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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일생 ③ : 믿음의 시행착오 /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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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베드로의 일생 ③ : 믿음의 시행착오
< 본 문 > 마14:22~33
< 설 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성경을 보면 믿음에 관해 언급하면서 종종 크기나 분량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크다, 믿음이 적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나옵니다. 본문 31절(중)에도 있죠. “ ...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이 외에도 여러 구절이 있는데, 그 중에 두어 개만 예로 들어봅니다.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자기 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 (마8:26, 마16:8, 마17:20 등)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볼 때 믿음에 크기 혹은 분량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커져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장에 관해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믿음의 종류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믿음에 관해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인정(=시인)하는 믿음’과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1) 인정(=시인)하는 믿음(assent) -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 ”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2) 신뢰하는 믿음(trust) -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 삶 가운데 구체적인 축복과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신뢰의 ale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가운데 아주 중요합니다. 이 믿음은 종종 순종 혹은 기도의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침상 채 내 사람에게 메워져 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의 출입문이 사람들로 꽉 막혀 있는 것을 보고서 뒤로 돌아갑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침상을 달아내려 기어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 믿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 때의 믿음이 곧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도 신뢰의 미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그 크기가 측정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커진다고 할 때는 주로 ‘신뢰의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체험하고 알면 알수록 신뢰가 더욱 커집니다. 그러면서 믿음도 커집니다. 또 이 믿음이 커질수록 우리는 예수님께 더 밀착되고, 우리의 삶은 주님의 축복으로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풍성한 축복과 승리를 맛보고 싶습니까? 이 믿음을 크게 성장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왕 신앙 생활 하는 것 정말 주님의 능력을 충만히 체험하고,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크게 성장시켜 갈 것인가? 본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믿음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점점 그 믿음이 커졌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단번에 혹은 곧게만 자라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면서 믿음이 자라기도 합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때로는 넘어져서 무릎을 깨고 또 아물고 하는 과정 속에서 온전히 걸음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믿음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그래도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면서 베드로가 어떻게 믿음의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그 믿음이 커지는가 그 과정을 보면서 피차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믿음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부활 승천하신 후 (물론 성령이 오시겠지만) 그들 스스로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하고, 더 나아가 여러 성도들을 돕는 지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큰 믿음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 美 서부 개척 시대 - 외딴 마을에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길이 험하고 맹수들이 출몰해서 아버지가 말립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학교 안 보낼 수가 없어서 결국은 아버지가 허락을 하게 되는데 ... 단, 혼자서 다니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무서웠지만 다니다 보니까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올 것이 왔습니다. 큰 곰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듭니다. 너무 두려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뒤에서 꽝! 하고 총소리가 나더니 그 큰 곰이 벌렁 넘어집니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서서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을 안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씩씩한 사내 아이로 자라기 바란다. 그래서 혼자 다니게 한 것이란다. 하지만 너를 지켜 주기 위해 내가 계속 뒤따라 다녔단다.”

주님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큰 믿음으로 무장하고 승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기 위해 훈련을 시키시는 겁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을 키워 주기 위해 세 가지의 훈련을 부여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은 잘 통과하고, 어떤 것은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붙들어 주시고 결국은 큰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본문을 잘 관찰하면 베드로와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로 가게 하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병이어 기적 이후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니까 피하시려고(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한 까닭에)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두운 밤 시간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지형의 특성 상 특히 밤중에는 돌풍이 불어와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마나 심한지 경험 많은 어부들도 벌벌 떱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제자들에게 건너라고 하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병행 구절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6: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어떤 훈련을 시키시려고 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신뢰하는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1] 동행 훈련

예수님은 지금 육신적으로 제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24절. 제자들이 배를 타고 육지에서 수 리나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대충 5km쯤 됩니다. 상당한 거리입니다. 더욱이 밤 4경이 됐습니다. 새벽3시~6시 사이입니다. 가장 어두울 때인데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으로 그들은 잔뜩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육신을 입고 계시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을 계속 주시하시면서 보호하고 계신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들과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어저 두려워하고 쩔쩔매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음을 믿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면 그것으로 OK인데 말입니다. 더구나 이와 비슷한 사건이 전에 한번 있었잖아요. 마8:23~27. 그때는 예수님이 배를 타고 주무시고 계셨는데 광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 간구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 눈 앞에 안 보이신다고 가도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전전긍긍하고 있는 겁니다. 줄곧 지켜보시고 당장이라도 도와주러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큰 믿음의 소유자는 주님이 항상 곁에 계심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안을 누립니다.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시34:15, 17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마치 어린 아이를 둔 어미처럼 늘 눈과 귀를 기울이다가 조그만 소리만 나도 얼른 뛰어가 도와주는 것과 같습니다. cf. 사41:10)
마28:20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남긴 말씀) “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
예>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 - 이교도가 우상을 보이며 “나의 신은 여기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 있소?” 묻자 이렇게 대답 ... “나의 하나님은 보여줄 수 없소.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오!”
예> 몇 년 전 미국에 사상 최악의 토네이도(tornado)가 강타하여 순식간에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만 가구의 집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여인의 생생한 간증입니다. Jen Douglas라는 여인인데,
두 아이(11살과 7살)를 데리고 다용도실로 피신하여 바람이 잦아지기를 기다렸는데 그의 집에 강타 ... 다급해진 그녀는 간절하게 기도했답니다. 한참 기도하는데 바람이 세 식구를 끌고 올라가더니 먼 거리 길바닥에 떨어뜨리더랍니다. 놀라운 것은 전혀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무서운 바람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런 생생한 믿음으로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순종 훈련

예수님이 어둠 가운데 바다 위를 걸어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러자 다들 유령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안정시킵니다. 27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 말씀을 듣고 가장 적극적인 베드로가 나섭니다. 28절. “예수님이 맞으시면 저더러 오라고 명령해 보세요. 저도 한번 해봅시다.” 놀라운 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29절. “오라!”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나중에 물에 빠져서 스타일을 구겼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베드로는 대단합니다. 제자들 중에 이런 믿음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 위로 나가 물 위로 걸어갑니다.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순종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이것만 보면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도 물 위로 걷는 겁니다.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자주 순종하다 보면 믿음이 커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체험 신앙이거든요. 순종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자꾸 순종할 담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꾸 믿음이 커지는 겁니다.
예> 아브라함 - 맨 처음에는 갈대아 우르 떠나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로다가 점점 믿음이 커지고 순종하다가 나중에는 이삭을 모리아 산 제단에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까지 합니다. 온전한 믿음에 도달한 겁니다. 물론 이거은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이삭을 살려주시고, 그후에 아브라함의 생애를 축복하시는 것을 보면 탄탄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순종하는 사람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점점 믿음이 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아울러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과 그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는 큰 축복과 승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인내 훈련

베드로는 바다 물 위로 잘 갔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았습니다. 30절. 바람을 보는 순간 그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갑니다.
그때 다행히 예수님께 부르짖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 보면 베드로는 그래도 믿음이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의 다급한 기도에 예수님도 급히 응답하셨습니다. 그의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책망하셨습니다. 31절.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잘 따라가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시선을 놓치면 여지없습니다. 우리가 혹시 잘 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도우심 때문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신앙은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큰 믿음입니다. 조금이라도 세상 바라보면 두려워집니다. 주님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세상은 너무 크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든지 혹은 두려움에 넘어지고 맙니다.

약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예> 왕상19:3~4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쳐부순 엘리야. 이세벨이 반격할까봐 그것이 겁나서 도망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 ” 하나님을 바라보던 영적 시선을 놓쳐버렸습니다. 이를 갈고 있는 이세벨을 봤습니다. 이세벨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신데 ...

큰 믿음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 당해도, 유혹이 찾아와도 인내하면서 영적인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히12:2 “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

이런 일련의 체험을 통해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크게 책망치 않으시고 그들을 용납하시고 광풍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광풍이 고요하게 가라앉자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의 훈련 과정을 100% 소화하지 못했지만 시행착오를 통해서라도 믿음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시행착오를 보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믿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에 한눈 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면서 큰 믿음으로 성장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런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큰 믿음을 소유하셔서 험한 세상이지만 늘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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