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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 행 11:14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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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성경본문 : 사도행전  11:14 ~ 18
설교 : 박성근 목사 (영안교회)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여러분은 다음 말을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을 떠올리십니까? 보수적 그리고 자유적, 전통과 진보, 온건파와 급진파, 이 중 어느 쪽입니까? 아마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인류역사는 이 두 세력의 갈등에 의해서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보수적일까 아니면 진보적일까? 하나님이 보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얼마나 보수적이십니까? 보수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늘 변화를 즐기신다. 창조 자체가 변화요, 진보가 아닌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어둠에서 빛을 밝혔으며 흙에서 사람을 만들었다.' 얼마나 진보적이신 하나님인가!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이 모든 생각의 차이는 변화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떤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변화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느리게 변화합니다. 변화를 좋아하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싫어하는 쪽에서 보면 변질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성경적인 태도입니까? 보수입니까? 진보입니까?

  우리가 변화에 대해서 몇 가지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어떤 것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한 고대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변화 이외에는!" 시대가 다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어떤 것은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것은 반드시 변화하게 되어 있고 변화해야만 합니다.

  또한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변화에는 우리의 적응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변화란 불편한 거예요. 그러나 그 불편에도 우리는 때로 적응해야 합니다.
  한 예로 엘리베이터는 얼마나 편리합니까? 엘리베이터가 정전이 되어서 10층까지 계단으로 한번 올라가 보셨습니까? 얼마나 다리가 아픕니까?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엘리베이터도 불편할 때가 있어요. 처음 내가 그것을 작동할 줄 모를 때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적응을 거치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그것이 편리하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에는 적응이 요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변화에 대해서 알아야 할 상식 가운데 하나는 변화는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변화가 다 좋은 것인가? 아닙니다. 변화는 반드시 검증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변화를 하나님 말씀의 필터로 한번 걸러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변화인가 아닌가? 

  우리가 이 변화에 대해서 왜 그렇게 깊이 연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이 세대에 적절하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금도 놀라운 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그러면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적절하게 전할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요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그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변치 않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대한 적절한 내 자신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하지 않습니다. 요지부동이에요. 10년 전과 지금이 똑같습니다. 10년 전과 10년 후의 교회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자랑합니다. 우리 교회는 보수적인 교회라고요. 옳은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긴 변하는데 추하게 변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변질이에요. 소위 변한다고 하면서 진리에서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와 관계된 너무나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연구해야 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떤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 순간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마다 아름답게 변화되었습니다. 실패자가 승리자가 되었고, 도덕적으로 추한 자가 청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습니까? 그들 모두는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운 변화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본문은 몇 가지 방법을 진지하게 소개해 주기 원하십니다. 먼저 아름다운 변화를 위해서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대부분의 불협화음이 비본질적인 것에서 유래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본질적인 것들 때문에 싸우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가정의 문제가 그렇고 어느 단체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본질적인 것들이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들, 반드시 싸우고 지켜야 할 진리들이 있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모하다 말이죠. 오늘날 어떤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에 틀린 것이 많다고 얘기합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우리가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에 나오실 때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셨습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곧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어요. 어떤 교파의 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침례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오늘 제가 이 말을 하는데 벌써 기분 나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왜 우리 침례교회를 맨 마지막에 넣느냐! 제가 침례교 목사이기 때문에 겸손해서 그렇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교파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령님을 모시고, 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형제 자매입니다. 교파가 어느 정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침례교인이 장로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못할까요?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까? 장로교인들이 성결교회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까? 대놓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오늘날 이런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침례가 옳습니까, 세례가 옳습니까? 저는 침례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침례가 옳은 것을 믿습니다. 제가 침례교회 목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경을 읽어볼 때 침례가 더 성경적임을 개인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을 믿는 것과 세례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입니다. 저는 세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서 세례 받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침례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이 비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냐 세례냐에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이 과연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일까요? 우리가 잘 알듯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는 무악파와 악기파가 있습니다. 무악파는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할 때 악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악기를 사용할 것인가? 그래서 교파가 나누어졌습니다. 이것이 잘한 일일까요? 우리는 악기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악기를 어디까지 사용해야 합니까? 피아노와 오르간만 사용해야 합니까? 기타는 어떻습니까? 드럼은 어떻습니까?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까? 과연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까? 우리가 싸우는 수많은 싸움의 이면을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질적인 문제로 싸우는가, 아니면 비본질적인 이슈가 그 핵심이 되어 있는가 입니다. 

  저는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서울에서 국민일보 기자가 저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국민일보 한 면이 저의 기사로 나갔습니다. 제가 극구 사양했습니다만 21세기를 열어 가는 침례교 목회자로 소개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제가 자격이 부족합니다. 안 하겠습니다." 했지만 고집을 해서 할 수없이 취재의 첫 번째 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사진도 찍어가고 교인들도 신문에 날 겁니다. 제가 토요일이라 참 부담이 되었어요. 저는 늘 변화에 대해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얘기하는 중에 거기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 한 분 나오셨어요. 그분은 제가 얘기를 안 꺼냈는데 변화에 대해서 예화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니는데 일어난 어떤 일이었습니다. 마루바닥에서 예배를 드릴 때 까는 방석을 만드는 데 교회에서 굉장한 논란이 있었답니다. 추운 겨울이므로 방석을 만들어 그 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그깟 한 시간을 못 참아서 방석을 깔고 앉는단 말이냐! 꿇어앉아 드려야지!" 그래서 그 방석 하나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답니다. 나중에는 다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의자 문제가 나왔어요. "의자를 놓고 예배를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또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 의자라니? 하나님 앞에 꿇어앉아 예배를 드려야지! 등을 대고 예배를 드리다니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로 얼마나 많은 교회가 갈라졌고, 얼마나 많은 교파가 생겨났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쓸데없이 피를 흘리며 싸웠는지 아십니까? 왜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아름답게 변화되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이 주신 그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수많은 경우에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보수적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바꿀 수 없어요. 진리는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내용은 지켜야 하되 그릇은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오늘 이러한 면에서 실패했습니다. 비본질을 본질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본질을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아닌 그릇 때문에 그 그릇에 담긴 내용마저 다 엎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밥을 연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공기에 꼭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사는 한국인들은 접시에 밥을 먹습니다. 접시에다 밥을 먹으면 편리한 것이 많아요. 왜? 한쪽에 밥을 담고 그 옆에 반찬들, 즉 김치도 찢어 먹을 수 있고 내가 반찬을 마음대로 뒤척일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편한 것은 설거지하기가 쉽습니다. 씻기가 정말 편합니다. 

  잔칫상 차릴 때 꼭 공기를 놓아야 하겠습니까? 그 안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그릇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릇 때문에 내용마저 엎어버리는 싸움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지요. 여러분의 가정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살펴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도 불편해 하고 있습니까? 본질입니까? 아니면 비본질적인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종종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이었어요. 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느냐고 바리새인들은 늘 예수님께 못마땅해 했습니다. 왜? 안식일은 쉬어야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법을 만들어 놓고 지팡이를 끌고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지팡이를 질질 끌고 다니면 거기에 골이 생긴다는 겁니다. 안식일 날 499미터는 가도 되지만 500미터 넘는 순간 그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안식일이라도 500미터밖에 나가야 되겠는데,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집 문에다 실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허리에 실을 매달고 500미터 바깥을 벗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너 500미터 바깥으로 나왔잖아, 너희 집에서!"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고, 이 줄을 보라고 내가 지금 우리 집에서 아직도 묶여 있다고 했습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일주일 내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된 일에 전념하지만 특별히 한 날 정해놓고 그 날만은 하나님만을 기억하라,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라.' 이것이 안식일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본질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간 곳 없고 비본질적인 것들만 가지고 안식일을 논쟁했습니다. 몇 Km를 가야 하는가. 안식일에 자장면을 사먹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 버스를 타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주일날 과연 우리가 쇼핑을 할 수 있는가, 아닌가. 오늘날도 이런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손을 씻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왜 손을 씻습니까? 위생적인 문제입니까? 영적인 청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을 아셨습니다. 매번 식사를 앞두고 내 손을 씻을 때에 내 마음을 씻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은 씻지 않고 의식만 행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일부러 그러한 의식이라면 행치 않는 것이 낫겠다 라며 부딪혔습니다.
  마지막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로 마땅히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주님께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괜히 교제가 막혀 있고, 어떤 문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기억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물음을 던져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사람과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일이 과연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고집과 전통, 비본질적인 것들 때문입니까? 진리 때문이라면 등을 돌려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면 오늘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잡고 고집할 때 우리 주위에 수많은 상처들이 생겨나고 우리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변화가 생겨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합니다. 본질은 보수적이 되어야 하고, 비본질에는 개방적이 되어야 합니다.



  2. 제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제도주의! 우리 인간은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제도화되기 쉬운 존재입니다. 율법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형식에 빠지기 쉬워요. 이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우리 자신을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내용은 간 곳 없고 나중에는 그릇만 남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목적으로 시작했던 한 단체가 내용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교회가 그렇습니다. 이 교회라는 것도 날마다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가보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어요. 어떤 교수님이 제게 부탁한 말씀이 "절대 오래된 교회에 가지 마라!"였습니다. 제가 불순종했어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많이 변화한 줄 믿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래 믿은 신앙이 위험할 수 있어요. 이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제도화되기 쉽다는 겁니다.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가 본문에 나타납니다.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서 이방인들과 부둥켜안으며 놀라운 교제를 했습니다. 그의 평생에 먹어보지 못한 삼겹살 구이를 먹고 입에 채 기름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달려온 거예요. '아, 이 기쁜 소식을 형제들에게 전해야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셨구나! 이제 우리에게 부정한 음식은 없구나! 내가 삼겹살을 먹어봤더니 얼마나 맛있던지...' 이런 마음으로 그는 달려왔습니다. 

  베드로가 담임목사요 지도자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눈초리가 이상한 겁니다. 다 굳어 있습니다. 그 눈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웬일일까? 그 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에 거품을 품고 얘기합니다. "베드로여, 회개하시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자유주의자요? 그 단에서 내려오시오! 더 이상 설교할 자격이 없소! 베드로 당신은 변질했소! 어떻게 불신자와 같이 삼겹살 구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르지 않겠소!" 간단한 말로 지나갔지만, 이 사건이 그 당시 교회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음을 사도행전 15장은 연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남을 함부로 쉽게 비판하게 됩니다. 왜? 제도주의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의 동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이미 교과서가 있습니다. 규칙 제한이 있어요. 헌법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법에 어긋난 사람은 무조건 틀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함부로 남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비판하게 된다고 본문은 지적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손가락에 찔려 상처를 받아왔는지 모릅니다. 부모님들 밑에서, 선배 교인들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 받으며 마음 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한 제도주의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겁니다. 

  저의 은사 중 한 분인 진 겟츠라는 유명한 교육학자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그 개인과 단체에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가를 언급하시면서 7가지 특징을 얘기했습니다. 먼저 제도주의에 빠지게 되면 사람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업이 중요하지 부부관계나 자녀가 중요하지 않아요. 항상 일이 먼저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특성과 창조성이 완전히 말살됩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에서 우리 사회의 병폐를 지적했어요. 유교문화가 준 병폐! 여기에서 유교는 제도주의라는 겁니다. 그 결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고 개인의 특성이 부각되지 않았어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보다는 위협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론을 제시할 수가 없어요. 함부로 질문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어른 앞에 반대 의견을 내어놓는단 말입니까? 딱딱한 구조를 가지게 되고 항상 규칙을 강조합니다. 제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서는 조직원들이 조직의 목표보다는 조직 자체를 섬기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왜 모였습니까? 왜 교회를 만들었습니까? 증인이 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도주의에 빠지면 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 자체와 조직 자체가 중요시된다는 말씀입니다. 의사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모든 조직이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게 되고, 밑에 있는 사람은 늘 '나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 영안교회에 마당만 밟을 뿐이지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제도적인 교회의 특징입니다. 또 가정에서는 아버지 혼자 장땡이입니다. 나머지는 다 수단에 불과한 거예요. 제도주의를 지닌 사람이 가는 곳은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혹시 남을 쉬 비판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함부로 당신의 잣대로 남을 측정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강압하지는 않았나요? 오늘 여기에 모인 모든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복음을 받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제도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성경은 그들을 우리에게 고발합니다. 그들뿐일까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제도주의에 빠질 수 없단 말입니까? 아니요. 우리 모두 희생자요, 우리 모두 그런 면에서 가해자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아름다운 변화가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생겨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늘 저는 두 종류의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기 원합니다. 먼저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의 태도를 4절에서 간단히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까? 잘 아시지요? "내가 죽는 데까지라도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말고(Malchus) 종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니까 검을 빼 가지고 그의 목을 치려다가 귀만 딱 잘랐어요. 이런 베드로의 성격으로 볼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날 성도들이 앉아서 수석 사도에게 삿대질을 해가면서 당신은 자유주의자이며 변질되었다고 했어요. 베드로가 두리번거리다가 물 컵을 던지든지 해야 하는 건데, 베드로의 태도를 보세요. 베드로가 일어나더니 차례로 설명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에 따라 보수적인 요소가 있고 진보적인 요소가 있어요.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도하지 않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 베드로와 같이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그리고 차분한 태도를 견지해야 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차례로 설명합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보면 10장에 나온 얘기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어요. 성경이 굉장히 함축적인 책인데 왜 이렇게 긴 사건을 뒷장에서 다시 설명하는가?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구조가 약간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10장과 11장에 일어난 사건을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엄청난 것들을 보여주셨다는 거지요. 베드로가 네 가지 사건을 이 사람들에게 설명하는데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 번째, 거룩한 환상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0절을 보세요.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이런 일이란,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거예요. 거기에 온갖 부정한 짐승이 있어요. 돼지와 먹지 못하는 뱀장어 같은 것들이 득실득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아먹으라!" "내가 잡아먹을 수 없나이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속되다 하지 말지니라!" 또 내려옵니다. "잡아먹으라!" "못 먹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세 번! 그러나 사실 이것은 여섯 번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면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환상으로 세 번 보여주시고 음성으로 세 번 들려 주셨어요. 보자기에 짐승들을 보여주시며 잡아먹으라 하시고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섯 번 이 일이 있고 난 후,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이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데, 그것이 11절과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이방인의 집에 갔어요. 이방인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혼자 가지 않고 여섯 명이 같이 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바클레이 주석가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 애굽의 법에 의하면 중요한 일에는 7명의 증인이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여섯 형제와 베드로, 이렇게 7명입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중요한 규칙을 변화시킬 때는 7개의 인감도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7명이 갔던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가라!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준비를 하셨어요. 가보니까 이미 고넬료의 집에 다 준비를 시켜 놓았습니다. 13절, 14절을 보세요.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그가 너와 네 온 집에 무엇을 얻을 말씀을? 구원 얻을 말씀! 하나님이 이미 고넬료를 준비시켜 놓으셨어요. 거룩한 환상이 있었고, 거룩한 명령이 있었고, 거룩한 준비가 있었고, 마지막에 보니까 거룩한 일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늘 이 모든 설명을 차근차근히 한 다음 17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태도였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베드로는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내 철학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어릴 때 받은 교육을 고집하지 않았고, 나의 전통과 습관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유대교 가운데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의 마음 문을 열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왜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었는가? 초대 교인들의 놀라운 태도를 성경은 18절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당신은 자유주의자요? 단에서 내려오시오! 이제 우리는 당신을 따를 수 없소!" 그 험악한 분위기 가운데서 베드로가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자, 그들이 듣고 잠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려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삼겹살을 먹을 수 있어요? 어떻게 이방인들과 교제할 수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그들은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을 바꿉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분노가 찬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평생을 예수 믿으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를 믿고 있고, 미신과 불교를 믿고 있고, 자기의 습관과 가훈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얼마나 우리가 이러한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들고 살아나가는지요. 

  여러분의 가정생활을 보십니까? 딸이 하루는 용돈을 줬더니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왔습니다. 욕을 하며 청바지를 찢는 아버지, 이것이 본질적인 겁니까? 제가 얼마나 개방적입니까? 그런데 저도 애들을 이해 못할 때가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듣는 음악을 살짝 들어봅니다. 솔직히 표현해서 그것은 음악이 아니고 발광입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몰라요. 제 마음이 몹시 불편해집니다. 도대체 저런 음악을 왜 듣는가? 좋은 음악도 많은데... 제가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들을 이해해야지, 이건 비본질적인 거야, 그리고 그 가사를 한번 들어봤어요. 그런데 가사가 좋은 게 많아요. '꿍따리 사바라~ 가슴이 답답할 때 산에 올라가서 한번 외쳐 봐! 꿍따리 사바라~' 가사가 좋더라구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 내용은 괜찮구나. 역시 우리 아들이로고! 가락이 틀리구나!' 아리랑을 부르는 이 세대하고는 가락을 맞출 수가 없는 것이었어요.  내용이 중요하지 가락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그 곡을 따라하려고 해도 따라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저는 거기에 대해서 마음을 열기로 했습니다. 가사와 내용만 괜찮다면요. 오늘 우리의 수많은 잘못된 태도로 인하여 사랑하는 자녀들과 우리 주위 사람들이 상처받으며 살아갑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탄의 술수에 빠져 얼마나 수많은 교회가 갈라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요한복음 2장에 보니 가나에 혼인잔치를 여셨어요.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어요. 무엇을 상징해서입니까? "얘들아,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 줄 아니? 변화야, 변화!" 창녀가 예수님을 만나 거룩한 성녀가 되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의 재미요 의미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변질이 아닌 참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합시다. 본질에는 보수적이되 비본질에는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제도주의를 멀리 하시고, 베드로와 초대교회 교인들과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내 전통을 과감히 벗어 던지는 올바른 열려진 태도를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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