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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궤도 수정 / 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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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궤도 수정
히브리서 11:17-19
설교자 : 김형준 (동안교회)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아폴로 13호>는 달에 착륙하고자 지구를 떠나가던 중에 일어난 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폴로 13호는 연료탱크 폭발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우주의 미아가 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합니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본부와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은 지구로의 귀환을 결정하나, 아폴로 13호가 달을 돌아 지구로 향할 때 아주 정확한 계산 하에서 궤도를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각도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기면 대기권 진입 때 다 타서 숯이 되거나 대기권 밖으로 튕겨 나가 영원히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전력과 믿을 수 없는 컴퓨터 그리고 수많은 변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39초간 추진 분사가 시도되고 아슬아슬하게 궤도는 수정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태평양에 안전하게 착륙합니다. 죽음의 궤도에서 어느새 생명의 궤도로 진입하게 된 ‘아폴로 13호’는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 한 장면 한 장면에서 잘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영화 밖 세상에도 그대로 살다간 파멸과 죽음으로 끝날 인생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궤도를 수정하고자 몸부림치는 그들에게서 생명과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듯이 우리 삶도 궤도 수정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궤도를 수정하기 위한 작업보다도 인생이 생명 길로 들어서기 위한 작업은 훨씬 더 어렵고 힘이 듭니다. 힘들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알기에 오늘 인생의 궤도를 어떻게 수정해야 할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궤도를 크게 두 번 수정했던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 수정합니다. 두 번째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재물로 바치라는 명령 앞에서 순종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에서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궤도를 무사히 수정하여 축복의 문을 여는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되게 됩니다. 첫 번째 궤도수정이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의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아는 삶의 궤도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주안에 예비된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궤도수정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로 하여금 축복의 문을 열게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우선순위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본문 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에 믿음으로 독생자 이삭을 드렸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는 명령은 곧 이삭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쉽게 포기하고 순종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100세에 얻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사라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받았던 수치와 탄식을 웃음으로 바꾸어준 아들이었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이 날 약속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이삭을 드려야함은 곧 미래와 희망을 함께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족에게 유난히 집착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가족에 대한 끈끈한 정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집을 떠남으로 우선순위를 정한 이후에, 더 심각한 선택의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약속의 자녀를 주신다던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 때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없다가 첫아들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의 첫 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대가 있었고 아들을 사랑하는 정성과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점점 커서 10대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고, 소년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그 여종과 아들을 쫓아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심히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육정으로는 포기할 수 없는 아들입니다. 어쩌면 이제 태어나 막 정을 붙이는 이삭보다도 온갖 정과 사연이 있는 이스마엘 이었습니다.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삭이 약속의 자식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십니다. 우선순위를 세우는데 있어서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육정을 꺾고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 쫓습니다.

그리고 쫓아낸 아픔을 이삭이 크는 기쁨과 보람으로 잊어가는 때, 또 이삭을 포기하라 하십니다. 이삭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귀하게 여길 것인가, 몇 십 년을 기다리다 얻은 이삭을 귀하게 여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죽어야하는 심각한 기로에 그는 서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 귀하게 여기고 말씀 따라 이삭을 재물로 바칠 것을 결단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건강도 주셨고 가족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도 주셨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가운데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가 꼭 하나 있을 것입니다. 소중히 여기는 그 무언가와 함께 살다보면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오늘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나온 사람이 처음에는 ‘정말 하나님 은혜로 인해 나는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라고 간증한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 의사 참 용하더라. 요즘 의료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몰라. 옛날 같으면 나는 죽었지.’ 하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 좋지만 본인이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해. 좋은 음식도 찾아 먹고 운동도 하고, 본인의 의지가 회복에 제일 중요한 거야.’ 라고 말한답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 앞에서 간곡하게 부탁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요롭고 즐거운 생활을 하게 될 때에, 네 능력과 네 손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 때 그 땅에서 영구히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가나안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한다고 말씀에서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처음 갔을 때는 감사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주신 풍요로움에 젖어 살다 하나님을 잊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혼란기인 사사 시대로 접어들었던 사실을 압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과 물질 때문에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주신 건강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건강은 남아있질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 때문에 더 많은 물질을 위하고자 하나님이 필요로 하실 때는 드릴 것이 없습니까? 어떤 분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 바빠서 교회에 못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기도를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집에 물질 주심을 중단시켜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되는데 물질 때문에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목사님 그 기도 취소시켜주십시오!” 제가 진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즐기다 보니 하나님을 선택하는 나의 신앙에 빛이 너무 바래셨습니까? 다시금 결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생의 궤도 수정을 요구하실 때 반드시 우선순위를 물으십니다.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자신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예비하신 축복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드림의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드렸다’는 프로세내노켄은 프로스페로의 완료시제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을 받으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결단과 마음을 보시고 이삭을 진짜 죽이진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으로부터 받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대신 준비된 수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드림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드림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것이고 삶의 유일한 것이며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약속과 축복도, 현재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도 나아가 이삭을 통해서 이뤄질 미래의 모든 것도 드렸습니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폐기처분될지 모릅니다. 더 남겨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헌금하는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엽전 한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헌금하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이 한 사람을 보았다.” 제자들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중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주님은 달리 보셨습니다. “저는 구차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주님이 보시는 기준은 얼마를 넣었나에 있지 않고 무엇이 얼마나 남는가에 있었습니다.
 
이삭을 드리고 나면 아브라함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시켜 오셨습니다.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기르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을 때 기근이 있다고 했습니다. 애굽으로 갔을 때에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깁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내를 다시 찾을 수 있었고 바로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처음 신앙은 받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면 은혜 받고 교회 와서 구역의 사랑 받고 또 교회에서 주는 여러 가지 사랑과 관심도 받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받는 것이 없으면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구역에 가도 받는 것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받아야 구역모임에 가는데 받을 것이 없으면 나가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롯이 적들에게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은 사병 400여명을 데리고 기습공격해서 롯을 구해옵니다. 찾아와서 재물의 10분의 1을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그 후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전리품을 가지고 가라 할 때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라고 외치며 받기를 거절합니다. 받는 사람에서 공급자 되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난 이후 오히려 받기를 거절합니다. 진정한 공급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당장의 재물보다는 원래 온 곳으로 돌려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훈련을 시키신 다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단순히 양보하고 사양하는 믿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드리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을 때도 굶기지 않으시고 인생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만큼 온전히 올려 드리게 되는 신앙이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축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드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재물로 드리라 성경은 권면하십니다. 가장 귀한 재물은 우리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은 자신을 먼저 죽이지 않았으면 이삭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몸을 드린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면 받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이 됩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을까, 기도가 필요한 곳이 없을까, 봉사가 필요한 것이 없을까……. 이와 같이 신앙이 성장하면 전에는 ‘오늘 김 목사가 나한테 인사하나 두고 보자.’에서 ‘오늘은 내가 먼저 인사해야지’, 혹은 ‘오늘 소외된 사람이 없을까 따뜻한 손으로 먼저 다가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드림의 신앙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의 경험입니다. 이민자들은 헌금에 대해 예민하고 상처가 있습니다. 헌금 때문에 교회에 안나오는 분들이 많아, 저는 십일조나 헌금에 대한 설교를 3년 동안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헌금설교를 안 해도 채워주실 줄 제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대신 은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 있는데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 교회에 뭔가 하고 싶은데 뭘 하지?” 하니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분 같았는데 다른 한 분이, “십일조하라고 하던데 말이야. 열 개 중에 한 개 구별해서 드리라고 하던데 그걸 해보지.” 여러분 제가 그 대화를 듣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교회 예산이 불과 일 이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이 성장하면 주는 신앙 즉, 드림의 신앙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실 때 필요한 만큼 드립니다. 내 마음뿐 아니라 시간도 드립니다. 또한 이웃의 어려운 이들에게 줄줄 아는 사람은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열어갑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고는 교회 밖에서 받은 은혜 다 잊어버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저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리라」를 우리가 잘 생각해 보십시다. 이 때는 부활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등이 생깁니다. 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는 것은 죽이라는 말이고, 죽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주신다던 많은 축복과 후손이 다 중단된다는 뜻인데 말입니다. 아들을 드리라니 아들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게도 삼일 길을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당장 하라 하시면 더 쉬울 텐데 삼일동안 자신이 죽일 아들을 보며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음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다시금 하나님 말씀을 붙들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남자로서 여자로서 이미 생명을 낳을 수 없는 가운데서 자녀를 얻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신 창조의 하나님, 당신이 약속한 것을 100세가 될 때까지도 끝까지 지키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아들을 죽여야 한다 할지라도 능히 살리시리라 믿었던 바로 부활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중에 가장 성숙된 신앙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 주실 줄을 믿습니다. 이것은 물질의 신앙입니다. 그보다 더 성숙한 신앙은 주님은 다시 살리시고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믿는 부활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을 살면서 우리를 가장 위협하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사망 권세입니다. 성경은 사망의 권세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한다 했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스승을 배반하게 만든 것은 사망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게 만든 것도 사망 권세입니다. 우리로 좌절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겠다 하신 신실하신 약속이 있기에 그분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야만 합니다. 구원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셔야 합니다. 신실하신 약속을 다시 붙들 때에 오늘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 삶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바뀌었고 표정과 대화의 내용도 바뀌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5절 이하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브라함의 절대 순종은 부활 신앙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보면 답답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서 있는 땅이 늪처럼 느껴질 때 말입니다.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우리로 낙심케 하고 두렵게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있기에 사망 권세의 위협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신뢰하며 새 생명을 향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오늘, 부활의 신앙 없이는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삶의 궤도를 수정해 주시기 원하시는데,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축복해주시고자 하심 때문입니다.

결단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서 찾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믿음을 다시 세우십시오. 이제는 받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이 되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신앙을 회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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