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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차 권면하여 / 히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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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피차 권면하여
  히브리서 3장 12절-14절


이제 봄이 성큼 다가 왔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겨울 동안 농부는 돌아오는 봄에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할 것인지, 언제 어떻게 파종을 할 것인지 연구하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농부들은 봄이 되면 날을 잡아서 씨를 뿌릴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들은 한결 같이 바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추수의 기쁨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뿌리는 이 씨들이 말라버리거나 헛된 수고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너무 심하게 오거나 폭풍이 불면 자신이 계획하고 소망했던 것을 다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비단 농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도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무작정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준비하고 연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고 결정한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이 들면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할 것 없으니 고시공부나 해 볼까 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적성과 진로를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릴 때에는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기도 하고 여기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다 못해 규모가 작은 가게를 개업하는 것도 깊이 생각하고 준비하고 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어떤 누구도 대충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열심히 준비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들이 늘 수확할 수 있는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만 두고 싶어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할 성도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아무생각 없이 개종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유대교 신앙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자자손손 대대로 유대교를 믿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개종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요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길이 내가 살길이다 라고 결심하고 사람들은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12절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표현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악심이란 말입니다. 죄 된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심을 가진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죄 된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믿지 않는 사람을 가르켜 악심을 품은 사람이요 죄 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어떤 행위만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죄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이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행위와 동기를 차별해서 보시지 않고 똑같이 보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이런 예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 여자를 만나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라고 기록합니다. 현재 진행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어디간 것입니까? 남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남자가 도망을 갔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남자를 뒷문으로 도망가도록 했는지 아무튼 현장에 없습니다. 간음이라면 상대방이 있어야 할 것인데 남자는 없이 여자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나이가 적은 순서대로 하나씩 돌을 버리고 그 자리를 피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의 죄를 지적하면 어느 한사람도 숨쉬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죄에 대해서 강하게 설교하면 사람들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잡히지 않으면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잡혀 교도소에 가 있는 사람들만 죄인이라고 취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외양을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본질을 보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잡히지 않은 죄인 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신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는 완벽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나는 털어서 먼지 날 것이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태복음23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에게 화 있을 진 저 화 있을 진 저 라고 7번씩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음성을 듣기보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하시는 용서의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겠노라 돌아가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용서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12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악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는 것을 죄라고 로마서는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불신앙이 나약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 없는 것을 보고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앙은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라 죄가 파생되는 원천입니다. 이런 악심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증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곧 죽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죽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출애굽을 하게 하시고 홍해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국 사람인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고 온 열방과 백성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은 성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회사업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에 대하여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살아 계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권면 드립니다. 고백하십시오. 이성으로는 고백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령으로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엄마라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들이 가진 이성이 아니었습니다. 직관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 우리를 보시고 계십니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한 영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찾는 사람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역사 하실 것입니다. 길이 열릴 것입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실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병든 자가 위로 받고 치유 받을 것입니다. 무너진 자들이 일어 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이어서 1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13절

저의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계실 때 우리 식구들이 가장 긴장했던 것은 등창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간호하는 사람들은 아버지 곁에서 자주 몸을 맛사지 하든지 자주 누워 있는 자세를 바꾸어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썩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혼자 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혼자 믿음 생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여리고도 가다 강도 만난 사람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그 사람이 거반 죽은 것을 버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거기를 지나가던 제사장은 이 사람을 보고 피해갔습니다. 왜 피해갔겠습니까? 아마도 제사장은 지금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가는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러 갈 때 부정한 것을 보고나 만지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만질 수가 없었고 그 시체를 돌아서 지나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러자 레위인도 그 사람을 피해갑니다. 이 사건의 현장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을 눈 여겨봐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더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인을 살려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복음 10장에서 하시려고 하는 말씀은 믿음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지체의식을 가져야 하고 믿음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은 선교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은 모여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험악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1달만 나오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있든 없든 빠지지 않고 나아오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 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보와 시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점점 고립된 삶을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숯불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숯불이 잘 타오르려면 숯이 각각 널려있으면 곤란합니다. 불이 붙지 않은 숯은 불이 붙은 숯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지체들 옆에 붙으십시오.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 옆에 붙어야 합니다.

최근에 상담사역 하는 분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가운데 특히 고시를 준비하면서 늘 고립된 삶을 사는 형제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 부족의 심각함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형제들이 고시를 접고 학습지 교사로 새 출발을 하려고 해도 어린 학생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어한다 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이런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권면을 드립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에 참여하십시오.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표현해 보셔야 합니다. 거기서 다른 지체들이 권면 해 주는 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수용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오늘 본문처럼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고 부드러워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무엇을 권면하는 것입니까?--14절

우리가 처음에 잡은 이 믿음은 확실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더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처음에 가졌던 것을 놓고 싶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매력이었습니다. 유대교는 보여주는 제사 형식이 많이 있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죄가 이렇게 사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피 냄새도 맡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무것도 보여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대교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혼돈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구원파 같은 곳에서는 비디오로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여주지 않는 교회보다 보여주는 곳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몇 년 몇 월 밤 12시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곳에 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처음에 붙잡은 것을 견고히 잡으라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경험이나 느낌하고는 상관없이 주님은 부활하셨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잡은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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