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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말을 하자 / 마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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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우 (한남제일교회)
믿음의 말을 하자 (마12:22-37)


3월달이다. 3월은 "바른 말, 좋은 말을 하자"는 주제를 갖고 한달동안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말`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쓰는 음성 또는 그것을 문자로 나타낸 것." 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말은 혼자하는 독백이든 상배방과 하는 대화이든 그 속에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있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셨다.

1.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말은 입으로 하지만 말은 그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34절을 보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말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 준다.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35절을 보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누가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인가?
성경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리 아기라 해도 다 죄인이라고 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고 선한 사람이 된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의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다. 거룩한 인생이라 한다. 선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새 생명은 성령 안에 살게 됨으로 선한 사람으로 살수 있게 되었다.

살후2:13 "주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
죄인이 예수를 믿어서 새롭게 의인이 되어 태어나면 태어난 새 생명이 어떻게 자라느냐? 선한 사람이 되면, 성령의 거룩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2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한다.
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거룩한 사람, 즉 선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갈 5:22-23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②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정욕의 지배, 악한 영 마귀의 지배를 받는 악한 사람이다.
갈 5:19-21 /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영의 열매를 맺는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육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33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사과나무는 사과를 열매로 맺고 사과를 보면 당연히 사과나무를 생각하게 된다. 열매와 나무를 따로 세워서 생각할수 없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악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갈5:16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는데, 우리 속에 죄의 본성이 있어서 둘이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가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본성을 따라가면 육의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집에 개가 두 마리가 있다. 까만개와 하얀개가 있다. 두 마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힘센 개가 이기게 되어 있다. 잘 먹으면 힘이 세다. 우리 마음엔 두 개의 개가 있는데, 잘 먹는 개가 이기게 되어 있다. 성령을 추구하고 성령의 지배를 많이 받으면 악령이 육신의 정욕이 이길 힘이 없는 것이다. 어두워도 불만 켜면 환해지는 것이다. 어두움이 있느냐, 없느냐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불만 켜면 되는 것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빛이 없으면 어둡게 되어 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게 되어 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별하는 기준은 단순한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영적상태, 즉하나님의 성령이 다스리는가? 아니면 육체의 소욕, 악령이 다스리는가에 따라 구별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다. 사람들의 평가는 어떠한가?
22-24절을 보자.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새불을 힙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무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라고 했다.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은 귀신의 왕 바알새불에 소위 귀신들린자라고 한다. 그 능력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에 분노하신다. 28절에 성령의 역사라고 하신다.
28-29절을 보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았다고 하시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령은 귀신보다 세다고 하신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할 것은 나는 다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바라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이 시간에 역사했고 그 사람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됐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을 할 때 그것이 단순하게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의 표출이라고 보지 않고 그 말속에 있는 우리의 영적상태를 보시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니면 육을 따르는 사람인가? 그것을 통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평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나의 사용하는 말을 통해 나의 영적상태를 체크해 볼수 있다.
나의 영적상태는 어떠한가? 성령에 속한 그리스도인인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인가?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면 참 안타깝다. 오늘 한국의 현주소를 보는 것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 이 날 대구 서부교회 김창제 집사님도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 분이 남기신 전화메세지는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바로 이런 분이 선한 사람, 성령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분 연세가 69세였는데, 새벽기도 가셨다가 조금 더 기도하고 뒷정리 하시다가 집에 오시는 길에 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그 부인과 마지막 통화내용이 인터넷에 소개되었는데, "여보, 나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야겠소.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교회 주보를 보고 관계자들이 연락을 해서, 남편과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유가족들 눈에 보이는 김집사님의 모습은 시신 어느곳 하나 다치지 않고 성경책을 가슴에 꼭 안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이런 마음을 갖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게 될 때 끝까지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믿음 잊어버리면 안될텐데, 집사님처럼 이런 믿음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를 바라보며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간다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면서 유언과도 같은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는 결론이 없다. 잘된 것같아도 다 된 것이 아니다. 안 된 것 같아도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과정이다.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가? 말을 통해 알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 가서 끝도 아니다. 주님오실 때까지 계속 가는 것이다. 인생은 은퇴가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예수께 붙잡힌 바 되어 살아가는 인생은 끝이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사용하는 말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서 참 부끄러움이 없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2.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심판은 단순히 죄있는 자에게 벌주는 것이 아니라 잘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하신다.
36-37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무슨 무익한 말이라는 것은 농담이다. 농담이라고 심판받는다.
말 잘하면 상을 받고, 말 못하면 벌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상과 벌은 어떤 행위 - 즉 좋은일하면 상, 나쁜일 하면 벌이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상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말에 상벌이 있다고 하시며 말과 행위를 같은 무게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적 사고이다. 말과 행동은 같다.

상대적 개념은 그리스적 사고라고 한다. 그리스적 사고는 `사람`을 볼 때 육체와 영혼을 나누어 본다. 또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누어 본다.
초대교회 이단 가운데 영지주의가 있는데, 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육체는 악하고 마음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 안 나오는 이들 가운데 내가 교회는 안 나가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적 사고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고 `성경적 사고`에는 이런 것이 없다. 말과 행위가 같다는 것이다. 창32장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 그는 그 날 아침 브니엘의 아침을 받는다.
그는 단 한마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어진 이름을 들은 것 뿐이다. 그 단 하마디 갖고도 기분 좋게 떠날 수 있는 것이 히브리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야곱과 에서의 축복사건을 볼 때에 손 한번 얹고 기도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데, 손 얹는 것에는 있고, 손이 없는 곳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과 행위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성경적 사고이고 예수님의 사고이다.
무슨 말을 하던지 그대로 된다는 것이고, 하늘에서 매이면 땅에서도 매인다는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은 그만큼 말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은 같다. 여리고성을 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성을 주실 줄 믿고 돌았다는 것이다. 말하면 이미 그것이 내것이다라고 믿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어떻게 빛이 생기고, 해가 생기고, 동물이 생겼는가? 말씀으로 생긴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왜 심판을 하는가? 말과 행동이 같기 때문이고 행동이 힘이 있는 것처럼 말에도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말이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 <물에 답이 있다> 라는 책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그 말하는 것에 따라 물이 변하지 않는가? 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또 어떻게?>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두 사람의 비교인데, 한 사람은 공산주의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고 다른 한 사람은 로마 카톨릭의 훌툼 쉰 대주교이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일군이요, 교회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한 시골 천주교회에서 신부의 주일 미사를 돕던 소년이 그만 실수로 성찬 포도주 잔을 떨어뜨렸다.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일인지 신부는 화를 내며 뺨을 때리며 소리를 지르기를 "너 어떻게 그 모양이냐? 다시는 교회에 오지마!" 야단을 치고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실수로 큰 책망을 받은 소년은 자라서 교회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공산주의자의 괴수가 되었다. 이 소년이 티토 대통령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도시의 한 교회에서 있었는데, 신부의 주일미사를 돕던 소년이 그만 성찬 포도주 잔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웃으며 조용히 아이에게 속삭인다. "애야,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신부가 되겠구나." 이 소년이 자라서 로만 카톨릭의 훌툼 쉰이라는 유명한 주교가 되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에는 능력이 있다. 좋던 나쁘던 힘이 있다.

예수님께서 마5:21-22에 살인하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시더니, 22절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그 심판은 살인하는 자에게 주는 심판과 같은 심판을 준다.
또 형제에게 `라가`(욕설)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간다고 했다.

오늘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령훼방죄인데, 그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30-32절 말씀을 보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라고 한다. 그리고 주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우리는 이 시간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말을 판단하신다면 나는 과연 어떤 판단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상 받기를 바란다.


3. 믿음의 말을 하자.

말 1) 우리의 영적상태를 나타낸다.
2) 말은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믿음의 말이어야 한다. 말은 해야 한다. 그러나 수다를 떨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세상사람들은 침묵이 금이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침묵에 대해 찾아볼 때 침묵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대해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있지만 말 안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주일에 본 엡4장 11절의 은사가 무엇인가? 사도요, 선지자요, 복음전하는 자요, 목사와 교사가 무엇인가? 말하는 사람들이다. 말은 해야 된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다.

한 방송국의 책을 읽자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중에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란 책이 있다. `괭이`는 고양이고, `부리`는 갈매기다. 인천의 빈민지역, 고양이 섬의 갈매기를 이름하여 괭이 부리말이고, 일제 식민지 시대, 6.25 전쟁후 60,70년대 산업화정책을 거쳐가면서 이루어진 가난한 노동자들의 마을이다.

그 동네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 것이 이 책인데, 그 내용 가운데 쌍둥이 숙자와 숙희 라는 자매가 있다. 숙자는 착하고 생각이 깊어서 집에 오면 빨래도 하고, 똑같은 쌍둥이인데도 숙희는 천방지축이고 철부지다. 살기 어려워 엄마가 가출을 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숙자의 마음에 엄마가 힘들어서 나갔는데, 다시 나가면 안되니까,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돼지 하며 말없이 엄마를 돕는다. 마음으로는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은데,
엄마가 귀찮아서 다시 나갈까 봐 가만 있는다. 철부지 숙희는 엄마에게 달려가 반갑다고 끌어안고 이것 저것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며칠이 지난 후 잠결에 언뜻 엄마 아빠의 대화내용을 듣는데,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숙자는 내가 온 것이 반갑지 않은가봐, 숙희는 좋다고 하며 이것저것 해달라고 조르기도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러자, 아빠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숙자는 얼마나 마음이 깊은지, 당신이 없는 동안 집안일을 다 했어."

이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말은 해야 한다. 내 마음을 남이 알아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신중히 말을 해야겠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능력있는 말을 해야겠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을 해야겠다. 마태10장2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롬8:9)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주로 하시는 말씀은 두가지가 있다.
1) CAN (할 수 있다) - 능력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어린아이의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하나니이 우리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이 있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도와주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의 말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듣고 싶어하신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는 고백을 자주 하는데, 우리도 그 고백을 자주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말씀 속에 역사가 있을 줄 믿는다.

2) WILL (될 것이다) - 약속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 말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소망의 말이고, 희망의 말이다. `없다`, `안된다`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있다`, `된다`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민14장28절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12정탐꾼을 보내어서 보고를 하고 사람들이 열명의 말을 듣고 울고, 두사람은 하나님이 줄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그대로 갚아주리라"
내가 하는 말을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갚아준다는 것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해 주실 줄로 믿는다고 할 때 이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요, 찬송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한다고 하는데, 내가 격려하고 칭찬한들, 얼마나 하겠는가?
그때에 하는 말이 믿음의 말이다. 너는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때, 최근 1지능, 2지능, 3지능을 이야기한다.
1지능은 IQ(지능지수), 2지능은 EQ(감성지수), 3지능은 SQ(영성지수)라고 한다.
IQ는 지능검사 결과로 지능의 정도를 총괄하여 나타내는 수치이다.
EQ는 마음의 지능지수라고도 할 수 있다. 감성지수, 감정적 지능지수라고도 한다. 요즘은 유치원때 감성지수를 키우라고 한다.
SQ는 IQ와 EQ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영성지수라고도 한다. IQ와 EQ는 개인의 능력에 해당하나, SQ는 창조적 능력, 즉 신이 내게 주는 능력 등을 이야기한다.

1990년대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 볼프 싱어라고 하는 사람이 연구를 했는데, 우리 사람의 뇌 가운데는 IQ의 기초가 되는 순차적 신경연결과 EQ의 기초가 되는 신경망 조직만 있는 것이 아니라, SQ의 기초가 되는 신경 진동 과정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은 신경진동을 통해서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파악하고, 삶의 목적을 결정할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영성의 신경능력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 즉 창조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IQ와 EQ가 높지 않더라도, SQ가 높을 때 이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창조적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교육학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이 얼마나 탕자인가, 사람의 교육학이나 심리학으로 볼 때, 이것은 절대 변화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어머니의 기도이다. 나의 부모님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 SQ를 키워주셨다.
너는 목사가 될 것이고, 하나님이 너를 훌륭한 목사로 만드실 것이라는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 자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우리 이웃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고, 여러분이 심판 받을 수 있는 그말, 그 것은 믿음의 말 밖에 없다.

저번주에 그레이스 케터만이 쓴 `Verbal Abuse` 라고 하는 책을 하나 샀다. 그대로 하면 언어남용, 언어 폭력이란 뜻이다.
미국의 알코올 중독자 치료협회에서 재활프로그램 중에 언어치료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약물치료나 운동치료보다 더 힘있게 나타나는데, 50% 이상 완치율을 보였다.

12단계
1. 난 알콜 중독에 빠져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삶 자체가 엉망이란 사실을 시인합니다.
2. 우리 스스로는 어찌 할 수 없어도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3. 이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로 작정햇습니다.
4.
5.
6.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7. 이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합니다.
8.
9.
10.
11. 날마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영적교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주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12. 이것은 효과가 있고, 나는 이대로 행동하겠습니다.

매일 일어나 12단계의 말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쳐 주시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주실 줄로 믿는 것이다. 이런 고백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에 이 알콜 중독이 50%의 치료율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이 영적상태를 체크할 수 있다는 체크리스트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두 번째, 내가 사용하는 말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신중히 사용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해야 한다.

오늘은 삼일절 기념주일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요즘 경제가 나라를 살린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믿음의 말이 우리민족과 우리 나라를 살릴 것이다.

이 믿음의 말이 나를 살리고, 내 가정과 자녀를 살리고, 내 남편과 아내와 부모를 살려주실 줄로 믿는다. 학교나 직장, 동네, 교회 안에서 믿음의 말을 통해 우리가 사는 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사랑의 언어 - 용혜원(탁월한 언어의 능력)
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②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③ 기도하겠습니다.
④ 하나님이 복주실 것입니다.
⑤ 주님과 항상 동행하자.
⑥ 주님의 복을 받으라.
⑦ 아름답습니다.
⑧ 멋집니다.
⑨ 신이 납니다.
⑩ 재미있습니다.
⑪ 감동적입니다.
⑫ 사랑합니다.
⑬ 성공할수 있습니다.
⑭ 잘 이겨내셨습니다.
⑮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세요.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
① 할 수 있습니다 - 긍적적인 사람
② 제가 하겠습니다 - 능동적인 사람
③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 적극적인 사람
④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 헌신적인 사람
⑤ 잘못된 것을 고치겠습니다 - 겸허한 사람
⑥ 참 좋은 말씀입니다 - 수용적인 사람
⑦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 협조적인 사람
⑧ 대단히 고맙습니다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⑨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 묻는 여유가 있는 사람
⑩ 이 순간 할 일이 무엇일까 하는 사람 - 일을 찾아할 줄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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