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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일생(2) : 소명 /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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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 제 목 > 베드로의 일생 ② : 소명
< 본 문 > 눅5:1~11


오늘은 베드로의 일생 두 번째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 요한복음 1장에서 본 대로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본래 시몬이던 그에게 게바 곧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 베드로는 별다른 변화 없이 갈릴리 호수(게네사렛 호수/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한편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쓰다 허탕을 치고 그물을 씻고 막 퇴근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만남은 지난번과 사뭇 달랐습니다. 지난 번 만남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아직 정확하게, 깊이 있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know about Jesus vs. know Jesus)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체험하면서 점점 깊이 알게 됩니다. 여러분, 이 두 만남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만남은 머리로 예수님을 아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머리로 아는 지식=head knowledge) 반면 이번 만남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수준이 된 겁니다.(마음으로 체험한 지식 = heart knowledge) 이게 진짜 신앙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의 이런 체험적 만남이 진정한 신앙이고, 이런 신앙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이 변화됩니다. 마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 같은 겁니다. 이때 우리 인생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만남을 계속 가져야 됩니다.

베드로는 그의 일생 가운데 이런 결정적인 만남의 순간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 인생이 더욱 새로워지고 아름답게 다듬어져 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처음에는 혹시 건성으로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적인 만남, 결정적인 만남이 새롭게 이뤄지면서 우리 인생도 아름답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소명(calling)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깊이 만나주시고 그를 하나늠이 자녀로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다시 한번 새롭게 예수님을 만나시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소명을 깨닫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과의 체험적인 만남

예수님은 베드로와 마주치자 대뜸 배를 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무리들이 하도 많이 몰려들어서 말씀을 전하려면 거리가 필요해서 배에 올라 간격을 띄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밤을 새운 데다가 허탕을 쳤으니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3절 보니까, 순순히 배를 빌려드립니다. 한참 만에 말씀이 끝나고 이제는 집에 갈 수 있겠구나 나보다 생각하는 순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4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상식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황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밤새 허탕을 친 데다가 낮이 되면 고기가 얕은 데로 모여듭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잔뼈가 굶은 베테랑 어부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외적으로 보면 누구입니까? 아버지를 도와 목공일을 하던 목수 출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당연히 그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순종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순종합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어쩌면 이미 만났던 분이고, 최소한 보통 사람보다는 훌륭한 분이라는 것쯤은 알았기 때문에 체면 상 마지못해 순종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6절~7절 보십시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굉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단순히 훌륭한 선생이 아니라 안드레가 전해준 말처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른 칭호의 변화를 관찰해 보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의 “선생이여!”에서 8절 “주여!”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은 말씀대로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 이해가 안되고, 조심스러울지라도 한번 순종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이 생기고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 - 억지로 순종했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가까이 뵈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그의 가족이 다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인물들이 됩니다.

그런 말이 있죠.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먹을 게 생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보면 얼마나 좋은 일들이 생기겠습니까?

예> 음식 먹을 때 - 처음 본 음식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어떤 사람은 젓가락으로 이리 저리 뒤적거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먹어보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과감하게 먹어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먹으라고 내놓은 음식인데 어디 손해 보겠습니까? 누가 수지 맞습니까? 뻔한 이치입니다.

예> 성경 한번 읽어보세요. 진리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벤허」(부제 : A Tale of the Christ)를 쓴 L. Wallace라는 작가가 있죠. 그는 본래 기독교의 허구성을 밝혀내겠다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뒤집어진 겁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맞습니다. 소극적으로라도 억지로라도 순종하다 보면 체험하게 되고, 체험하면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해 보십시오. 목사가 전하는 말씀대로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부디 베드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베드로의 자기 발견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가 하면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자기 몸 안에 있는 것들조차 모릅니다. 특별히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실존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철학자나 현이들이 이런 저런 주장을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덮어두고 대충 살아갑니다. 남들도 그러니까 나도 그러는 식으로 삽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알아야 바른 인생,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지고 만선이 되도록 고기를 잡은 후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8절. “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기적적인 축복을 받았으면 감사 표시를 하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고기잡이 기술고문으로 모셔야 될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왜 떠나달라고 말합니까? 본심이 아니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고 보니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찌 감히 고개나 들겠습니까? 더군다나 순종을 했지만 마음 속으로 부정적인 생각도 했고 의심도 했었잖아요?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신 그분 앞에 가책이 됐던 겁니다. 그래서 고백한 겁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은 위대한 발견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이겁니다. 자기 자신도 별 수 없는 피조물이요 죄인이라는 사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롬3:23)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 그런데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찬란한 빛 앞에서는 그 실체가 다 드러나고 맙니다.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렘17:9~10 보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봐야 도토리 키 재기인데 말입니다.
예> 이사야 선지자 - 자신이 꽤 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가 질립니다.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와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데에서 신앙이 시작됩니다. 구원이 시작됩니다. 막2:17 보면 예수님은 오직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 이 말씀은 의인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고, 자신이 의인인 줄 착각하는 사람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병자임을 고백하지 않는 환자는 고침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없다 하는 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과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베드로의 소명 : 구원과 사명

예수님은 베드로가 떠나시라고 말했지만 그 본심을 아셨기에 오히려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소명(召命)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calling’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두 가지로 부르십니다. 하나는 ‘구원’으로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으로 부르심입니다.

① 구원에로의 소명(제1의 소명) :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이미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② 사명에로의 소명(제2의 소명)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구원 이후에 살아갈 새로운 인생에 관해 제시해 주셨습니다. 10절(하). “ ...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 ”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사도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지만 이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합니다. 11절(하). “ ...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는 일평생 복음은 전하는 일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마지막 순교하기까지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바쳤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사도라는 특수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사명은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받은 것입니다. 단지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오늘날도 목사나 선교사처럼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반면에 사회에서 자기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보기에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사명을 갖고 있는 겁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민인제사장)

사회에서 일반 직업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직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직업이란 말이 영어로 calling 그대로입니다. vocation도 있지만 이것 역시 라틴어 vocare(=부르다, call)에서 유래합니다. 독일어 Beruf, 불어 vocation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야에 종사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cf. 거라사 광인에게 주신 명령 → 막5:18~20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고기 잡는 바다가 다를 뿐입니다.

예> 시골 교회 성경 공부 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 - 목사님이 물고기 표시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시골 아주머니 왈 ... “그거야 낚시꾼 표시겠죠.” 명언입니다.(본래는 초대 교회에서 핍박을 피해서 성도들끼리 암호로 사용하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문장의 단어 첫 글자를 조합한 것으로 ‘익투스’ 즉 물고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 낚시꾼’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소유나 조건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의 가치는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에 쓰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행1:8에 말씀한 예수님의 지상명령대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예> 인간 악기 - 의의 도구, 복음의 도구로 하나님이 연주하시도록 순종하고 헌신할 때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12:3 “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아무쪼록 베드로가 만났던 하나님, 베드로가 만났던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구원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시고 영생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명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셔서 남은 생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히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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