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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영원하다 / 고전 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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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사랑은 영원하다
고린도전서13:8-13           
성덕중앙교회 (신동신 목사)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사랑은 언제까지나

  오늘 말씀의 주제는 사랑의 영원성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중단되지 않는다", "끝이 없다", "영원하다", 그런 뜻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다양한 번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harity (love) never fails"(AV,NIV)  "love never ends"(RSV)  love does not come to an end" (JB)  "사랑은 가실 줄 모릅니다"(공동번역)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현대인의성경)  "사랑은 영원합니다"(새번역) 
  사랑은 超時間的인 가치와 효력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의 가치와 효력은 변치 않습니다.  사랑은 정금과 같습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화폐는 미국의 달러화입니다.  그러나 이 달러화의 가치도 미국의 상황에 따라서 오락가락 합니다.  미국 경제가 흔들리거나 국제 정세가 좋지 않으면 달러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달러를 팔아서 금을 삽니다.  금은 불변 가치의 상징입니다.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사랑의 가치는 불변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사랑은 영원한 테마입니다.  문화, 예술, 경제, 정치, 사회...그 모든 것에 사랑은 중심 주제입니다.  사랑은 인간에게 삶의 동기를 제공합니다.  생명을 줍니다.  기쁨을 줍니다.  만일 사랑이 없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겁니다.  주님께서 말세의 징조로써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인간의 마음에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종말이 옵니다.  과학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경제 때문이 아닙니다.  군사력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어서 인류가 망합니다. 

  본문은 사랑의 영원성을 알리기 위해서 다른 은사들과 비교합니다.  사랑에 비하면 다른 은사들은 지극히 한시적이요, 부분적인 의미 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가치와 미래의 가치

  세월에 따라서 모든 것의 가치는 변합니다.  세상에서 가치는 시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것을 해마다 써서 학교에 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이런 것들입니다.  신문을 보는가?  라디오가 있는가?  책상이 있는가?  자택인가?  남의 집인가?  부모님 학력이 어떻게 되는가?  요즘 같으면 웃기는 일입니다.  그 당시는 라디오 있고 신문 보는 집이면 살림살이가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 라디오나 신문, 책상 정도는 거지들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사물의 가치가 변합니다.  요즘 소금은 눈 오는 날 길에 뿌릴 정도로 흔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소금은 문자 그대로 "흰 금"이었습니다.  콜럼버스 시대에 후추는 금값이었습니다.  탐험가마다 후추를 얻으러 東으로 동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널린 게 후추입니다.  요즘 주식을 투자하거나,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정보는 곧 돈입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정보들은 시간이 지나면 쓸 데 없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들도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면 다 無價値해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말씀에 몇 가지 나옵니다.  8절 말씀 하반절을 보세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 방언, 지식!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은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사들을 "폐하고...그치고...폐하리라" 했습니다.  "폐한다"는 말은(καταργειν) "제거된다"(be abolished), 혹은 효력이나 기능이 "정지된다"(inoperative)는 뜻입니다.


  첫째로, 예언의 가치 변화 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하는 사람은 최고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예언은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풀어주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 보십시오.  일이 다 이루어졌는데 무슨 예언이 필요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다 아는데 무슨 해석이 필요하겠어요.  천국에 가면 예언의 은사는 용도 폐기됩니다. 

둘째로 방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행세하던 사람들이 바로 방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다양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큰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모든 언어는 하나로 통일됩니다.  누구나 다 언어의 능력이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말 잘하는 것 때문에 대접받는 일은 없습니다.  거기서 무슨 방언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모든 방언은 다 폐지되고 없어집니다. 

  셋째로, 지식의 은사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헬라인들은 보편적으로 지식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효능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식들은 극히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다 "쪼가리 지식들"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9-10절)  모든 것이 "부분적"(μερουσ, in part)일 뿐입니다.  총체적이고 완전한 지식이 전혀 없어요.  과거의 과학자들은 天動說을 믿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줄 알았어요.  地動說을 알게 된 것은 한 참 후의 일입니다.  질병이 細菌에 의해 전파되고 바이러스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극히 현대의 일입니다.  素粒子에 대해서, 遺傳子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이런 지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중력, 전자기력, 운동 에너지, 소립자의 구조, 물질에 작용하는 에너지, 화학의 법칙들, 생물학의 법칙들, 수학의 법칙들, 천체의 움직임, 생태계의 존재 방식, 지구 환경에 관한 지식, 경제 이론... 모든 것이 部分的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새로운 학설과 이론이 나옵니다.  통합된 이론이 없어요.  물리학과 생물학이 다른 분야입니까?  전자기학과 기계공학이 다릅니까?  우주는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모든 것이 통합되어 움직입니다.  따로따로 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다릅니다.  같은 정부 부처끼리도 정책을 놓고 서로 싸웁니다.  통합이 없는 부분적 지식!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쪼가리 지식"에 얼마나 많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질병이 극복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대형 사고 없는 세상에서 살고싶어 합니다.  분쟁 없고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범죄 없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대 지식이 인류를 구해줄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2050년까지 에이즈 사망자는 무려 4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콜럼비아 우주선은 공중에서 폭발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신병자 때문에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고 수 백 명이 죽었습니다.  김정일 한 사람 때문에 온 민족이 위험에 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지식도 인류를 불행에서 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서 지금의 지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적 지식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이 얼마나 됩니까?  천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부활의 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천국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 움직입니까?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천국에 가서 완전한 지식을 알게 된다면 현재 아는 것들은 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  천국은 모든 삶이 선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그 때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쪼가리 지식들"은 용도 폐기됩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요.  "완전한 것"(τελειον)이 왔는데 불완전한 "부분적인 것"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단언합니다.  방언은 "그치고"(cease, be stilled), 예언은 "폐하고"(fail, be abolished), 지식도 "사라진다"(vanish away, pass away)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가치입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초점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가치는 시대와 역사가 변해도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  사랑의 가치는 무한하다! 


천국에서 사는 방법

  천당에 가면 어떻게 살아갈까요?  매일 골프나 치면서 즐길까요?  아니면 매일 잔치하면서 먹는 즐거움으로 살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삶의 풍요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금으로 도로 포장한 곳입니다.  진주로 건축 자재를 삼는 곳이예요.  물질의 풍요로움은 별로 주목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천국의 윤리성, 혹은 내면의 성숙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천국은 성숙된 자들의 곳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린애 같은 짓을 많이 합니다.  "말하는 것"(speak, talk)이 어린애 같습니다.  자랑하고, 잘난척하고, 교만하고,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도대체 말 같지 않은 말들만 합니다.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마세요.  지금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깨닫는 것"(understand), "생각하는 것"(thought, reason, argue)도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망하는지 흥하는지 몰라요.  사는지 죽는지 몰라요.  잘 때인지 깰 때인지 분간 못합니다.  고개를 숙여야 되는지 쳐들어야 되는지 모릅니다.  무슨 행동을 해야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천국에서는 어린애 짓을 다 버립니다.  비로소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불이나서 집을 태워버렸다"(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이반 시체르바코프는 평범한 농부입니다.  위로는 천식으로 6년째 누워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고, 아래로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째는 장가들었고, 둘째는 약혼을 했고 셋째는 미혼으로써 다 한 집에 살았습니다.  아내는 이바노바로써 평범한 주부입니다.  살림 형편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가 부지런히 일을 했기 때문에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말이나, 소, 양과 같은 가축도 있었고 농지도 꽤 있었습니다.  이반의 이웃에 고르제이 이바노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가브리엘이었고 그 가족들 역시 농사꾼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아버지 시대에는 두 집안이 한 가족처럼 지내면서 물건을 나눠 쓰고 사이 좋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반의 며느리가 기르는 닭이 울타리를 넘어가서 가브리엘의 집 마당에 알을 낳은 것입니다.  이반의 며느리는 가브리엘의 집으로 가서 계란을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바노프의 부인이 나와서 기분 나쁜 대답을 했습니다.  이말 저말 하다가 "우린 달걀을 모으려고 남의 마당에 들어가진 않아!"  이 말이 발단이 되어 말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의 마누라가 뛰어나와 가세했고, 이반의 여자들, 이웃 사람들까지 가세했습니다.  왕년에 어떤 물건들을 빌려다가 망가뜨렸다는 둥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가브리엘, 이반, 아들들까지 뛰어 들어 서로 잡아당기고 치고 받고 싸웠습니다.  마침내 이반은 가브리엘의 턱수염을 한 줌이나 뜯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뜯긴 수염을 증거물로 이반을 고소했습니다.  이래서 두 집안의 싸움은 법정 싸움으로 계속됐습니다.  벌금도 내고 구치소에 수감도 되면서 계속 싸웠습니다.  그렇게 7년이 지날 무렵 어느 결혼식에서 이반의 며느리가 가브리엘이 말을 훔쳤다고 비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가 난 가브리엘은 이반의 며느리를 걷어찼고 이반은 이 일로 가브리엘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서 笞刑20대의 처벌을 얻어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한 가브리엘은 이반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 때에 이반의 아버지가 심각한 태도로 타일렀습니다.  "싸움은 쌍방의 책임이다.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  네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빌고 화해해라!"  그러나 화해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가브리엘은 이반의 집에 불을 놓았고, 숨어서 망을 보던 이반은 불은 끄지 않고 불지른 가브리엘을 쫓아가다가 집은 불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이반의 집뿐만 아니라, 불지른 가브리엘의 집과, 마을의 절반을 태워버렸습니다.  이반의 아버지는 화상으로 죽어가면서 유언을 합니다.  울부짖는 이반에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죄냐?  하나님 면전에서 대답해 보라!  이것이 누구의 죄냐?  이제 네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지금 네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오직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  가브리엘이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덮어줘라!  그리고 전처럼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같이 잘 살게 될 것이다!  이반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가브리엘을 용서하고 덮어줬습니다.  가브리엘도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집을 다시 지으면서 서로 돕고 서로 조심하면서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결국 계란 한 개로 시작해서 7년 동안 싸우고, 농사일 접어두고 법원에 왔다갔다 하느라고 재산 날리고, 집과 재산을 불에 태워버린 후에 원 위치로 돌아온 겁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사는 모습들을 보면 다 이와 같습니다.  계란 하나 때문에 집을 불태운 이반과 가브리엘 같습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경쟁하고,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 하고, 내 자식만 잘 된다면 남의 자식 열 명이 죽어도 좋고, 그러다가 서로 망합니다.  천국은 어른들이 사는 곳입니다.  성숙된 곳입니다.  그 성숙의 표시가 바로 사랑입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유지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곳이 천국이 되려면 서로 사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구두장이 사이몬입니다.  그는 매우 가난한 구두장이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한 농가에 세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가난해서 다 떨어진 羊皮 외투를 마누라와 함께 입는 처지였습니다.  어느 날 근근히 모은 3루불과 외상 값으로 받을 5루불 20코페이카를 합쳐서 양피 외투를 사려고 마을로 갔습니다.  그러나 외상 값을 받지 못해서 외투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홧김에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예배당 벽에 알몸으로 기대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합니다.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그가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심에 찔려서 다가갑니다.  옷을 벗어서 그에게 입히고 집으로 데려 옵니다.  집에 오니 마누라 마트료나가 푸르둥둥합니다.  외투는커녕 술냄새를 풍기면서 거렁뱅이 하나를 데려 왔으니?  다음날까지 먹으려고 남겨둔 빵 한 조각 밖에 없는데 거렁뱅이를 데려 오다니!  그러나 문득 그 젊은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에게 수프와 빵을 주었더니 젊은이는 빙긋이 웃으면서 먹었습니다.  젊은이는 이름이 미하일이란 것 밖에는 신상에 관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 잠자리에서 마트료나가 남편에게 질문합니다.  "우린 항상 베푸는데 왜 남은 우리에게 베풀지 않을까요?"  다음 날부터 미하일은 사이몬의 집에서 구두 만드는 견습공이 됩니다.  가죽을 재단하고, 자르고, 꿰매는 일을 삽시간에 배웠습니다.  일년이 못 되어 미하일의 재능은 곧 널리 알려지고, 사이몬은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어느 겨울날 상당히 지체 높은 사람이 마차를 타고 구두를 맞추러 왔습니다.  그는 가장 비싼 가죽을 맡기고 일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장화 구두를 만들어 놓으라고 주문한 후에 돌아갔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에 미하일은 뜻밖에도 장화를 만들지 않고 장례식 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사이몬이 깜짝 놀라 뭐라고 하는 사이에 주문한 사람의 하인이 헐레벌떡 와서 주문을 바꿨습니다.  장화 대신 시체에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주인이 갑자기 마차에서 내리다가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미하일이 사이몬과 함께 한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부인이 딸 쌍둥이를 데리고 구두를 맞추러 왔습니다.  미하일은 그 아이들을 보자 깜짝 놀란 듯 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여자는 실상 친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벌목을 하다가 나무에 깔려 죽었고, 엄마는 그 사흘 뒤에 딸 쌍둥이를 낳고 죽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웃에 살았는데 아이들의 집에 갔다가 엄마가 죽고 아이들만 남은 것을 보고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자기 아이도 하나 있었는데 일찍 죽고 쌍둥이만 남아서 양녀로 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간 후에 미하일은 갑자기 사이몬과 마트료나 부부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신들도 나를 용서하십니까?"  이 무슨 말인가?  사실 미하일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던 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여인의 영혼을 데려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가서 보니 그 여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를 데려가려 할 때에 아이의 엄마가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내가 떠나면 아이들은 누가 돌아봅니까? 

아버지도 없고, 친척도 없고!  그래서 천사는 그냥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차마 그를 데려오지 못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다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혼을 데려 오라!  그러면 너는 세 가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첫째로, 사람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로,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셋째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와 함께 천사는 날개가 부러지면서 땅에 떨어졌고 미하일이 되어 사이몬의 집에 5년 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하일은 사이몬과 함께 하는 동안 단 세 번 웃었습니다.  그 세 번은 하나님께서 주신 질문의 해답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첫 번째로 웃은 것은 마트료나가 미하일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줄 때였습니다.  사이몬이 자기를 집으로 데려올 때, 마트료나가 화를 내면서도 미하일을 불쌍히 여겼을 때, 그는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로 웃은 것은 지체 높은 사람이 구두를 맞추러 왔을 때였습니다.  그는 일 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 구두를 원했지만 실상 그는 돌아가는 길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미 그 사람의 뒤에 죽음의 천사가 머물고 있는 것을 미하일은 보았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즉, 사람은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미하일이 세 번째로 웃은 것은 쌍둥이를 데리고 온 엄마가 애들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보살핌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살며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며, 그 사랑이 인간을 살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은 성숙의 표시입니다.  모든 것을 흉내낼 수 있어도 사랑은 흉내내지 못합니다.  사랑은 돈 위에 있습니다.  사랑은 권력 위에 있습니다.  사랑는 지식 위에 있습니다.  인간의 최고 품위는 사랑으로 결정됩니다. 

어제 여론 조사를 보니까 품위 유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첫째가 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 사는 한심한 인간들의 한심한 대답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정말 보기 싫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품위 떨어지는 인간들이 돈만 가지고 있는 겁니다.  품위 떨어지는 인간이 높은 자리에 앉은 겁니다.  온갖 꼴값을 떨어요.  품위는 돈이나 지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정말 품위 있는 인간은 사랑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품위를 결정하는 천국의 최고 표준입니다.  천국은 지식도 권세도 필요 없는 사랑의 왕국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중심에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정말 창조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 품위 있는 인간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  천국에 가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거는 기대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서로 사랑하는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천국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천국의 생존 수단은 사랑입니다.  천국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을 정말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누구든지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영원한 삶의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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