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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장 샬롬 선교의 장(場) “애광원(愛光園)” / 신 6:5, 골 1: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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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 샬롬 선교의 장(場) “애광원(愛光園)”
                        신명기 6:5, 골로새서 1:24~25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


우리 기장은 하나님의 선교 중 샬롬의 선교를 갖는다.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샬롬이라고 선언한다. 이 샬롬을 신약 성서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다”(엡2;14).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인 동시에 구현체라고 한다면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샬롬의 선포자일 뿐만 아니라 샬롬의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약속인 샬롬은 정의가 깃든 평화요, 태초에 만물을 이레 동안 창조하시고 “참 좋다!”고 하신 창조 질서의 보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샬롬을 편의상 정의와 평화와 창조 질선 보존의 합성품(JPIC)이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교를 샬롬의 선교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중에서 신체장애자와 보호대상자 선교 등 특수 선교가 있다. 특수 선교란 선교 방법과 선교 대상과 선교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기준으로 하여 구별한다. 즉 노인을 위한 선교, 무의탁 은퇴 교역자에 대한 대책, 맹아 및 맹인사회를 위한 선교, 정신박약아 선교, 지체 부자유인 등을 위한 선교, 미혼모와 그의 영아들을 위한 대책, 생명의 전화를 통한 상담 선교 청소년 상담 선교,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는 각종 봉사직 종사자들을 위한 선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교회는 특수 선교 종사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제정 및 인적 자원의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또한 특수 선교 종사자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연구 개발하며 인내와 기쁨으로 기도하며 봉사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다원화됨에 따라 선교 영역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신체장애자들이 당하는 인권 박탈과 제약의 해소는 시급한 선교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신체장애자들이 사회 복지 시설과 공공시설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사회 복지 정책을 개발하여 신체장애자의 의식적 생활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보호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사회 교육적 차원의 계몽, 선도적 복지사업의 시행, 전문적 복지 정책의 연구 및 그 활동을 하여야 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종로시찰회는 사순절을 맞아 그 의미를 갖고자 3월 10-12일에 거제도 “애광원”을 찾았다. 애광원 김임순 원장의 술회(述懷)를 통해 우리 교단의 존경스런 장로로서 애환이 담긴 50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에 흔적임을 알게 됐다. 1952년 한국 전쟁을 피해 남쪽 섬 거제도에 피난 온 김임순 원장도 마찬가지로 춥고 배고픈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김 원장은 전쟁으로 남편이 행방불명된 가운데 거제도까지 피난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딸 하나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교사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정부 사회 복지 직원이 찾아와 강제로 7명의 젖먹이를 맡기게 된다. 김 원장은 그 일을 원치 않았으나 주님으로부터 아기들을 돌보라는 계시를 받고 “사랑과 빛의 정원”을 의미하는 “애광원”을 설립했다. 장승포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흙과 판자로 벽을 세우고, 짚으로 덮은 움막을 만들어 그 안에서 아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김 원장은 집을 보수하고 또 부모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기부 받은 돈으로 주변 땅을 조금씩 매입했다. 김 원장은 교회와 자신이 공부했던 이화여자대학교 동문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얼마 뒤 김 원장은 나이든 고아들과 지역에 가난한 젊은이 특히 전쟁으로 혼자가 된 여성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직업 보도소를 열었다. 그리고 뒤이어 가난으로 진학을 못한 남녀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세웠으며 최초로 유스호스텔을 열기도 했다. 1976년까지 600명이 넘는 고아들을 길러서 사회로 보냈다. 남한의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고아들의 수가 줄어들자 김 원장은 “애광원”을 정신지체장애인을 보호하는 보금자리로 전환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교육을 담당할 특수학교를 세우는 동시에 그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시설을 갖추어 갔으며, 그들에게 직업 교육까지 실시했다. 그런 가운데1986년 김 원장은 정신지체장애인 가운데 상태가 극도로 나쁜 어린이들만을 별도로 수용하여 돌보고 치료하는 “민들레 집”을 개원했다. “애광영아원”이 탄생한지 25년이 지나는 사이에 고아들은 모두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하고 원내에는 정신지체아, 장애아들만 남게 됨에 따라 1978년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로 전환했다.

또한 본원에서 생활 중인 원아들 가운데 장애 정도가 너무 심한 중증 장애인들이 편안하게 살수 있는 생활시설을 갖추어 1986년에 장애인 건축 설계사인 강병근 박사의 설계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시설의 건축이 완료되었다.

“우리원에서 보육한 장애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을 믿는다. 이들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이 동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도록 기도하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노력한다. 우리는 정신지체인도 한사람의 가치있는 인간으로 살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다고 믿으며, 그들의 재능을 찾아내며 그들을 치료하고 교육하면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개선되도록 최선의 정성과 노력을 다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의 생활과 작업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재활 할 수 있도록 기여한다. 그들이 정상인보다 더 나은 생활환경에서 살수 있도록 노력한다. 우리는 장애인에게 베푸는 사랑의 양보다 더 많은 영혼의 사랑을 그들로부터 되돌려받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김 원장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여기서 김 원장의 정신지체인 보육에대한 그의 입지(立志)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현실로 보면서 우리 기장 선교의 현장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 50주년이 되는 해는 희년의 해이다. “약속의 새 땅에서 하나 되어” 라는 주제를 통해 분열, 갈등, 미움, 원망, 불신이 말끔히 사라지기를 바라는 “화해의 해”이기도 하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다 개인이다. 그들 모두는 용모와 개성과 인사에 있어서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함 속에서도 하나의 일치된 목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일”이다. 기독교는 구원과 해방의 복음을 화해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하고 증언한다. 애광원의 50년사는 기장 50년의 희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애광 신앙공동체는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낱말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낱말들은 그 의미가 새롭게 구체화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은혜, 성육신, 공동체, 화해 등이다.

은혜(Grace)는 인간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시작이 되는 수용(Acceptance)과 동참(belonging)의 경험이다. “은혜”라는 말은 내가 더불어 살수 있는 자아를 내게 주고 있는바 이는 있는 그대로 용납되어진 자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오직 은혜로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오직 은혜로 인간이 치료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에 있던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접근 없이는 치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은혜라는 말이야말로 사람의 여정을 위해 참으로 소중하다.

성육신(Incarnation)은 이 땅에서 사는 우리가 세계의 고통 속에 자신들의 삶을 밀어 넣음으로써 세상과 관련시키지 않으면 이 말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는 것 같다. 한 예를 든다면 얼마 전에 TV프로그램에서 안락사에 대한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미국 뉴저지의 한 법정에서 이 안락사 문제가 생생한 화제 거리가 된 것을 보았다. 그 토론회에 유명한 크리스챤 버나드(Christian Barnard)박사가 안락사의 윤리에 관해 한 말은 주목할만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환자의 생명을 계속 연장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삶에 연장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수긍할만한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패널 토의에 참여한 한 간호사가 그의 말을 잠간 멈추게 하면서 말을 하였다. ‘박사님 저에게 한 가지 말해 주십시오. 저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의사가 오기 전에도 환자 곁에 있고, 의사가 떠난 다음에도 환자 곁에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거기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안락사에 대한 박사님의 관심하는 바가 진정으로 환자를 위한 일입니까 아니면 플러그를 빼 버림으로써 환자의 고통에 개입하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종종 고통 받는 자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입원실 방부제 칸막이 뒤에서 사람들을 죽어가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족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집에서 임종하길 원한다. 임종에 참여한 가족들은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고통을 받는 듯하다. 무엇인가 아주 아름다운 일이 그곳에서 일어나며 세상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가 일찍이 하신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이 사람들의 깊은 상황 속에 몸담고 그들에게 고통을 함께 하려는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할말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애광원에서 들은 말을 전한다. “나의 형제는 지켜 주는 보호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를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애광원”의 애환(哀歡)이 담긴 감동적인 말이었다.

공동체(Community)라는 의미를 가져 본다. 우리는 일대일로 보살피는 관계(an one-to-one caring relationship)로는 원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결코 영속적 일수 없으며 한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펴는 돌봄의 사역이 진정한 공동체의 발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 세상은 진정한 공동체를 갈망하고 있다. 공동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친교의 성격을 넘어서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사람의 짐을 같이 져주고, 삶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공동체라고 말한다.

화해(Reconciliation)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분열된 세상에서 찢어진 마음을 함께 싸매는 화해의 사역을 우리가 힘쓰지 않는다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되고 지역, 세대간 정치간 갈등 구조와 빈부의 격차, 이 모든 것들은 화해로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만일 화해가 그곳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광원”하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기능 혹은 능력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한 장애공동체인 것을 알게 되면서 생각해 본다. 장애인은 엄연한 우리사회구성원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한된 기능이나 능력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때문에 살아가는데서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애인도 똑같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의 생명과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장애인 문제는 모두의 문제이며 함께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그리고 사람들은 장애인들에 대하여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회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애광원 창립 초기부터 김 원장은 자신의 능력과 시간의 십일조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 하였다고 한다. 세계적 규모의 조선(造船)시설들이 들어선 거제도는 전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대도시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곳에도 가정 법률적인 봉사사업이 절실히 필요해졌다. 김 원장은 1988년 제헌절을 앞둔 7월 7일에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거제지부를 장승포에 세워 초대소장직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1989년 8월 31일에는 제39회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아시아의 노벨 평화상이라는 영예로운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지도부문의 수상자로 뽑히게 된 것은 정신지체장애인 재활시설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섬주민의 복지 증진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 온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또한 김 원장은 1994년 3월 삼성복지재단으로부터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애광원의 이사장인 신익호 목사는 “사랑에는 기적이 따른다”는 말과 함께 두 바퀴가 서로 협력하여 나란히 구를 때 수레가 앞으로 나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서로 나란히 살아가도록 만드셨다고 하면서 경영자와 노동자, 기성세대와 젊은이, 건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이 함께 나란히 살 때 아름다운 화해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애광원 방문을 통하여 기장의 샬롬 선교에 대한 이해와 사회복지 차원의 복지가치를 절감하고 새로운 의미로 교훈을 얻었다.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라 가치관도 변화되고 있는데 이런 변화를 적절히 수용해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서구 사상의 급격한 유입으로 기존 가치관의 변동은 물론 이러한 수용 과정에서 다소 혼란이 야기된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부적절한 가치는 배제되어야 하지만 바람직한 가치는 계속 전승시켜 나가야 한다. 사회 복지의 관점에서 상부상조 인간존중 등의 가치관은 계승. 발전 시켜 나가야하며 평등사상, 복지사상, 효율성 등의 가치관은 적절히 수용하여 토착적인 가치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계승해야 할 토착적인 사회복지와 가치관은

첫째, 인간 존중의 사상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두 번째는 상부상조의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치관으로서 현존 사회복지의 가치체계에도 잘 반영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자유와 평등사상이다.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자유와 평등은 사회복지체계의 초석이다. 이것은 국가 존립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떠한 구속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반면 사회적인 측면에서 타인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에 침해하지 않는 의무를 지닌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사회 복지 체계의 핵심적 기반이 된다.

네 번째, 복지국가주의 이후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복지 체계의 기본적인 이념이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국민의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지국가주의는 개인적 자유와 평등의 이념 간에 갈등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인 생활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며 중요한 가치영역이다.

다섯 번째, 국가적 효율성의 가치이다. 국가가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서 지속적인 발전과 번영을 이뤄 나갈 때 국민 각자의 복지 증진도 동시에 실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60년대 초기에 절대 빈곤으로부터 해방을 지향하면서 시작한 경제개발정책으로 상당한 경제적 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적 계층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다양한 사회문제가 야기됨으로써 국가적 차원의 낭비와 비효율성을 증대시켰다. 따라서 미래 지향적인 사회복지 정책의 수행으로 국민들에게 최저생활 수준을 유지시켜 주는 동시에 국가적 효율성을 높여 다시금 국민의 복지증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토착적인 사회 복지의 가치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한국의 교회 그리고 교인들은 장애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며,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알게 된다. 첫째는 자선적 입장이다. 흔히 장애인을 위한 행사가 있게 되면 불우한 장애인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자는 식으로 차등 의식적 사고방식이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선적 장애인관은 장애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혜적 입장이다. 이것은 자혜를 베푸는 자가 스스로의 선심을 과시하기 위해 하는 행위로 큰마음 먹고 혜택을 베풀어 준다고 하는 일반인의 우월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세 번째는 장애인을 방치해 두면 빈곤, 범죄, 윤락행위, 유전 등 사회적 문제의 요소가 많기 때문에 다분히 사회 방위적 입장에서 장애인의 인권에 제한을 가하면서 일정한 사회적 시책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네 번째는 장애인 가운데 그나마 사회적 유용성이 있는 자에게 일정한 정도의 교육이나 복지 등이 간구되어야 한다는 식의 사회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하면서 장애인 문제에 접근할 때 몇 가지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는 인권 존중의 사상이다. 장애인 한사람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인권 존중 사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애인에게도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인권 보장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는 생명 존중 사상이다. 장애인도 하나의 존재로서 그의 생명이 존귀한 가치가 있으며 삶의 권리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전인격의 존중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보는 시각은 장애를 통하여 그 사람 전체를 장애인으로 고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장애라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닌 신체의 일부이며 건전한 신체의 한 부분에 더해진 하나의 특징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네 번째는 정상화의 존중이다. 이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보통 생활환경 속에서 정상의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상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등 의식의 존중이 필요하다. 이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와 교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애광원” 방문을 통하여 얻은 교훈이다.

이것은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기 위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장애인이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이다. 교회는 장애인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다정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며 돌봄과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물질적인 도움도 필요하겠으나 노력 봉사를 통한 정신적 정서적 도움이 필요하다. 장애인 복지사업에 자원 봉사자로 참여 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 장애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이것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 그것은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한 지체의 아픔이 몸 전체의 아픔일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이며 신앙적인 태도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간다. 한 생명으로서 이 세상의 삶을 누리고 생활해 가는 데,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한다. 하나는 생활의 형식, 혹은 형태라고도 한다. 즉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느냐고 하는 자기의 지위나 직업에 관한 면이다. 또 하나는 생활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 직업을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느냐 하는 면이다. 그래서 생활의 형식과 생활의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면 중에 생활의 형식이나 형태만을 생각하고, 직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 거의가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을, 내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육신의 도모를 위해서, 내 육신이 건강하기 위해서, 직업이라고 하는 것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하면,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를 맞춰 가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그런 경제관에서 일치될 줄 안다.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공급하면, 그 공급된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보수를 받게 되고, 한편 그 공급자는 그 돈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된다. 이것이 경제의 원칙이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경제적인 원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우리의 생활의 형태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고독의 축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우리의 생활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겠다. 행복하게 되고 싶다는 소원이 있다면, 행복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가져야만 한다.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게 주어져 있는 현실, 좋든지 나쁘든지 그 현실에 충족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컨대 물독은 물을 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꽃병은 꽃을 꽂아놓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에 대해 충족한 마음을 가지면, 어려운 일이나 즐거움이나 상관없이 나에게는 행복이 된다는 사실이다. 거지같이, 자기의 부모에게 받았던 좋은 재산을 모두 분토와 같이 버리면서, 거지의 생활, 청빈의 생활을 했던 프란체스코의 삶, 그 삶은 예수의 삶이었다. 프란체스코는 항상 충족할 줄 알고 만족할 줄 알고 살아왔다. 이것이 고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이면서도, 하나님 앞에 “아멘!”으로 순종하고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에 대한 김재준 목사님의 찬탄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겠느냐” 하는 말에 대치해서, “아, 축복받은 고독이여!”라고 ‘새사람’지에 그렇게 씌어 있다.

“아, 축복받은 고독이여!” 이 실존의 흔들림에 충족된 삶은 믿음의 고백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안심하라. 아, 축복된 고독이여! 제3일 후에는 우리가 승리하리라!”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사순절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이다. 결론은 골로새서 1장 24절의 말씀으로 가름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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