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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따르려면 / 마 1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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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주님을 따르려면
본 문 마 16:21~25
설교자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예수를 믿는다고 다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신자들 가운데 제자는 그 중에서 구별된 일부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자와 제자는 모두 다 예수를 믿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느냐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신자와 제자를 ‘따른다’는 관점에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신자는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아이를 키워본 분들은 너무도 뼈저리게 겪어보신 일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갖가지 사고를 칩니다. 방안을 어지럽히고, 벽지를 뜯고, 그릇을 깨고, 물을 엎지르고... 그래서 엄마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늘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 살면서 믿음으로 홀로 서기를 아직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뒤 따라다니시며 보살펴주시고, 갈 길을 열어주시고, 갖가지 문제를 처리해 주십니다.

  이에 비해서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장성하면 엄마 아빠 뜻을 잘 알아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잘 합니다. 때로는 시키지 않는 일까지도 너무 잘해서 부모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부모의 뒤를 따라 갈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제자가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들을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이 자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뒤를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마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 4:19를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보면 저들이 순종하여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22절을 보면 저들이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한 마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른 사람들 그들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저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를 때 그냥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소중한 것들을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나름대로 가장 귀한 것들, 자기들에게 없어서는 곤란한 것들을 버렸습니다. 마 19:27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한 마디로 저들이 주를 위해 다 버리고 주의 뒤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를 위해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것들이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따르기 전에 그것 없이는 못살 것 같던 것들이 주님을 따르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때론 가족도 버렸습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데 불필요한 것들, 거추장스러운 것들 너무 많이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봄철에 가지치기를 하듯이 잘라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신앙생활에 불필요한 것들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미 나름대로 다 버리고 주님을 좇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또 다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서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는 16:13-23에 기록된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정말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18-9절에 보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이고, 베드로를 청기지 삼아 그 교회를 맡기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뜻 밖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을 보시고 비로소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주님의 계획을 가로막고 나선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러서라고 야단을 치신 것입니다.

  주님의 명을 받고 주님의 뒤를 따르던 베드로는 남달리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는 수준까지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사단이라고 책망을 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나름대로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어느새 주님의 일을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만 바라보고 주의 일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를 따른다고 나섰지만 자기도 모른 사이에 한 눈을 팔고 있습니다. 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생각지 못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께 나를 따라오라고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나를 따르라고 야단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쓰신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목회 하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을 이 책에 적어놓았는데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분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 수가 184명이었답니다. 그 때 정말 온 교우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최선을 다해서 전도하고 목회했답니다. 그 결과 2년 만에 교인이 600여명이 되었답니다. 교회 내의 모든 기관들도 성장했고, 교회의 모든 시스템도 남부러워할 정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이 분을 깨뜨리기 시작하셨답니다. 그가 마음속에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답니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가는 것이다”



  오르티즈 목사님은 처음에 주님의 제자로서 주만 바라보고 최선을 대해서 목회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덧 그 성장의 열매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만 바라보던 그 시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계속해서 주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자족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주를 따르며 이루어 놓은 것에 도취하면 안 됩니다. 마치 자전거 타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는 속도를 줄이면 비틀거리다가 쓰러집니다. 뒤돌아보며 페달을 밟으면 사고가 납니다. 계속 앞을 보고 달려야 합니다.

  바울은 이점을 너무도 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빌 3:12-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렇습니다.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며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그러면 중단 없이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24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간단히 말하면 너 자신마저 버리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나름대로 결단하고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더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니까 언제든지 버렸던 것을 다시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자아가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제자로 살아가고자 할 때 가장 큰 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 자신마저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할까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과거의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부인을 갈 2:20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과거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고 믿음으로 변화된 전혀 새로운 나라는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분입니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악독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전도를 해야 할 텐데 아무도 그를 만나주질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피하고 그의 말에 겁부터 먹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묘안을 냈습니다. 자기 부고장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김익두가 죽었습니다!"라는 그 부고장을 받아들고 마을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얼마 후, 죽었다는 김익두가 마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표지가 까만색의 성경책 한 권을 옆에 끼고 나타난 김익두가 예수 믿고 변하여 새사람이 됐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화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마을 사람 하나가 김익두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잘 다니는 골목에 숨어서 김익두가 그 길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머리에 구정물통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 때 김익두 청년의 말이 지금도 유명합니다. "아저씨, 과거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당신은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 태어난 김익두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이렇게 옛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이게 살아있으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힙니다. 내 신앙생활에 가장 큰 짐이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삶 속에서 나를 부정하고 대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 몇 가지로 세분화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진정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내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내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생사화복이 내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인정하며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께 다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주님을 따르며 살고자 한다면 나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심방 중에 어떤 여 집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목사님 솔직히 제게 시어머니는 십자가예요!” 사사건건 잔소리하고 들볶아대는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말이죠. 또 어떤 분은 “저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찬 바람만 불면 그 다리가 가렵고 아프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식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끝없이 속 썩이고 힘들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생을 사는 동안 겪게 되는 힘겨운 일들 그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그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들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것이요, 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것들이요 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십자가는 본래 형틀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지고 갔습니다. 저마다 자기 죄 때문에 그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우리 죄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는 주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각자에게 맡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사명이 바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을 십자가라 하는 이유는 그것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초대 교회를 청지기로 맡았습니다. 그 엄청난 박해와 난관을 뚫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고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담당하는 동안 저가 당한 고초는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라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우선 보편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처한 곳에서 빛이요 소금으로 살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특수한 사명이 있습니다. 제게는 이 교회를 목회하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들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을 제대로 잘 감당하려면 고난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골 1: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행 20:24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십자가를 지는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주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를 따르게 하옵소서.
            나 자신을 부인하게 하옵소서.
            내 십자가를 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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