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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로운 사람 요셉 /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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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로운 사람 요셉
본문 : 마1:18-25
설교 : 박재신 목사 (양정교회)
 

  연극이나 영화에서 주연 배우가 있는가 하면 조연 배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극이나 영화의 흐름이나 진행상 필요한 엑스트라도 있습니다. 카메라의 초점은 언제나 주연배우에게 맞추어집니다. 엑스트라에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엑스트라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연 배우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필요하듯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일에 마리아가 주연 배우로 쓰임을 받았다면 조연으로 쓰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요셉입니다.
  동정녀의 중요성 때문에 요셉의 역할은 마리아의 그늘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는 감이 있지만 예수 탄생에 있어서 요셉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보고 의롭다고 하는 것 일까요?

본문에서 그의 의로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요셉은 아리따운 처녀 마리아와 정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혼하고 아직 신방도 차리기도 전에 자신의 신부인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이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분명 누군가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어떤 관용도 베풀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 사건을 처리하는 모습은 참으로 그가 참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합니다.
  본문 19절에서도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녀가 아이를 가진 이 사실을 만방에 드러냈다면 마리아의 인생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소문내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려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작게 보고 남의 잘못은 크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에 대하여 흉보는 것을 잘 합니다. 마치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남의 흉을 드러내어 화제 거리로 삼지만 그 자신도 똑같은 환경에 처하면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잠 17:9절에 보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주려는 마음이 요셉의 의로운 마음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19절의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했는데 "생각했다"는 말을 고민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라고 고민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 사건은 요셉의 입장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날로 파혼 선언하고 마리아를 율법에 고발하면 됩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볼 때 마리아의 임신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중요한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민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려 깊은 인격이고 의로움이었습니다. 요셉이 쉽게 생각했다면 마리아에게는 온갖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남을 위한 의로운 고민이 있었기에 그는 의로운 사람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 때문에 고민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고민이라고 합니다.
  남을 위한 고민은 거룩한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침착하였고 자신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베풀기 위해 고민하였습니다. 

 
  2. 말씀에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 그의 의로움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안 순간 자신과의 결혼은 틀렸지만 마리아가 수치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며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때에 고민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이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그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마리아는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가 낳을 아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파혼까지 하려했던 요셉이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마리아에 대한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동정심입니까? 물론 동정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오해를 풀고 깨긋하게 기쁨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드리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마 1:20-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것은 천사가 요셉을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사 7:14절에 이미 예언되어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그에게 먹혀 들어갔습니다.
  말씀이 먹혀 들어가는 마음은 복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도 먹혀들어가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인 사람들, 기독교인들에 대한 쓸데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말씀이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받아드리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진리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덮어놓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이해되고 이해가 되면 감동이 옵니다. 감동된 사람은 자발적 순종과 헌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헌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끼어야 합니다. 깨달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녹이려고 하지말고 말씀이 나를 녹일 수 있게 하십시오.
  기독교는 감정적인 종교가 아니라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논리와 이해를 의미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3.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마 1:24-25절에 보면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주의 분부대로....." 라는 단어입니다. 분부대로라는 말은 말씀대로 또는 지시하신 대로 ... 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주의 분부 즉 명령을 받들어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억지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헌신으로 순종했습니다. 

  첫째는 주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파혼까지 생각했던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를 데려왔다는 것은 엄청난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요셉은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둘째는 예수의 이름을 분부대로 지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였고 얼마 후에 아들을 낳고 그는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자가 지어준 대로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입니다. 그 뜻이 구세주라는 의미입니다. 뜻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하여 마리아와 요셉에게 똑같이 명령하였습니다.
  눅 1:31절에 보면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라고 했고 마 1:21절에 보면 요셉에게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라고 분부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눅 1:38절에는 마리아가 말씀에 순종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본문에서는 요셉이 주의 분부에 따라 마리아를 데려왔고 예수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알고 믿고 순종하는 의로운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되지 마십시오.
 
  의로운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일에 공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그가 취한 의로운 행위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즉 하나님의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요셉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의 너그러움이 율법적 정죄로부터 동정녀 마리아를 구해 내었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결정적으로 도왔습니다. 그가 만일 유대인들의 율법에 호소하였다면 많은 잡음이 일어났을 것이며 아기 예수의 탄생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요셉 같은 의로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남의 잘못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려 깊은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에 녹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 사회에 요셉 같은 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바로 내가 여러분이 이 의로운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만방에 전하고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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