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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맙시다 / 마 1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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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맙시다(마태복음 18:5-10)


초등학교 때 교회를 다니던 한 학생이 교회학교에서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나중에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싸움의 상대는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 학생만 때렸습니다. 그 일이 어린아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어서 그때부터 그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60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교회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6절에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혹은 나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이나 행동을 했는데 다른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서 나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나 때문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나는 누구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겠다’는 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잘못한 행동 하나로 누군가가 실족했다고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 농짝만한 바위를 목에 달고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지를 말해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누구 때문에 교회에 안 나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전도를 해 보면 교회왔다가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서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를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우리 부모님 때문에 교회 안 나겠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남을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다시 한번 인식하고 남을 실족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무개 때문에 예수 믿어야 되겠다’고 다른 사람을 예수믿게 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누가 소자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소자는 누구입니까?

첫 번째로 소자(小子)는 문자 그대로 <작은 자>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보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에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했는데, 마태와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라고 했지만 누가복음 9장에는 <이런>이 아니고, <이 아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this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소자>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입니다. 연령적으로 어린아이이고, 신체적으로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실족케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오늘 본문에 <이런 소자>고 했는데 <이런 소자>는 어떤 소자입니까?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것처럼 이런 소자, 이런 아이는 부모를 절대 신뢰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아이와 같은 사람이 <소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섬기고, 하나님만 절대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만 믿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고 하면 나이가 80, 90이 되어도 <이런 아이>입니다. 하나님만 절대 신뢰하는 자를 오늘 본문에는 <소자>, <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본문 6절에 <소자>라고 나와있는데 이 말은 작은 키나 연령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세력이 없고, 지위가 낮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힘이 없는 약자(弱者)를 말합니다.
네 번째는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라고 했기 때문에 신앙적인 면에서 어린아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자>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연령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두 번째로는 연령과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 없이 못 삽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하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사람이 어린아이입니다. 세 번째로는 사회적으로 약자가 어린아이입니다. 네 번째로는 신앙적으로 초신자요, 믿음이 약한 자가 소자요, 어린아이입니다.


2. 연령적인 소자를 실족시키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소자를 영접하고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 네 종류의 소자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인권이 신장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면서 아이들의 가치가 인정되고, 아이들의 인격이 보호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같은 사회에서는 내 아이라고 마음대로 못 때립니다. 내 아이라고 마음대로 때리면 이웃집에서 신고를 해서 경찰이 아이를 데리고 갑니다. 부모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또 어린아이들을 혼자 두거나 아이들만 두고 부모가 외출을 했을 때 이웃에서 아이들만 있는 것을 알게되면, 아이들만 두고 어른들이 외출을 했다고 신고를 합니다. 그러면 당장 경찰이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면 경찰서에 와서 벌금을 내고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아이들이 타고 다니는 통학버스는 최우선입니다. 위험한 처지에 빠져도 어린이들을 제일 먼저 구출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의 인권이 신장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사회의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전쟁에서는 소모품입니다. 향락의 도구로 쓰이게 됩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대로 우리교회에서 신체적으로 어린 아이들, 교회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도록 교육에 힘을 쓰고,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위해 투자하여, 소자를 귀하게 여기고 영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서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데 늘 기도하고, 협조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사회적인 소자를 실족시키지 맙시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소자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회적인 소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신분적으로 낮은 자들입니다. 신체적으로 질병에 시달리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소자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고아와 과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있는 가정보다 아버지가 없이도 자녀를 잘 키워내는 가정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나면 여자 혼자서 자식을 제대로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부모가 다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들은 생존할 수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가장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에 <고아와 과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런 자에게 쏠려져 있습니다.

시편 68편 5절에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보호자시고 고독한 자에게 가족을 주시고 갇힌 자를 이끌어 내어서 형통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죠지 뮬러는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아!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다, 고아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부모없는 고아들을 잘 키우면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겠구나’하고 죠지 뮬러는 고아들을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수 천명의 고아들을 키워내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한번도 그 수 천명의 아이들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5만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소자들을 잘 돌보라고 거듭거듭 말씀 하십니다. 소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겉옷을 전당잡히면 저녁이 되기 전에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겉옷은 옷뿐만이 아니라 밤이면 덮고 자는 이불이기도 했습니다. 이불없이 떨고 자면 얼마나 원망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녁이 되기 전에 돌려 주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돈을 빌리면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자받지 말고 꾸어주라고 했습니다. 안식년이 되고, 희년이 되면 종들을 다 해방하고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떨어진 이삭을 줍지말라고 했습니다. 일부러 조금 흘려놓아서 자존심 상하지 않게 그들이 주워가도록 했습니다.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좀 남겨두어서 가난한 사람이나 나그네가 지나가면서 먹을 수 있게하고 심지어는 동물들까지도 먹어서 생존케 했습니다. 과수원에서 열매를 딸 때에도 다 따지말고 우리나라의 까치밥처럼 좀 남겨두어서 사람이나 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인 소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얼마나 신경을 쓰시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율법으로 이런 법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12지파 중 11지파는 자기의 일들을 하는 반면에 레위지파는 생업에 매이지 않고, 다른 일 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종사했습니다. 11지파가 십일조를 떼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그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생활비에 썼습니다.

매년 그렇게 할 뿐 아니라 3년 마다 한 번씩은 십일조를 떼고 남은 것의 십일조를 다시 떼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구제헌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달에 월급을 받는다고 하면 30일이니까 그 십분의 일이 3일 아닙니까? 3일 분의 수입은 십일조로 떼고, 30일 분의 하루 분은 구제헌금으로 쓰라고 율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마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정신을 따라서 우리교회에서는 봉사헌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봉사헌금은 그냥 천원, 이천원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율법에 따라서 내 수입의 삼십분의 일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배경이고, 신약에 와서는 더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단계에까지 나가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구약적인 배경으로 수입의 삼십 분의 일, 제 삼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까지 많은 사랑의 손길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소자들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봉사의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이 남의 밭에서 농산물을 가지고 가지는 못하지마는 그 안에서 먹는 것은 허용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이삭을 잘라먹은 일이 있었는데, 먹는 것은 괜찮지만 안식일에 이삭을 손으로 비빈 것이 타작이라고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 지 남의 밭에 들어가서 따먹고 갈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소자들을 배려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도와달라고 호소할 때에 가난한 자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너희가 어려워서 내게 기도할 때에 내가 듣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회적인 소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도 구제하는 것과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였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이런 일에 힘쓰고 있지만 더 힘써야 되겠습니다. 교회 내의 소자들을 돌아보고 바깥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기도하고 추진하고 있는 양산의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언제나 사회적인 소자를 돌보는 일을 같이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보육시설, 양로시설, 육아시설, 모자시설이 다 기독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나 타종교단체에서도 그런 일을 많이하고 있습니다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사회를 돌본 것은 기독교가 처음으로 한 운동이었습니다.

교회는 소자를 영접하고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소자를 돌아보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이 일에 다 동참하고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 사역을 감당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신앙적인 소자를 실족시키지 맙시다.

다음으로 신앙적인 소자가 있습니다. 나이가 50,60이 되어도, 사회적인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경제적으로 아무리 부유하고 넉넉해도, 교회에 처음나오신 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요, 소자들입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40년, 50년 다녀도 아직까지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 말씀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 역시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이야기를 육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으로 이렇게 어린 사람들은 말 그대로 아이입니다. 어른이지만 아이입니다. 그래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관심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실족하기 쉽습니다. 상처받기 쉽습니다. 병들기 쉽습니다.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수용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에 어린아이와 같은 새가족이 오면 그들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영접이라는 말이 뭡니까?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접(接)이라는 한자(漢字)를 보면 손 수(手) 변에, 설 립(立)자 밑에, 계집 녀(女) 자 입니다. 여자가 서서 손을 내밀고 맞이하는 형상입니다. 이것이 영접(迎接)입니다. 어린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엄마-’하고 돌아 올 때에 엄마가 서서 팔을 벌리고 아를 맞아들이는 모습이 바로 영접(迎接)입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아기를 받으려고 서 있는 산파의 모습이 영접할 때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어린아이와 같은 새가족이 오면 그런 자세를 가지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받아들이고, 구역도 받아들이고, 전도회도 받아들이고, 모든 성도가 갓 태어난 어린 신자를 기쁨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바로 이것이 영접입니다. 교회가 새신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받아들이는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새가족들이 교회에 와서 실족하고 교회를 나가는지 모릅니다. 다음 주일에는 어떻게 실족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린 새가족이 교회에 오면 마치 한 가정에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기뻐하고, 관심가지고, 환영하고, 집 나간 자녀가 돌아올 때 부모가 환영하고, 얼싸안고, 소리지르며, 기쁨으로 맞이하는 태도가 영접입니다. 가정에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기뻐합니까?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런데 새가족이 왔을 때 교회나, 구역이나, 전도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영접하지 않는 것은, 오든지 가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는 그들을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영혼이 떨어진다면 <너는 목에다가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고 예수님께서 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에 새가족이 처음 와서 환영의 박수를 할 때 정말 기뻐하며, 환영하며 박수하고, 새가족 스티커를 달고계신 분을 보면 잘 오셨다고, 반갑다고 하며 한가족으로 맞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새가족 뿐만 아니라 오래 다닌 교인들 중에도 어린아이 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 보세요. 어린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잘 싸웁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와서 자꾸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중심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생각 안해요. 마찬가지로 교회에 와서 전부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어린아이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잘 못 알아듣고, 남의 이야기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 어린아이는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교회에 와서 좋지 못한 행동도 자주 합니다. 어린아이는 실수를 잘 합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자꾸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잘 넘어집니다. 넘어졌다가 섰다가, 나오다가 안 나오다가 하는 사람도 어린아입니다. 어린아이는 옷을 잘 더럽힙니다. 성도의 깨끗한 옷을 사회에 지탄받을 일로 더럽히는 일을 많이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하고픈 대로 다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인 교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까지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잔치의 비유를 보면, 똑똑한 사람, 괜찮은 사람들은 다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을 보면 전부 신체적으로 불구인 사람, 못난 사람, 헐벗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로라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다 교회 밖에 있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못 났습니다.’하는 허물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있는데 누가 누구를 탓한다는 말입니까?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어린아이의 과정을 거칩니다. 바로 어른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어린아이의 과정을 다 거칩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성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의 실수를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도 그런 과정을 다 거쳐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접입니다.

어린아이의 과정을 수용하지 아니하면 어린아이는 절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어른의 수준으로 어린아이를 본다면 잘못하는 것 용서할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어린아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수용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어린아이인 새가족이 들어올 때에 어린 새생명을 다루는 기쁨으로 맞이하고, 교회에 있는 영적인 어린아이를 볼 때에는 이들을 잘 수용하고, 기도해 주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늘 힘쓰는 성도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5. 왜 소자를 영접해야 합니까?

왜 소자를 잘 영접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요, 또 ‘하나님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소자요,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소자요, 신앙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과 오래 다녔으나 아직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영접하여 돌보고 관심가지는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들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소자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소자를 하나로 같이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에서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류를 심판하실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구별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오른 편에 있는 양과 같은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에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악인들도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이런 사람들이 나와 같다고, 그들이 곧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주님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대접할 수 있는 예수님이 많이 있습니다. 영접할 수 있는 예수님이 많이 있습니다. 2부 예배를 마치고 나가니까 어느 장로님이 이런 쪽지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잘 36절에서 46절, 조금 전에 읽어드린 그 말씀인데 연산경찰서에 가니까 어떤 여자분이 이 말씀을 쪽지에 써서 목사님께 갔다드리라고 하더랍니다.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하는 구절입니다. 그 말씀을 오늘 미리 준비를 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일 새벽마다 부산에 있는 모든 경찰서를 다 책임지고 찾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시간이 나면 가서 돌아보세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런 자들이 말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대접할 수 있는, 돌아볼 수 있는 주님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좀 바꿔서 보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어린아이가 들어오면 단순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셨구나 하고 친절하게 맞고, 안아주고, 기도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영접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잘 영접하여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나 사회에서 주리고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가 있으면, 우리교회에 그런 자가 들어오면 아, 예수님이 들어오시는구나하고 소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그들을 대접해 보세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영광과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새가족이 오면, 신앙적으로 어린 신자가 오면, 예수님께서 오시는구나, 예수님께서 저 새가족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대하듯이 그들을 대해 보세요. 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놀라운 사랑을 이곳에서 느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축복과 기쁨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를 예수님처럼, 소자를 예수님처럼, 사회적인 소자를 예수님처럼, 새가족을 예수님처럼 영접하는 우리교회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가족관계 아닙니까? 그런 공동체, 그런 교회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6. 소자들이여 어깨를 폅시다.

그런데 이런 소자를 실족케하면 예수님을 실족케 하는 죄가 되고,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주님께서는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소자를 영접치 아니하고,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소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기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소자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십니다.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소자, 교회 처음 나오는 소자들을 예수님 자신처럼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찬송가 411장에 보면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세상은 내가 연약해지면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소자가 되면 밟고 지나갑니다. 무시합니다.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피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연약할 수록 더욱 더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소자일지라도 낙심하지마세요. 기죽지 마세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자인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소자되지 않도록, 사회적인 소자인 우리를, 낮은 자를 높이시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많은 하나님께서 이 장소까지 불러주셨습니다.

사람 때문에 기죽지 말고,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사람들이 무시한다고해서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대통령이 나를 인정하는데 청와대에 들어가는 경비가 나를 무시한다고 그게 기분나빠서 청와대에 안들어가겠다고 하겠습니까? 대통령이 나를 초청했는데 좀 무시하는 것,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소자인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불친절하다고 그것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 안 나온다,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하고 신앙팔아먹고 이런 일들은 이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감사하고 소자는 오래 소자되지 마세요. 이제 청년이 되세요. 청년인 사람은 신앙적으로 아비가 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실족한 사람은 없습니까? 나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 나 때문에 신앙을 팔아먹은 사람은 없습니까? 소자를 영접하고 좋은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믿는 자가 더 많아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자를 영접하라, 연령적인 소자, 신앙적인 소자, 사회적인 소자를 영접하여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그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아서 신앙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영광과 기쁨과 축복에 동참할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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