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여 주님의 길을 따르라 / 마 16:21-28

  • 잡초 잡초
  • 401
  • 0

첨부 1


제목 : 성도여 주님의 길을 따르라
본문 : 마태복음16:21-28 


이신구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시절에 즐겨 부르던 복음송 중에 "예수쟁이 나는 참 예수쟁이 예수쟁이지"라는 찬송이 있었답니다. 그분은 그 찬송을 부를 때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 '쟁이'라는 말을 붙이면 그리 좋은 말이 아닙니다. 심술쟁이, 욕심쟁이 등 사람을 낮게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쟁이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쟁이는 '예수에 미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도 그분은 예수쟁이라고 불러도 좋더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낮은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크리스찬'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래서 천'하다'라는 말로 새겨듣는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래서 천'한 길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래스 천'한 길, 그 길을 바로 우리 크리스찬 예수쟁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찬은 '그래서 천'한 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크리스찬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1. 주님 가신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복음성가에 '주님 가신 길'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 길, 지치신 주님의 음성,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허리엔 굵은 창 자국, 손과 발목 다 찔리신 지치신 주님의 모습, 마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 피로 찌든 십자가 위에, 하늘 향해 호소하시는 버림받은 주님의 영혼." 주님 가신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를 보여주는 찬송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도 주님께서 가신 길은 고난의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길은 고난의 길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이후에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길이 고난의 길임을 드러내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길은 영광 받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진리를 위하여 살면서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목요일에는 목동회 회원들이 화성에 있는 원천교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 교회는 방주처럼 배 모양으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더 특징적인 것은 예배당 정면에 있는 십자가를 비스듬히 걸어 놓았습니다. 그 교회를 섬기는 정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십자가는 구경하라고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성도의 길임을 생각나게 하려고 비스듬히 세웠다고 합니다.

주님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길에서 영광을 구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타고 다니려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얻을 영광을 생각하고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 그들만이 그렇겠습니까? 우리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2.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베드로도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하였으나 주님의 길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말씀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항의하였습니다. 2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미숙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붙들고 간하였다는 말은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간하매'는 '명령하매', 또는 '꾸짖으매'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주님을 따르는 자신들의 장래가 걱정돼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분명 궁금해서 여쭈어 본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사정한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자신의 의도와 다른 예수님의 생각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에 청하여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23절).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금방 사단이라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일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일은 개인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영광을 구하다가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3.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또한 주님은 주님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아멘. 주님을 따르는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주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아무나 오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렇게나 주님께 갈 수 없습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격식이 있습니다. 누구나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나 원칙을 따르지 않고는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함', 또는 '자기와 관계없다고 함'을 뜻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보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몸도 주님의 것입니다.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전부 수도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신 삶은 최선을 다하여 살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는커녕, 주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여,' 주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영광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사람들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다가도 자신의 삶의 안일을 위하여 주저앉고 맙니다. 이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4. 육신의 목숨보다 영생을 사모하라

그리고 주님을 따르려면 육신의 목숨보다는 영생이 소중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25-26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아멘. 육신의 목숨과 영생의 목숨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25절에 두 번 나오는 '목숨'은 육신의 목숨입니다. 그리고 26절에 두 번 나오는 '목숨'은 영생을 뜻합니다. 육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온 천하를 얻으려는 삶으로서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육신의 삶을 포기한다면 영생을 얻습니다. 육신을 위하여 살다가 영생을 잃을 것인가, 아니면 육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영생을 얻을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영생의 소망보다는 현실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사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속세를 떠나라는 말도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지 말고 진리를 위해 고난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올바른 삶을 살자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육신의 목숨과 영생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있습니까? 물론 육신의 목숨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육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영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되 육신의 목숨이 영생을 준비하는 삶이 되게 하십시오. 육신의 목숨은 7-80년의 문제요, 영생은 영원한 문제입니다. 잠시 동안의 육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하여 살다가 죄를 짓고 영생을 잃는다면 곤란합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더라도 진리를 위하여 살다가 영생을 얻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5. 고난 뒤에 영광이 있음을 믿으라

그런데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실은 고난 뒤에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주님께서 고난 뒤에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성도들도 영광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각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수고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땅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하늘에서 큰 영광을 얻는 길입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수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이 땅의 수고를 갚고도 남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하늘 영광을 얻은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큰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느 날 무디는 설교를 마치고 교인들에게 숙제를 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2절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구절을 주며 일주일동안 깊이 생각하라는 숙제였습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명절에 특사로 죄수 하나를 사면하는 전례에 따라 빌라도와 예수 중에 누구를 사멸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는데 사람들은 빌라도를 선택했습니다. 영생을 보증하는 그리스도를 버리고 현세에 도움이 되는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냐?" 무디는 이 구절로 신앙결단을 촉구하는 숙제를 던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숙제를 풀어 보십시다. 옛날 군중들처럼 현실에 유익을 주는 바라바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육체의 안일을 택할 것인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 것인가?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