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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시대 새 남성 / 잠 11:14-17, 고전 16: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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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담임목사 (연동교회)
새 시대 새 남성
( 잠 11:14-17, 고전 16:13-18 )

 
이 주일은 우리 총회가 정한 남선교회 주일입니다. 남선교회의 사업을 기억하고 남선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남선교회를 위하여 봉헌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남성들이 남선교회에 가입하여 함께 봉사하고, 교제하고,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남성이 성경적으로 제 자리를 찾아야 가정도 잘되고, 사회도 잘 됩니다. 남성들이 힘을 얻어야 하는데 요즘은 남성들이 자꾸 어깨가 처지고 힘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여성잡지 ‘엘르’가 지난 8일 세계여성의 날 앞두고 “남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남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성이 위기에 처해있다”, “더 이상 남성성을 형성하기 위한 역할 모델은 없다”. 이 잡지는 특집기사를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남성성이 쇠퇴하면서 “남성 제국이 이제 몰락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이 잡지에 따르면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은 지난 60-70년대 성적 평등개념이 대두하면서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중 스타가 뜨는가 하면, 가사를 돕는 남편이 급증하고, 동성애자가 많아지고, 람보 등 다양한 역할 모델이 난무하던 80년대의 문화 위기로 남성성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이 잡지는 40대 남성들은 현대의 환관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쩐지 좀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말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교회의 남성들에게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한 바울의 권면이 남성성이 없어지는 요즘에 와서 더욱 새롭게 들립니다. “남자답게”란 말은 남자 같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에 따르면 남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이 창조의 원리는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남녀가 동시에 종속된 것을 가르칩니다. 단지 창조의 방법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성들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여자를 지킬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착각하지 마세요.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해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려는 시도가 그릇된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은 남자가 여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부(Homemaker)라고 번역된 헬라어는(딛 2:4, 5) 두 단어로 이루어진 복합어입니다. 첫째 단어는 가정이나 집과 그 주변을 뜻하는 일반적인 말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일이나 노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집을 다스리다(딤전 5:14)는 말 역시 헬라어 복합어의 번역입니다. 앞부분은 집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이지만 뒷부분은 놀랄만한 단어입니다. 뒷부분은 바로 전제군주를 뜻합니다. 전제군주는 완전한 통치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지만 아내는 가정의 전제군주입니다. 이런 말들의 의미는 그 옛날도 남성들을 중심한 사회이고 여성들은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1세기는 여성 시대라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이전 같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새 시대의 새 남성상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남자답게 사는 것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 깨어있으십시오.

이 말씀은 종말적 예언에서 주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3:35에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주인이 오는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안다면 자다가도 일어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기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36절에는 말합니다.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종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이 와서 자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합니까?

(1)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깨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묵상해야 합니다. 토마스 머턴은 “묵상은 영적인 인간이 스스로를 항상 깨어 있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 깨어 있음이 문제입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으로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잠이 들면 시험에 듭니다. 잠이 들면 시험하는 자가 제일 좋아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따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피곤해 있었고 금방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오셔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깨어있지 못했고 결국 시험에 들었습니다. 잠결에 일어난 베드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들고 왔을 때에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습니다. 이 실수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칼로 귀를 친 것은 실수입니다. 그러나 이 전에 그가 깨어있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실수입니다. 이미 시험의 빌미를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긴장감을 상실하면 약해지고, 병들고, 죽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긴장감이 풀어지면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귀가 열려 있고, 눈이 떠져 있고, 손이 가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은 영적 긴장감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였고 잠을 잘 때였지만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부른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대답하게 하였습니다. 영적 긴장감이 살아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긴장감이 늘 있어야 합니다. 스트레스는 병이라고 합니다. 스트레스는 절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늘 긴장감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긴장은 영이 살게 합니다.


(2) 사람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가족에 대하여 남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의 형편에 대하여 늘 민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민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 깨어 있다는 것은 우선 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깨어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관심을 가집니다.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감정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정말 깊이 있게 울어줄 줄 알고, 호탕하게 웃어줄 줄 아는 이런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모두의 유익에 대한 사리에 맞는 관심을 말합니다. 존 템플튼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순수한 관심뿐이란 걸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손발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깨어 있고, 사랑에 깨어 있는 사람은 손발이 살아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선합니다. 그는 가슴이 깨어있었습니다. 눈과 발과 손과 온 몸이 깨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포도주나 나귀나 돈과 같은 재산도 때어있었습니다. 이것이 관심입니다.


(3) 세상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깨어있는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도 깨어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의 터전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우선 삶이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대표하는 말은 잠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잠자는 자에 대한 경고가 많습니다. 게으른 것이 잠자는 것이라면 부지런한 것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잠언 6:9에는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라고 합니다. 게으른 자는 눕기를 좋아합니다. 게으른 자는 깨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부지런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잠언 11:16에는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고 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재물을 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깬 사람들은 재물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냥 부자가 되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깨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관이 바뀝니다. 그냥 잘 살고, 출세하고, 돈버는 것이 아니라 생활 양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지런하게 살고 열심히 탐구하고 근면하게 일하기 때문에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대가는 미래에 받게 되지만 게으름의 대가는 지금 당장 받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깨어있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책임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하여 항상 책임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름에 대하여 항상 응답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책임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책임윤리를 강조합니다. 세상의 일이나 사고나 사건을 보면 욕하고, 즐기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건이나 사고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구지하철 참사도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책임이 있습니다. 불을 지른 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학적이 되게 한 것이 책임입니다. 이런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굳게 서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케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확고하게 견지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답게 확고한 믿음을 견지해 나가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이 말의 뜻은 스스로 섰다고 자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1)스스로 섰다고 생각한다고 높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은 높은 마음이 아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이런 마음에는 신앙적 교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는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사울왕은 처음에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했지만 점점 교만하여 스스로 선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만 서 있고 다른 사람은 다 쓰러진 줄 알았는데 자신만 쓰러지고 다른 사람은 서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넘어질 때가 언제입니까?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자만할 때입니다. 이런 자가 마귀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적 부족이 있을 때입니다. 흔히 말하는 함량미달일 때입니다. 신앙적으로 부족하니까 높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신앙적 부족은 배워야 합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배워야 확신하게 됩니다. 배우는 것은 확신하기 위한 첫 단계입니다. 신앙적 교만은 나쁜 것입니다. 신앙적 부족은 자랑이 아닙니다. 신앙적 충족을 채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굳게 하는 방법입니다.


(2)확고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확고한 믿음을 가졌으면 이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게 믿음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57:7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노래합니다.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여기에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에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마음이 확고한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 삶을 삽니까? 확고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멋있는 삶입니다. 이런 멋진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은 서원을 지키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번 결심한 것이 있으면 마음에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을 내주지 않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이익 때문에 중심의 그리스도를 팔지 않습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쉽게 이국의 종교에 야합했다면 훨씬 편리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더 좋은 지위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생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신의 신앙을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에 든든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셋째, 강건하십시오.

“강건하여라”는 말은 능력이란 뜻의 ‘크라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능력 있는 모습을 갖추라, 능력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능력 있는 남자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남자다울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어 정복하라는 뜻입니다. 남자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능력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10에서 바울은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합니다. 강건한 것은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1)영적 강건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강건입니다. 영적으로 남자답게 튼튼해야 합니다. 영적 강건이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달리 강건하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강건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선 영적으로 강건하지 위해서는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영적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운동이 필요합니다. 매일의 경건 운동이 있어야 영적으로 강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강건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령님 외에 다른 영도 있습니다. 불교는 불교의 영성이 있습니다. 무당은 무당의 영성이 있습니다. 온갖 신비종교가 나름대로 영성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외의 다른 영은 영적 쇠약을 만듭니다. 지금 이 세계는 다른 영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영적 싸움이 심각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다른 영에 빠지지 않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힘이 있습니다.


(2)지적 강건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식시대, 과학시대, 정보시대입니다. 지식적 건강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지식시대에는 지식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지식 사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식사회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베이컨이 말한 대로 아는 것이 힘입니다. 이런 지적 강건을 위하여 끊임없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지식은 자고 나면 발전하고 변합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물 같은 지식을 물갈이해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즉 지식과 신앙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신앙이고 현대를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3)육체적 강건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몸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강건과 더불어 육체적 강건도 중요합니다. 최근에는 육체적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됩니다. 점점 이 세상에는 수명도 길어지지만 질병도 많아집니다. 건강보조식품 등이 더 많이 팔립니다. 육체적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우선 우리의 육체는 영혼의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육체가 약하면 영혼도 약해집니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육체도 우선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강건을 위해서는 육체적 운동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건강문제가 심각한 과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육체의 연습은 엄청난 유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에 가시와 같은 고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얼마나 괴롭게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나마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약간이 아니고 굉장한 유익이 있습니다. 육체의 강건을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결론

20세기 미국 철학자이며 역사학자인 윌 듀란트는 ‘역사 속의 영웅들’이란 책에서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련사 말 잘 들으세요, 그래야 편해요. 아무리 남자가 여자 같아도 남자 같은 여자 보다 더 남자답고, 아무리 여자가 남자 같아도 여자 같은 남자보다 더 여자답습니다. 우리 남편들, 남성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를 살려 주셔야 합니다. 서로가 제 구실을 해야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건강한 법입니다. 오늘 성경이 일러주신 대로 우리 모든 남성들은 남자답게 늘 깨어있으세요.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늘 강건하십시오. 늘 남자답게 강건하여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강건하게 만들어 가는 우리 남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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