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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의 추구 / 신 10: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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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민 목사 (나성영락교회)
행복의 추구 (신명기 10:12-16)


새해를 맞이한 것이 한달 반, 구정을 맞이한 지도 2주가 지나갔다.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낀다. 여러분! 매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new years resolution이 무엇인가? 돈을 더 버는 것,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 주위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갖는 것, 금연, 살을 빼는 것 5가지가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런 소원을 갖는 것은 자기 삶이 좀더 달라지고 행복해지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덕담은 '부자되세요'였다고 한다. 부자되라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는 줄 안다.

한국에서 지난해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새해의 소원 가운데서 응답자 중 71%가 돈을 더 버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고 100만 불을 벌 수 있다면 가족을 버리겠다고 한 사람이 26%, 믿음을 버리겠다는 사람이 25%, 매춘을 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 23%, 배우자를 버리겠다는 사람이 16%, 살인자를 무죄방면 하도록 위증을 하겠다는 사람이 10%, 타인을 청부 살인하겠다는 사람이 7%,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겠다는 사람이 3%나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통계를 들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행복관이 얼마나 잘못되고 삐뚤어졌는가 생각되지 않는가? 
조금 전에 봉독한 신명기 10장 13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란 말이 있다. 그리고 로마서 4장 6절에 보면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란 구절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행복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와 함께 인간들이 계속 추구해 온 삶의 내용이요 목적이라 하겠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도 행복의 추구는 생명과 자유와 함께 인간의 3대 기본권으로 되어 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생명과 자유라는 것도 결국 이 행복의 추구를 위하여 필요한 기본요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이처럼 누구에게나 스스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추구하는 행복이 누구에게나 다 저절로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힘껏 찾은 행복이 슬픔의 골짜기이거나 불행의 낭떠러지일 경우가 더 많다.

그럼 행복이 무엇인가? 영국의 사회학자 Robert 마키비 교수는 [현대의 생활철학]이란 저서에서 행복이란 인간이 자아 실현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일 때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공명, 그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좀 까다로운 말이지만 이것을 좀 쉽게 말한다면 우리가 인생을 걸고 찾으려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일 때 우리의 삶에서 생기는 조화감, 그것이 행복이란 뜻이다. 자기의 생명 실현, 그리고 거기서 오는 생명의 조화감, 또는 일치감에서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다.

미국의 한 부인은 재산을 백만 달라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주위에 있는 부호들과 자기를 비교하고 자기의 가난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부인은 큰 재산이 있으면서도 자기 생명 내부에서 오는 조화감을 찾지 못하여 늘 불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남의 집에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삶의 환희를 맛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점에서 행복은,


첫째로,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이다. 소유의 넉넉함이나 외적인 지위, 학력, 외모, 권력, 명예, 소유에 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인간관계, 서로를 아껴주는 사랑의 마음가짐,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삶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고 했다. 사실 살찐 고기를 먹으면서도 불화하면 채소를 먹으며 화목한 삶보다 더욱 불행한 것이다.
그래서 잠언 저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했다. 진정한 행복은 외적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의 기쁨과 평안에서 오는 것이다. 내면적인 풍요를 가꿀 줄 아는 삶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인 기쁨과 평화, 그리고 부요함은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서 오는 것이다.


둘째로, 행복은 과정이 중요하다.

저는 영화관에 갈 때 중간에서부터 보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한 처음부터 본다. 그것은 라스트 신(마지막 장면)을 봐 버리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라스트 신을 모르고 끌려가는 서스펜스와 스릴 때문에 흥미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맛도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질구질하게나마 살아가는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일류 디자이너가 이런 말을 했다. '양복을 다 만들어버리면 이미 흥미는 없죠. 애써서 말라서 가봉을 할 때까지가 제일 재미있죠.' 한 작곡가도 이렇게 말했다. '어떤 영감을 받아 오선지에 곡을 옮겨 놓을 때까지가 제일 멋있지 일단 다 옮겨 놓았을 때는 무엇인가 허전함과 불만을 느낀답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 성취되어야만 행복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절대 오해이다. 행복이란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이다. 일단 성취가 되면 이미 행복은 더 멀리 도망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폴레옹이 어렸을 때, 어느 날 아침 동산 위에 걸려있는 무지개를 보았다. 나폴레옹은 어린 마음에 그 무지개를 붙잡아 볼 생각을 하고 망아지에 뛰어 올라 곧 집을 나섰다. 동산에 올랐다. 그러나 무지개는 건너편 언덕에 있었다. 다시 언덕을 올랐지만 무지개는 또 다른 산으로 도망쳤다. 그 산까지 따라갔을 때 그 무지개는 바다 위에 걸려 있었다.
결국 저녁이 되어 나폴레옹은 빈손과 슬픈 마음으로 피곤해진 채로 돌아왔다. 이 에피소드는 나폴레옹의 전 생애를 상징하는 것이다. 저 산너머 행복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행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파랑새는 이미 내 곁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운동경기를 관람하면서 즐기는데 시작할 때는 누가 이길지 잘 모른다. 경기가 계속되면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게임이 진행된다. 그러한 지고 이기고 하는 미지수의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스릴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이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나서 죽는 날까지 행복의 기회는 열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의 그림이 국전에 입선했을 때만 화가는 행복감을 누리는가? 물론 입선도 좋지만 그림을 제작하는 그 과정을 오히려 즐기는 것이 화가의 행복이다.
음악가가 스테이지에 서서 수많은 박수와 갈채를 받는 순간이 물론 행복하지만 그 연주를 위하여 피땀 흘려 훈련을 쌓는 연습과정, 그 자체에서 행복감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등산가가 무슨 재미로 산에 도전하는가? 물론 산의 정점을 정복했을 때의 쾌감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산의 매력에 끌려서 벅찬 가슴으로 시내를 건너고 위험한 벼랑과 힘든 코스를 오르는 그 모든 과정 속에 등산을 즐기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British Columbia에서 등산하던 몇 사람의 등산가들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그러한 생명의 모험을 건 등산을 왜 하는가? 그러한 모험을 건 등산을 통해 자기를 단련하고 스릴과 함께 행복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다가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 결국 오늘 내가 걸어가는 한 순간순간을 보람있게 사는 사람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며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했다.

나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 때 일생을 행복하게 그리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기쁘고 즐겁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일생을 기쁘고 즐겁게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주어진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고 행복하게 살 때 일생을 행복하게 살게 된다. 전에 이성봉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자주 그런 말을 하셨다. '천국본점에 들어가려면 이 땅에서 천국 지점생활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제 경험으로도 제일 피곤을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어물어물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때이다. 힘든 일이라도 열심히 하면 별로 피곤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다.

이런 뜻에서 무슨 일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레크레이션(휴양, 오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나는 인생 전체를 레크레이션으로 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일도 잘 되고 생활도 즐겁고 보람도 느낄 것이다. 즉, 모든 행복의 조건을 구비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행복은 기성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미완성의 맞춤복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성품의 행복을 찾기에 언제나 허탕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도의 신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레이시아나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먼저 남자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여자를 창조할 때 연못 속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연꽃을 변하여 한 소녀가 되게 했다. 그레이시아나 신은 이 소녀를 위하여 주택을 마련해 주기로 작정하고 먼저 장소를 소개했다.

처음에 소개한 곳은 아늑한 굴속이었다. 소녀는 굴속을 들여다보더니 바들바들 떨면서 신에게 말했다. '신이시여! 저렇게 캄캄한 흑암 속에서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레이시아나 신은 밝은 광야를 소개했다. 그러나 소녀는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신이시여! 저렇게 모진 광풍이 휘몰아치는 광야에서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그레이시아나 신은 다시 아주 고요한 연못 속을 소개했다. 그러나 소녀는 물뱀이나 오물들이 득실거리는 연못 속에서는 살 수 없다고 거절했다.

마침 그 때 눈부신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처음 남자인 시인 와르미키가 벤조를 켜며 숲에서 나왔다. 와르미키를 보자 그레시아나 신은 기쁜 낯으로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소녀여, 네가 살만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여기 있다. 저 시인의 가슴 속에 들어가 살면 어떠냐?' 소녀는 와르미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시인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더니 '으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 왔다.

'신이시여, 왜 그런 무자비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 남자의 가슴 속에는 연못 속의 음침함이나 굴속의 흑암이나 광야의 폭풍이 몽땅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때 그레이시아나 신은 엄격한 어조로 그러나 친절하게 소녀에게 타일렀다. '그런 마음의 태도로는 네가 이 세상에 살 땅은 없다. 저 남자의 가슴 속에 들어가 살아라. 그리고 만일 거기에 음침한 연못이 있거든 너는 그곳을 명랑하게 하는 진주가 되어라. 만일 그 속에 살풍경한 광야가 있거든 너는 거기에 향기를 떨치는 한 송이 백합화가 되어라. 그리고 만일 그 남자의 가슴 속에 캄캄한 굴이 있거든 너는 그 흑암을 쫓아버리는 태양이 되어라.'

소녀는 비로소 사는 비결을 배웠다. 그리고 그 시인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다.이 이야기는 적극적인 생활, 창조적인 삶을 가르쳐 준다. 사실 소극적인 태도로는 이 세상에 내가 설 땅은 없다. 내 앞에 꽃밭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꽃밭은 내가 가꾸고 내가 만들어야 한다.
행복은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내가 창조해야 할 소득이다. 성경에 보면 천국은 빼앗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행복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가정이 연못처럼 음산한가? 나의 직장이 광야처럼 살벌한가? 나의 가슴이 굴처럼 암담한가?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환경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태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적극적인 삶이요 창조적인 생활이며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다.
인간은 뭐니 해도 시간에 얽매어 사는 제한된 피조물이다. 여기 있는 우리 중에 자기 스스로 이 세상을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부모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100살까지 살리라 아무리 다짐해도 하나님이 오늘 밤이라도 오라 하면 두 손들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 그의 말씀과 그의 뜻대로 살 때만이 참 평안과 참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읽은 성경말씀의 골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는 인간의 행복이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말씀하신 것처럼 마시고 또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런 일시적 행복인 것이다. 여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한 주님의 생수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하신 주님의 평안이 요청되는 것이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신 주님의 안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수를, 이 평안을, 이 안식을 향유할 수 있는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생수가 되시고 평안과 안식의 근원이 되시며 행복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 속에 모셔들이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있다. 그의 삶과 교훈에 동참하는데 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사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생활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제한성을 넘어서서 영원 속에 살아가게 한다. 즉 믿음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살게 한다. 우리는 비록 시간 속에 살았지만 믿음으로 영원을 살아간 수많은 히브리 영웅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야곱이 그러했으며 다윗이 그러했다. 또 바울이 그러했고 어거스틴, 루터, 칼빈도 그러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렇게 자기의 행복한 삶을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내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기까지는 참 평안을 몰랐노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간증했다.

그러기에 찬송가 495장 작사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행복을 노래하기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노래하자 내 지은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내 마음 속에, 내 인격 속에, 내 생활 속에 이뤄지는 하늘나라를 노래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했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 오히려 소유에서 해방되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단순한 삶(simplicity)에 있는 것이다. 소유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너무 좋은 옷을 입으면 내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오히려 나를 입게 된다. 나는 옷의 노예가 되는 부자유를 경험할 때가 많다.

참 행복은 긁어모으고 빼앗아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과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나의 삶과 나의 것을 이웃과 나누어 갖는 삶에서 찾아온다. 이러한 나눔의 삶과 섬김의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도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로 발견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삶의 분명한 비전과 목적을 깨달으며, 그것을 하나하나 실현해 가는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삶의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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