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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역하는 사람들 / 히 3:1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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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거역하는 사람들
  히브리서 3장 15절~19절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유를 우리에게 많이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밖에서 회자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유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바닷물과 물고기 비유입니다. 바닷물은 소금물입니다. 그런데 소금물에 사는 물고기는 전혀 짠맛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 물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패러디하면 다른 이야기로 들립니다. 소금물을 교회로 적용해 보십시오. 그리고 물고기를 성도라고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에는 매 주일마다 말씀 속에 살지만 전혀 내 자신은 말씀에 젖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김장철이 되면 어머니는 배추밭에 가셔서 배추를 많이 사오셨습니다. 그리고 낮에 그 많은 배추를 소금에 절입니다. 밤새워 배추를 소금에 절인 후에 우물에 물이 많이 고인 새벽 시간에 일어나셔서 배추를 씻습니다. 어렸을 적 기억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 어렸기 때문에 그냥 씻는다고 만 생각했지만 지금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그 배추들 가운데 밤이 지나도록 소금에 절여지지 않은 배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배추는 양념을 흡수하지 못하는 배추입니다. 때문에 김치 고유의 맛을 낼 수 없는 배추입니다. 결국 이런 배추는 김치를 담글 수 없는 배추 일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가운데 전혀 말씀에 절여지지 않은 채 맛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르쳐 고린도 전서에서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육신에 속한 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공통점은 육신을 따라 행동하고 육신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육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성경 다른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왕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제국에 군대장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때 마침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 중에 한 사람이 자기 주인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 나라에 선지자가 있는데 그 분께 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은 왕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치고 싶으니 이스라엘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많은 금은 보화와 함께 왕이 직접 쓴 친서를 손에 들려주면서 다녀오라고 허락합니다. 아람왕의 친서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면서 난감해 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로 보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데리고 엘리사가 사는 집에 도착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 때 선지자 한 사람이 오라고 했을 때 나아만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제 내 병이 나을 수 있겠구나. 우리 집 하인 아이가 나에게 말해 준 대로 선지자를 만나 내 병을 고칠 수 있겠구나 이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내 병은 고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쁜 생각을 하면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엘리사가 문 밖에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환을 시켜서 전달합니다. 요단강에 가서 7번 몸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순간 나아만이 화가 치밀었습니다.--- 11-12절

왜 나아만이 화가 난 것입니까? 나아만의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자신이 멸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힘있는 장군이요 아람 왕 다음 가는 사람이요 왕이 직접 쓴 추천서까지의 가지고 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왕도 아니요 일개 선지자에게 불과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무시한다 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자기에게 절한 다음 이렇게 위대한 분이 우리 집에 오셔서 영광입니다.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지가 자기 몸에 손을 얹고 문둥병을 고쳐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자신을 특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가 치밀게 된 나아만은 그냥 가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복음을 듣고도 치료받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문둥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 다시 말해서 나아만에게 있는 명예,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는 나의 죄성들을 먼저 복음으로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걸려 넘어져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을 고침 받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이었고 명예였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몸 하나 고침을 받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원했던 것은 애굽의 고기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영혼의 문제보다는 나에게 닥친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들고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 때 교회에서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전혀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를 하지 않으면 분노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표적을 보기 위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태도는 육적인 사람이 행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절대로 승리 할 수 없는 삶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돈 많은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돈입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할 때에만 어머니 아버지 찾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언제 돌아가실 까 점 집에 가서 점이나 치고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화투로 언제 돌아가실 건지 패나 떼고 있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화나는 일이겠습니까? 이런 자식을 둔 부모는 당연히 분노해야 합니다. 자식 잘 못 키웠다는 것을 알고 통곡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님들 보면 그것이 마치 자랑거리처럼 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까지 늙었는데도 능력이 있어서 자식 뒷바라지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 자식을 두었으면 당연히 화를 내셔야합니다. . 이런 의미에서 저는 돈 많은 분들께 권면 드립니다. 그 돈 자랑하지 마십시오. 갖다 버리세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자식들은 그 돈 가지려고 지금도 마음 속으로 살인하고 있습니다. 빨리 데려가라고 빌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나아만 장군을 보면서 진리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배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떡이나 주시고 우리는 그 떡으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다거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내 것을 드린다 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당장 우리 교회를 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일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언제인지 관찰해 보면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언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1월과 2월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지만 우리 교회 특성 상 그렇게만 해석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안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인간인 목사도 화가 나는데 하나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먹고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도 중요합니다. 먹어야 삽니다. 배불러야 공부도 하고 일도 합니다. 세상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실업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배고픈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학비가 없어서 늘 힘들어하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1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눈물을 삼키며 공부를 하고 있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남들에게 말 못하는 어려움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배부름도 주실 것이요, 기쁨도 주실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배고픔을 해결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또 주님을 찾지 마십시오. 더 멋진 자리에 앉고 싶어서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승진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이런 마음은 오늘 본문처럼 강퍅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승리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는 길은 영혼의 삶입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 죽듯이 우리의 영혼에 관심 갖지 않으면 영혼은 말라죽는 다는 것을 아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을병에 걸려 있는 우리들에게 치유하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이유는 몸이 이렇게 소중하듯이 영혼도 살펴 보라 고 하시는 하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왜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분노하게 만든 것일까요? 나아만이 화를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시 돌아가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똑 같이 대했다는 것이 그를 화나게 만든 것입니다. 다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애굽에서 어느 정도 출세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잠을 자야했습니다. 먹는 것도 같이 먹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는 나의 출신 배경이나 인종이나 사회적인 위치로 평가받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나의 학력도 구분하거나 차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일단 교회 문만 들어서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는 도덕적인 선한 행위가 많다고 해서 높임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 가운데에는 나아만처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다른 사람 보다 나은 사람들처럼 분노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의가 배설물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철학을 따라가 보십시오.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종교를 따라가 보십시오. 절대로 평강과 안식과 승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길 만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저의 이 말에 분노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저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나아만이 화가 나서 엘리사의 집에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 왔다면 그는 문둥병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복음을 거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거절하면 우리도 여전히 문둥병자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죄인인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둥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는 오직 한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는 것입니다.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한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떡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문둥병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런 사람에게 새 생명과 새로운 성품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재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아만의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의 살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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