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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 출 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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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 2:21-25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서양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에“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용하던 우리의 삶에도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이 찾아올 때가 더러 있습니다. 고통은 결코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일 수 있습니다. 음악에는 박자와 멜러디가 있는데 우리의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멜러디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우리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고독과 고통과 번민 중에도 희망은 있고, 시냇물에는 돌들로 노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절벽에서 떨어뜨렸다가 바닥에 떨어질 즈음 새끼를 넓은 날개에 받아 다시 절벽 위로 데리고 올라가서 다시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훈련의 반복 속에서 결국 새끼 독수리는 날개에 힘을 얻고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갈 수 있습니다(신명기 32:11).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산업자들은 발칸산맥의 장미를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자정에서 새벽 2시에 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품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향기도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풍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절망과 고통의 한밤에 비로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개에 눈물을 적셔 본 사람만이 별빛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처하여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그때에 우리 영혼의 향기가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골이 깊은 만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덧입기가 쉬운 법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마음이 교만해지고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환난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게 될 때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당신 앞으로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고통소리도 들으시며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믿음으로 겸손하게 말씀을 받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독의 사람 모세의 기쁨(2:21-22)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은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모세는 그 동안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위하여 피신한 자로 이국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외로움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아들의 이름을 나그네라는 뜻을 담고 있는‘게르솜’이라고 짓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는 부연 설명은 모세의 심리적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타국에서 객이 되어 외롭게 살던 모세는 가정을 이루는 데서 비로소 기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모세가 동거하기를 기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라 함께 삶을 같이할 수 있는‘사람’입니다. 모세가 고독한 그의 인생 속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함께 하는 한 사람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르짖는 인간, 들으시는 하나님(2:23-25)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여러 해 후에”라는 말은 수많은 시간과 환경이 변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고역으로 인한 탄식의 절규뿐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고통은 그리스도께로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다" 고 윌리엄은 말한 바 있습니다.

본문은“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절규하며 탄식하는 인간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당하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는 분이십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고통받는 백성을 위하여 언약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나는 인간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 절망 속에서도 소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전하는 성악가

전 세계가 알아주는 3대 성악가 중의 한 사람이 호세 카레라스인데 그도 한때는 불치의 병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성악가로서 그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 7월이었습니다. 유명한 오페라‘라보엠’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서 한참 신나게 연습을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는데, 백혈병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한 그는 히스기야를 떠올리며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사랑의 하나님, 저에게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는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 치료도 믿음으로 잘 받아 내었고, 마침내 그는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다시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부여받은 것임을 믿고, 전 재산을 팔아서 바로셀로나에‘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 을 세우고 백혈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공연에서 얻는 수익금의 절반을 쓴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 나보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감격과 희망 속에서 백혈병 환자들에게 새 희망과 삶을 전하는 전도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픔의 노래를 부른 히브리 민족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은 히브리 민족이 애굽의 노예 생활의 고통 중에서 부른 슬픔의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간구하는 애절한 노래였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위로 주소서 노예신세 고통 덜어 주소서." 노예의 멍에를 벗겨 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은 눈물의 노래였습니다. 출2:23에 보면 히브리 민족이 고통 중에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탄식하며 부르짖으니"(출2:23). 히브리 민족은 고통과 슬픔의 민족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00여 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고 600여 년이 지난 후에는 또 다시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70여 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에도 히브리 민족은 고통 중에서 슬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통 중에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향하여 울었도다"(시137:1). 

고통 소리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권념하셨더라"(출2:24,25).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비어있을 때 소리가 난다"입니다. 특히 악기가 그렇대요. 솔잎으로는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버드나무 잎을 따서 이렇게 말면 안이 비어지지요. 그때 입술로 불면 버들피리가 되어 소리가 납니다. 왜 소리가 납니까? 안의 공간이 비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굵은 대나무의 안이 비어있기 때문에 퉁소를 만들어서 퉁소 소리를 냅니다. 가는 대나무로는 피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모든 악기는 속이 비어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답니다. 무엇인가 속이 잘못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악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이 이 역사를 구원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내 삶을 새로이 역사하는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랑의 준비를 하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가난한 마음, 순수한 마음, 맑은 영혼, 깨끗한 그릇이 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내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온갖 만물들의 자연을 보십시오. 가을이 되면 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온 나무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봄에는 꽃을 피우는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달기까지 내리는 햇빛과 부는 바람과 내리는 비를 통하여서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있어도 모든 열매의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 만물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허락하기 위하여 사랑의 준비를 하시는데 십자가를 지시는 희생으로 구원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결코, 포기되지 않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서양 우화에 보면, 두 마리의 개구리가 뛰어 다니다가 그 만 우유 통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두 마리의 개구리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마리는, 미끄러운 벽과 우유 속에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체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개구리는 얼마 안 있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그냥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후 밤새도록 멈추지 않고 우유를 휘저었습니다. 그 결과 액체였던 우유가 차츰 차츰 고체인 버터로 변했고 그 개구리는 단단해진 버터를 힘껏 뛰어 올라 우유 통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포기하지 않음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잘 설명하여 주는 우화입니다.

성공적인 인생과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몇 가지의 비밀코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끈기' 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는, 절망도 염려도 마침내 지치게 합니다. 또한 끈기는, 꿈과 목표를 이루어 내는 첩경입니다. 이러므로 꿈이 없는 사람은 망하듯, 끈기 없는 사람 또한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경주는 100M 달기가 아니라, 400M 장애물 경기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든지 단번에, 단숨에 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100M 달리기는 곧은 길을 신속히 달음박질하는 것이지만 400M 장애물 경기는 굽은 길을 몇 번의 장애물을 지나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장애물 백화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백화점에서 희망을 쇼핑할 것이냐, 아니면 낙망을 쇼핑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평생을 사노라면, 갖가지 장애물을 뛰어 넘고 또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쉬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음이 우리의 연약함이며 한계입니다. 산너머 산이고, 물 건너 물입니다. 장애물 경기와 같은 우리의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끈기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낙망치 않는 신앙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 했습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마음은,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체념하는 믿음입니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자포자기 심정입니다. 사람은 문제가 많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로 인한 절망 때문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는 절망감으로 인하여 죽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다고 하는 절망감이 길을 찾으려고 하는 집념조차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에 죽는 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끈기와 집념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실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끈기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나를 포기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하고 붙잡는 끈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추적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끈기 있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끈기 있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끈기 있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끈기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세상에는 하루아침에 될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한 두 번 매달림으로 이룰 일은, 더 더욱 흔치 않습니다.

성경 속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대역전 드라마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여리고 성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짐의 응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요단강에 일곱 번까지 몸을 담갔던 나아만 장군에게 치유하심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밤이 맞도록 수고한 베드로에게 찢어지는 그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딸아이를 고쳐 달라 애원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회복의 은혜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하늘을 열어 비 내려 달라고 일곱 번까지 머리 숙여 기도했던 엘리야에게 큰비로 응답을 주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음이 이미 응답입니다. 포기하지 않음이 이미 축복입니다. 남에게 있는 지식 없어도, 남에게 있는 물질 없어도, 남에게 없는 건강 없어도, 포기하지만 마십시오. 끈기를 놓치지만 마십시오. 잘 믿는 믿음이란, 포기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 한다는 것도, 낙망치 않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외면하거나 박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끝까지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홀연히'로 격려하십니다. 1 년 동안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한번 더 기도하십시오. 그토록 사랑하고 섬겼어도 달라지지 않음에 속상하십니까? 한번 더 사랑하고 섬겨 보십시오. 그토록 사무치게 하나님만 찾고 기다렸는데 더 힘들어 지고 더 안 좋아졌습니까? 그래도 한번 더 몸과 마음을 추스려 매달려 보십시오. 염려대신 찬송을, 재대신 화관을 씌워 주실 것이니까요.

사단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못 살게 굴고 어떻게든 틈을 타고 들어와, 신속히 포기하게 하고, 가능한 빨리 낙망케 하는 일입니다. 이러므로, 포기와 낙망은 마귀의 코드이며, 주님의 코드는 기대와 소망입니다. 믿음은 7전 7승이 아니라, 진짜 믿음은 7전 8기하는 것입니다. 한번을 더 못 참고, 포기하여 홀연히 역사하실 하나님을 놓친다면, 하루를 못 견디고 낙망하여 마침내 역사하실 하나님을 잃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그러니, 미리 앞 당겨 걱정하지도, 포기하지도, 낙망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루 밤에도 마음만 잡수시면 천지도 만드실 수 있는 좋으시고 전능하신 분이니까요. 이제 포기하지 않는 영성과 낙망치 않는 기도의 힘으로 홀연히 찾아오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담아놓을 그릇들을 미리 미리 준비하십시오. 포기해야만 하는 당신도 힘들지만, 포기하는 당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더 많이 힘들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이제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오. 낙망과 포기에 동의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포기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듯이, 포기하지 않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우유 통에 빠진 개구리와 같으신가요? 그렇다면 가만히 있지 마시고 밤을 새워 기도의 흔적을 남기십시오.

밤새워 고민하며, 100년이 걸려도 해결이 안될 문제도 밤새워 기도로 매달린다면 하루 만에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액체가 고체로 변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의 움직임!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어떤 장애물도 뛰어 넘게 할 비밀병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때에 우리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온 교회가 새로워져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맑은 영혼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시간 용기 있고 담대하게 결단하고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깨끗하고 맑고 순수한 그릇이 되어서 여러분들을 통하여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르짖는 기도에는 [진실]과 [절실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다른 상황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부르짖는 외침은 가장 진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어떤 가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진실함이 하나님께로 상달되는 큰 힘인 것입니다.

또 부르짖는 기도는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온 마음과 중심을 다 담아 매달리는 것이 절실입니다.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부르짖는 기도에 허공을 치는 잡념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 쏟아 부어서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이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상달되어지는 또 하나의 기도의 날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올바른 신앙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인과 각계의 지도자들이 있다면 '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나라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 가정적으로도, 또 개인적으로도 목숨을 건 진실과 정성의 부르짖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남이 아닌 우리에게, 바로 내게 이 기도를 위한 사명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펄젼] 목사는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절벽 아래로 던져지는 밧줄이며, 그 위에는 하나님의 귓가에서 울리는 큰 종이 달려 있다. 사람들은 지지부진하게 기도하는 까닭에 그 종을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그 밧줄을 담대하게 쥐고 온 힘을 다하여 계속적으로 잡아당기는 사람이다."

기도에는 절벽에 매달린 듯한 절실함 속에서 온 존재를 다 쏟아 붓는 진정과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부르짖는 기도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은 애굽의 압제 속에서 고통을 받던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이 땅에 가득 찬 죄악으로 인한 의로운 피와 만물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확실하게 개입하여 역사하시는 은총을 이 시간 우리가 힘입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부르짖는 입술]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 분은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고통 속에 있을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합니까? 주님, 고통 당할 때 사람이나 돈, 혹은 명예를 의지하면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모든 상황이 쉽게 풀어짐을 믿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얼굴을 더욱 간절히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의 어머니들로부터 아이가 평소보다 조금 더 울면 밉지만 많이 울면 겁이 난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때는 아무리 자기가 낳고 기르는 자식이라도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겁이 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주 화를 내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아무리 큰소리치거나 화를 내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지만 평소에 화를 내거나 큰 소리 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 이러한 행동을 하게되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심각한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길 원하십니다. 혹 입을 열어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먼저 애를 쓰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혹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당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어 늘 응답하십니다.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종종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아무리 절박하게 기도하고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음소리를 내어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듣지 못하시는 듯 외면하시고 응답하시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그 이유를 빨리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대체로 크게 보면 징벌로 말미암는 경우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고통이나 어려움보다 더 큰 지고의 선이 있을 때 그 정도는 참고 견디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한동안 내버려두시다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시점이라고 판단하시는 그 때 개입하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계시다가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한번 부르셨으면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설사 여러분이 죄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시면서 꼭 응답 받아야 할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아직 응답 받지 못하였다면 혹 그 안에 하나님의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은지 눈을 들어보십시오. 혹 여러분이 고통이 심하여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응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일을 시작하고 계시고 여러분이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하나님의 온전한 응답이 여러분의 눈앞에 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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