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 잡초 잡초
  • 272
  • 0

첨부 1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행 3:1-10)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늘 울어도 그 크신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감사와 감격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 귀한 보물을 얻었다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또 다른 무엇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족함을 느낀다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복받은 나라'라고 하는데, 사실 예수 잘 믿는 것을 빼고는 복받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땅 덩어리도 좁고, 자원도 없고, 석유 한방울도 안납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먹고 살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해야 하니 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백성들이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천만 성도, 5만 교회가 있습니다. 조상대대로 우상과 미신을 섬기던 나라인데, 짧은 기간동안에 많은 국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세계 어디다 내 놓아도 예수 신앙만큼은 뒤지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복받는 이유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예수를 더 잘 믿고 그 이름을 높이고 나가면 세계를 다스릴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온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복받고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일으킨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 교회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기적 가운데 첫 기록입니다.
그 때 성전 미문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걸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일을 할 수 없어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구걸하여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몇십 년 동안 매일 그 장소에서 그렇게 똑같은 구걸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에 감동을 받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평생을 앉아서 한숨과 절망 속에 살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살아온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기쁜 나머지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께 찬미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 보면 많은 교훈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앉은뱅이는 과거에 남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장애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애인이라고 다 남에게 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인도 남에게 기쁨을 주고, 봉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 직업을 가지고, 남을 도우면서 살려고 노력하면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구걸이 전부입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성전 문 앞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접촉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 문 앞에서 자기 인생을 바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구걸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어려운 처지만 생각하고 운명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그 때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 앉은뱅이 때문에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거룩한 마음으로 성전을 오가는데, 돈이 없어서 못 준다든지, 미처 준비가 안되어서 못준다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픈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릴 때 마음에 자책도 오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 앉은뱅이는 남에게 부담을 주고 폐를 끼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안에 이런 영적인 앉은뱅이들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서지를 못하고,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깊이 묵상하게 되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삶을 닮아야 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 주목하였다고 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주목한 것입니다.
그는 육적인 장애에 매여서 영적인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성전은 건강한 사람들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지, 나같은 앉은뱅이는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 얽매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영적인 문제를 모르고 육적인 문제에 얽매인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은혜의 세계, 신령한 세계가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주목의 대상입니다.
주목하다는 말은 대충 본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한 시선으로 똑바로 응시해 본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감동하셔서 불쌍한 마음으로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든지, 인간적으로 불쌍해서 돈을 주든지, 아니면 귀찮아서 돈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이렇게 강한 시선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주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가운데 좌절하고 낙심하여 인생을 저주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외면하면 그들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받고 성령 충만한 우리가 조금만 주목해 보아도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선교위원회에서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도울 수 있는 교회와 사람들을 추천하라고 광고했습니다. 교회가 일을 하면서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동안 무심코 스쳐 지나간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도움이 되어야 할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어려운 이웃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의 깊게 보는 가운데 어려운 이웃들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우는 '우리의 동료들에 대한 가장 나쁜 죄는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너무 강퍅하다 보니 어려운 이웃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를테면 눈을 안마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삭막한 세상이 더 삭막해지고 있습니다. 눈이 마주쳐야 서로 말을 하고 이해를 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사도들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는 강한 눈이 있었습니다. 그 눈으로 그 앉은뱅이를 보니 무언가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하였습니다.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 사도들이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감동이 되면 무어라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도들에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었기에, 그것을 준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요구한 것은 은과 금이지만, 사도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 것입니다.
성도의 참된 모습에 대하여 이사야서 58:7절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불쌍한 이웃을 마땅히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소중하고 가치있는 보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6: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교회는 거칠고 소망이 없는 이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만 주면 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은과 금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곳에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병든자가 고침받고, 귀신들린 자가 쫓겨가고, 가난이 물러가고, 싸움과 다툼과 전쟁이 물러가고,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지은 인간들이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하고 있는 한 선교사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가 선교지에 처음 갔을 때는 '인간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무지와 가난과 질병 속에서 미신이 지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암담했는데 기도하면서 그들과 사귀고, 그리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었습니다. 물론 박해도 있었고 생명의 위협도 느꼈지만, 최선을 다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나중에 부족의 장까지 예수를 믿게 되어 더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어느 사회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의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기고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가 요구하는 물질을 못준다고 아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필요한 곳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면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일반 사람들과 사도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잔돈 몇 푼을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돈 몇 푼 주어서 먹거리를 해결하게 하는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영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4: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육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곳에 영이 살아서 심령의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됩니다. 복음만 전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앉은뱅이 같은 심령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여 저들을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 됩니다.
본문에 보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6-7절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낫고 걷게 된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런 기적을 베풀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평생동안 앉은뱅이로 살던 자가 일어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발목과 발에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완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완전히 치유가 된 것입니다. 40년 동안 그늘진 세상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슬픔과 고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일어났으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 기쁨과 즐거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쁨이 자기가 예수 믿고 구원의 은혜를 알았을 때 받은 기쁨이 아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맞는 이야기기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너무 감격스러워 성전에 들어가 걷고 뛰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그는 돈을 얻었을 때는 그런 기쁨을 못 느꼈습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그 기쁨을 모릅니다. 이것은 돈 가지고 느끼는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느끼는 기쁨의 차원은 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얻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얻고 기적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증거한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귀한 이름을 어디서든지 나누고 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야 하고, 불신자를 만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나누고 전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과 금이나 지식과 경험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은과 금도 아니고, 지식이나 경험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 이름으로 질병에서 놓임받고, 그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받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고 기뻐하며 온 세상에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