다. 개미소리 만한 소리로 대답이 들립니다. '서울의 몇 번을 대 주십시오'라고 전화번호를 대 줍니다. 그러면 우체국에서 서울 번호에 연결시켜 주면 '여보세요'라고 큰 소리를 쳐야만 통화가 되던 때입니다. 그리고 수도가 없어서 지하수를 펌프로 퍼 올려서 그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전기는 들어왔습니다. 전기가 들어올 때 그 비용 일체를 내가 셋방으로 사는 그 집 주인이 감당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질고 착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그 집에 살면서도 주인을 도무지 만나 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주인에게 "주인을 좀 뵈올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사업이 바빠서 그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내 되는 사람이 아주 예뻤습니다. 인사를 하고 보니 그 사람은 황해도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습니다. 황해도 재령에 가면 주일에 장이 서지 않을 정도로 기독교가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재령 서부 교회 모 장로의 손녀였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갈 것입니다"라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교회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백식구파라고 하여 유명한 소매치기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 조직은 주로 기차나 시내 버스에 다니면서 사람들의 귀중품을 훔쳤습니다. 그 파에게 걸렸다 하면 여러분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날 백식구파의 두목과 그 쫄개들이 붙잡혔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두목의 주소를 보니 제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나중에 몇 해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감하여 나왔는데 할 일이 없었고 나중에는 거지꼴이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암에 걸렸었는데 아마 지금은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정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낮이면 동네에서 다정한 이웃이었습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 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슬쩍 슬쩍 전부 빼앗는 악마의 습성을 지닌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강도는 이렇게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에게만 손가락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중에 혹시 이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철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즉 이 강도 둘은 변명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죽였으니 죽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았으니 빼앗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것을 절대로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절대로 해꼬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참으시고 참으시다가 심판의 칼을 드시는 날 나의 것도 전부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9절을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하면서 감쪽같이 위장하여 살아가던 그들이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하는 속담처럼 잡혀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에게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얼마나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합니까? "네가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너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우리도 내려가서 살게 해 달라"고 하면서 말끝마다 원망을 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자기가 불평할 게재가 됩니까? 원망할 주제가 됩니까? 그렇지 못할 사람이 원망을 그렇게 맡아 놓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못할 주제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한 적은 없으십니까?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세계적인 역사 학자 토인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세계 역사를 써서 꽤 부피가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사실 세계 역사를 쓴다면 대제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입니다. 나중에는 붓을 놓고 "하나님의 심판은 연자 맷돌처럼 천천히 돌아가지만 골고루 먹힌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연자 맷돌질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시골에서 살았기에 연자 맷돌질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연자 맷돌이 천천히 돌아갑니다. 거기에서 밀가루도 찧어내고, 쌀도 찧어내곤 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돌아가는데 부서지기를 시작하고 껍데기가 벗어지기 시작하면 가루가 나오고 쌀이 나옵니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마지막에 가서 가루가 될 때는 전부 함께 가루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쌀이 나올 때는 전부 함께 쌀이 되어서 나옵니다. 골고루 먹힌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혹시 더딘 것 같아도 골고루 정확하게 먹혀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으심에 재미 붙이는 일이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사죄의 교훈 (40-41)

  누가복음 17장 3절에서 4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에 사는 사람이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도 모르는데 나만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이웃이 죄를 범하거든 나는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안 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저런 죄를 짓고 동참할까봐 극히 조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번에는 나에게 죄를 짓습니다. 말로나 모든 면에서 나를 얼마나 해꼬지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형제여 내가 그만 잘 못을 했습니다. 죽을죄로 잘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회개하거든 없었던 것처럼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를 하면 반드시 용서해 주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나는 죽어도 못해, 여섯 번째 까지는 할지라도 일곱 번째는 절대로 못해"라고 용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하셨습니까? 갚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갚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수를 갚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원수 갚는 죄를 짓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 갚는 권한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와서 일곱 번째 내가 잘 못했노라고 회개하거든 전부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내가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일곱 번만 죄를 짓습니까? 열 번 스무 번이라도 말로 짓고 마음으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럴 때마다 "하나님 정말 죽을  죄로 잘 못 했습니다"라고 기도하면 없었던 것처럼 용서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아닙니까? 반드시 용서의 전제 조건은 회개입니다. 죄사함 받는 일의 전제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나는 너에게 잘 못 한 일이 없다고 한다면 무엇을 용서해 주겠습니까? 잘 못한 일이 없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용서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용서 받아야 할 죄가 있지만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두 번 째 강도의 십자가 교훈은 회개하라 그리하면 용서함을 받는다는 사죄의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0절에서 41절을 보면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을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왜 마태복음 27장 44절을 찾아서 읽자고 했는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27장 44절을 보면 강도 둘이 함께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 40절에서 41절을 보면 그 중에 한 사람은 끝까지 욕을 하는데 비하여 한 사람은 오히려 욕을 하는 사람에게 야단을 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망할 짓을 하다가 죽으면서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예수님을 욕하다가 여섯 시간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에 한 사람은 깨닫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회개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0절을 보면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동일한 정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을 짓을 했으니 네가 죽는 것 아니냐? 망할 짓을 하다가 망하면서 누구를 원망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령 어린아이가 잘 못했을 때 채찍을 들고 선생님이 때립니다. 그러면 맞는 아이가 두 손으로 빌면서 무엇을 보고 빕니까? 선생님을 보고 비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 치는 채찍을 보고 비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체벌을 그치고 채찍을 내 버리면 매가 무서워서 잘 못했다고 하던 아이는 채찍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기 까닭에 나가서 그 짓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채찍을 보고 무서워하면 다시 똑 같은 죄를 반복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강도는 우리가 망할 짓을 해서 망하는데 무슨 잔소리가 많으냐? 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하는 고난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지른 죄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내가 범한 죄가 밉고 창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그 아픔이 부끄럽고 미운 것이 아니라 나의 죄가 밉고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징계가 끝났을 때 다시 그 짓을 하라고 해도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습니다. 죄 자체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죄 자체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죄 자체를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1절에 한 강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무서워 할 줄 모르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짓을 해서 죽는 것인데 무슨 말이냐?"라고 하면서 철저히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그 사람의 과거를 따지셨습니까? 절대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없었던 일처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에 회개하는 한 강도를 통해서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렇게 회개하면 이렇게 없었던 것처럼 깨끗이 사죄함을 받는다는 사죄의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응답의 교훈 (42-43)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에서 43절을 보면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망할 짓을 했으니 망해야지 라고 하면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없었던 일 것처럼 용서받은 후에 서슴지 않고 이 강도가 기도하였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즉 주께서 하늘 나라에 가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염치가 없어서 생각해 달라고만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입니까? 인간의 고통을 말 할 때 이 이상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급하다 급하다 해도 지금 숨넘어가는 순간처럼 급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는 가장 급한 때에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내가 죽어갈 때는 나 혼자 죽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 때가 가장 외롭습니다. "당신 없이는 못살아"라고 반복해서 외쳤다고 할지라도 죽어갈 때 함께 죽어줍니까? 하관식을 할 때 "여보 당신 혼자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라리 나도 같이 묻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관을 붙들고 나오지 않습니까? 끄집어내면 또 들어갑니다. 인부들이 화가 나서 막 묻어 버리려고 하면 사람 죽인다고 하면서 제 발로 기어 나옵니다. 절대 함께 죽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처럼 외로울 때가 없습니다. 가장 외로울 때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아멘"이라고 응답 하셨습니다. 우리말로 '내가 진실로'라는 말이 '아멘'의 뜻입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멘의 응답은 구체적이었습니다.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하는 간구에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여 직접적이며 구체적으로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강도의 십자가는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도의 십자가 교훈은

첫째 심판의 교훈입니다. 처음부터 주를 향해 욕하던 강도는 끝까지 회개할 줄 모르고 욕했습니다. 제가 망할 짓을 해서 망하면서 누구를 원망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교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재미를 붙이시면 안됩니다.

둘째 사죄의 교훈입니다. 한편 강도 역시 처음에는 주를 향해 욕을 하였었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와 사죄의 교훈입니다.

셋째 응답의 교훈입니다. 철저히 회개한 강도는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급하고 가장 외로울 때 기도하였습니다. 즉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즉각적이요, 구체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의 교훈을 하고 있는 강도의 십자가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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