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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를 얻은 자 / 잠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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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13-18
지혜를 얻은 자
평화교회 임대식 목사


우리 성도님들, 설날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설날이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가 덕담을 나눕니다만, 우리 성도님들 이 한 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2월 한 달은 구약의 잠언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신앙과 생활의 지혜를 배우겠습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온전한 학문을 배우려고 하면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는 율법이요, 둘째는 예언이며, 셋째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율법이 있고 예언서가 있으며 또 지혜 문학이 있습니다. 구약의 책들 가운데 특별히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는 이 지혜 문학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그 중에 2월 한 달은 잠언서의 주제를 네 가지를 택해 말씀 가운데 은혜를 받겠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애꾸눈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사진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 장군은 죽기 전에 자기 초상화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난 화가들을 불러 초상화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장군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화가는 애꾸눈을 그대로 그렸고, 어떤 화가는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 양쪽 모두 성한 눈으로 그렸습니다. 장군은 애꾸눈 초상화도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성한 눈을 그린 것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더욱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한 이름 없는 화가가 나타났습니다. 장군은 초상화를 부탁했는데, 이번에는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이 화가가 장군의 어떤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화가는 장군의 옆모습을 그렸던 것입니다. 성한 눈이 있는 옆모습을 초상화에 그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한 눈만 보이고 감은 눈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대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감추고 싶은 부분은 다 감출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화가는 매우 지혜로운 화가로 소문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렇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온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필요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이 지혜를 참으로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봉독한 말씀 13절 이하를 읽으면 “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하였습니다.

사실 지혜는 은이나 금이나 진주로 표현된 돈보다 더 귀합니다. 미련한 부자는 오히려 돈으로 말미암아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혜는 높은 지위보다 더 귀합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도 지혜가 모자라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지식보다도 귀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우리는 많이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모르므로 손해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보다 더 귀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란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기에 힘써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과학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과학의 진보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세상의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생활이 편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과학이 덜 발달해서가 아니라, 이 과학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 복제의 문제, 환경의 문제, 원자력의 문제 등등 참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에 현대인이 봉착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혜를 말할 때 이 세상에 속한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처세술에 능한 사람, 요령껏 살아가는 사람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지혜는 이런 지혜가 아닙니다. 세상 지혜를 가지고 장난하다가는 오히려 세상에 피해를 주고 감옥 속에 들어가 앉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 이런 재미있는 고사,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나라의 환공이 고죽을 토벌하였을 때, 출발할 때는 봄이었고 돌아올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주위 환경이 완전히 변하여 길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지혜 있는 관중과 습붕이 함께 있었습니다. 관중이 하는 말이 “이럴 때는 늙은 말에게 배워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험 삼아 늙은 말을 풀어주고 그 뒤를 모두 따랐더니, 마침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산길에 들어서니 먹을 물이 없어서 모두 기갈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습붕이 말하기를 “개미란 놈은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 서식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개미집 아래 여덟 자를 파면 거기에는 반드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사오니 한번 산기슭 남쪽으로 돌아 개미집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하였습니다.

그래도 하였더니 먹을 물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비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서 말하기를 “관중이나 습붕같이 지혜 있는 자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말이나 개미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은 어리석으면서도 성인의 지혜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성인의 지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하늘로서 내리는 지혜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는 더 큰 지혜를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지혜를 우리에게 더 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혜를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주시는 지혜를 찾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데,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 이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지도자 밑에서 바르게 훈련을 받아 바르고 지혜롭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지도받을 필요가 있는데, 우리 인생을 바르게 인도하고 지도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배우고 익힘으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잠언서의 요절은 9장 10절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란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우리 자녀가 학교 공부도 우등생으로 높은 점수를 받습니까?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이니, 그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물질이 필요합니다. 건강도 꼭 있어야 합니다. 힘과 권력이 있으면 큰소리치면서 행세할 수 있습니다. 다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만, 이런 부나 권력이나 지식 등등을 바르게 사용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 지혜의 근본이란 말씀은 잠언서에 계속 되풀이 되어 나오는 말씀인데, 여기 이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왜 지혜의 근본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혜가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혜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고 계신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고 계신가, 우리가 이런 것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경외하지도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그 다음 이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 “그런즉 너희는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며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런고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이지 이해하도록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지혜가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나타났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지혜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으니 곧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혜를 얻는 길이요, 참 기쁨과 참 행복을 누리는 일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자기 생명을 멸망할 자리에서 구원받는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분별해야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보다 더 고귀한 일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골로새서 2장 3절에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지혜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들은 내일을 말합니다. 내년을 생각하고 훗날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영원에 대해서 말하면 뭔가 낯설어 합니다. 이번 설날에도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았습니다.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고향을 찾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라면 뭔가 의아해 합니다. 영원까지 이르는 지혜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요, 영원까지 이르는 구원의 지혜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그러므로 이제 복된 설날을 맞이하여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생명의 의미를 내 것으로 소유하며, 더욱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참으로 구원받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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