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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 출 7: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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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 출 7:1 - 13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지금 현재 여러분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나 자신을 움직이는 사람,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자신을 움직이는 사람, 죄나 죄책감이나 유혹이나 두려움이나 절망이 자신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전에는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이 될 수 없으나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순간부터 드디어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에 미운 사람에게 정을 주는 일과 싫어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 별것 아닌 가지고 회개하는 일이 있습니다. 드러난 것을 회개하는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회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누가 추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있으면 더 무사하고 체면도 서고 존경도 받을 수 있을 때 자진해서‘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향기로운 제물이 참회하는 마음입니다.

회개란 일단정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힘에 의한 스피드를 일단 포기하고 신의 은총에 자기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눈이며 다른 하나는 감격에 찬 빛난 눈동자로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회개란 나만이 아는 나의 취약점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참회는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인데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굉장한 효력을 발휘합니다. 참회의 계절 사순절을 맞아 눈물을 좀 흘려보면 어떨까요?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법

대구 참사 계기로 본 생존법입니다. 지난 2월18일에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의 충격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를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전략법을 일간지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침착함 유지:
극한 상황이 되면 공포감, 자율신경계의 흥분, 신진대사의 속도가 빨라지고 체력의 급감 현상이 나타난다.
침착함을 유지하여 에너지소모와 피로, 불안감을 줄여 정확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도록 한다.
공기와 물 확보 최우선:
공기의 흐름을 살피고 물을 구하도록 한다. 물이 부족할 경우 조금씩 나누어 마시며
덮을 수 있는 마개를 찾아 증발을 막도록 한다.
체열 유지:
고립 상황에서는 벽보다 나무기둥 등에 기대거나 바닥에 종이나 스티로폴 등을 깔고
웅크려 체온 손실을 막아야 한다.
효과적인 통신수단 탐색 :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에너지 소모의 지름길. 쇠막대기나 돌로 벽을 두드려
소리가 멀리까지 전달 되도록 한다.
긍정적인 사고:
극한 상황일지라도 담담하게 수용하고, 과거의 행복했던 일이나 살아야 할 이유를 상기하도록 한다. 구출된 다음의 밝은 미래를 상상해야 생존 가능성이 늘어난다.
감각자극을 찾아 의식 유지:
깊은 잠은 구조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졸음이 오면 웅크리고 잠깐씩 자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거나 노래를 흥얼거려 의식을 유지한다.
서로 의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서로 정서적인 지지자가 되자.
비관적인 말은 피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도록 구조 가능성과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용기를 주자.

극한상황 하에서는 우리의 생명과 운명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힘이 작용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통로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글을 쓴 미국의 작가 '게일 페일'은 "현대인들이 만족 결핍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술로, 향락으로, 혹은 과도한 소유로 만족을 찾으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만족이 없고, 가정에서도 만족이 없고, 사회생활에서도 만족을 찾을 수 없어서 그들은 당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게일 페일'은 참 만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7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삶과 뜻에 분명한 방향을 가진 사람, 허무와 실망에 매이지 않는 사람, 앞날의 계획을 믿음과 용기로 성취하는 사람, 누군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 신뢰할 친구가 많은 사람, 낙천적이고 비밀이 없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 조건은 자기 비평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만족을 누리면서 살고 계십니까? 만족하지 않다면 어떤 부분이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어떤 학생들은 부모가 미인이 아니라서 불만을 갖는 학생들도 있고 부모가 많이 배워서 유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불만인 학생도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르치고, 먹이고, 입힐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면 많이 남겨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불만인 사람도 있습니다.

대언자가 되라
오늘 우리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가서 대언자가 되라는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는 신적인 존재이고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쉬울 것이 없는 권력과 부귀영화를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바로에게 가서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증거할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들어줄 까닭이 없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보내시면서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 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라"고 아론을 대언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대언자'라고 하는 것은 이름 그대로 대신 전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정당에는 여러 직책이 있지만 자기들의 생각과 계획들을 발표하는 특별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대변인'이라고 말합니다. 대언자의 중요한 자세는 자기의 생각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최고 지도자나 모임에서 결정된 사실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의 기록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그들의 이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바로에게 가라고 했을 때 "말주변도 없는 내가, 더구나 이제는 나이가 80이나 되어 힘도 없는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갑니까?" 사실 모세도 그렇게 처음에는 두렵고 떨려서 그 대언자의 자리, 그 사명의 자리를 거절하려고 핑계하고 변명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바로 같은 존재는 누구입니까? 배우자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니면 자식입니까?
본문 말씀 3-4절 보면 바로의 특징이 나와 있는데 바로는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를 강퍅하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너희를 듣지 아니할 것이라" 는 그 바로처럼 우리 주변에도 바로라고 생각하고 아예 포기해 버리는 바로 같은 존재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의 바로 같은 존재들을 끄집어 내어놓고 마치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로서 바로에게 선 것처럼 그 바로에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니까 그의 가족 관계가 나오고 연령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80세요, 아론은 83세이더라" 3살이 많았습니다. 아론이 형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대접을 받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의 자리에서는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론은 형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생애에 한번도 이 육신의 형이라는 것 때문에 모세를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것 때문에 사명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향해서 말하기를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때로는 같은 구역 안에 70-80대부터 20-30대가 섞여 있을 것입니다. 만약 30대가 구역교사로 임명을 받았으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내 딸 같고, 내 아들 같아도 함부로 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자리는 대언자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자리로 돌아오면 부모 나이 또래에 있는 분들을 부모 같이 여겨야 합니다. 사명의 자리와 사회생활의 자리가 잘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교회가 은혜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곧 예수의 부활을 대언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내 증인이 되라" 우리는 이제 대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손상시키지 않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도의 사람으로 붙잡히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바로는 만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바로와 대면해야 할 모세와 아론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어요. "바로는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얘기해서 들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가라" 강퍅한 마음을 가진 바로, 웬만큼 얘기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바로에게 그러나 주님은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바로 같은 존재들, 여러분의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바로 같은 존재 앞에 여러분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를 특별히 잘하는 사람을 고수라고 부릅니다. 장기의 고수, 바둑의 고수, 정치는 9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상황을 직시하고 판단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일반적으로 다르고 따라서 같은 길도 초보와는 다릅니다. 이들의 깊은 뜻을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알려고 하면 헷갈립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아∼하 하면서 무릎을 치게 됩니다.

비단, 이와 같은 일이 땅의 인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슨 일에든 고수가 되시기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 하셨고, 「길」에 관하여는 인도하시겠다고 언약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압제에서 구원해 내시는데 「바로」를 강퍅케 하십니다. 왜 그러실 까요? 이것 역시 우리네 식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압제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고자 한다면 그 압제자「바로」가 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히려 더더욱 강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오늘 성경말씀이 답을 줍니다. 출 7:4-5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즉, 바로의 강퍅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적을 많이 행하시게 되고, 따라서 바로는 상대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반면에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토록 대조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바로가 강퍅한 것!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실이기에 하나님의 희고 밝은 신성의 거룩성을 나타내는데 있어서는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주님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나와 여러분은 바로처럼 강퍅케 하여 악한 날에 쓰이는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시고 찬송가운데 거하는 백성이요, 자녀 된 은혜입니다.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구원하고, 아니 우거 중에 하나님께 있어서 고집부리며 강퍅하여 바로 같은 자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순 없습니다. 오직 순종할 뿐입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을 계속 보노라면 두 번째 대조를 보게 됩니다. 출 7: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이었고, 아론은 팔심 삼 세이었더라.

왜 모세, 아론의 나이를 언급했을까요?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총은 나약할 때 더욱 드러남으로 그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만약 모세와 아론이 젊고 용감한 용사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싸워서 쟁취했다면 어떨까요? 출애굽은 저들의 승리요 저들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이요」「나의 은혜」라 할지라도 당대와 후대는 믿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은 하나님 보다 모세와 아론에게 쏠렸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에서 오히려 기도하십시오. 고난을 피해가지 말고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하셔야 합니다. 고난이 없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내게 주셨으나 고난으로 인하여 삶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랬고, 아론이 그랬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대언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만족을 찾지만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만족을 찾아 달려가지만 그들을 결코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새로운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바뀌어야 되겠고, 우리의 의식도 바뀌어야 되겠고, 우리의 삶의 구조도 바뀌어야 되겠습니다. 아마 가슴이 철렁 철렁한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네가 이 땅에서 가장 큰 일을 했다고 칭찬 받으실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문제는 너도 나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했지만 말로만 증거하기 때문에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물질이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네 물질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이 따라가지 않는 헌신, 물질이 따라가지 않는 전도는 소용이 없고 평생 영혼 구원 한번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희생이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의 희생이 따라가야 합니다. 이런 희생들이 전제가 될 때 비로소 영암교회는 하늘 문을 여는 놀라운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에 모든 영암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셔서 어떤 상대라도 그것이 바로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대언자로 그 앞에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며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사랑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마침내 그 영혼을 사로잡아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시키고 마는 능력의 대언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유일한 신뢰의 대상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자녀가 얼마나 믿을 만한가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도무지 신뢰할 만한 구석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한결같이 신실하십니다. 설혹 우리가 용기를 잃어버린다 해도 주님은 여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연약한 인간을 들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다 포기한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멈췄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제자들이 연약할 때 예수님은 강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을 때 예수님은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초월합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자녀들이 도무지 미덥지 못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형통한 날의 은혜 / 맥스 루케이도

모세를 움직이시는 하나님(7:1~7)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이며 온 세상에 그분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입이 둔한 모세에게 대언자 아론을 붙여 주셔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작전을 모세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단계적으로 더 큰 표징과 이적과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이 이 일을 행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 애굽 땅에서 출정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모세는 팔십이라는 고령의 나이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로 당당히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들을 좀더 잘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수행자로서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여러분의 운명을, 아니 여러분의 미래와 꿈과 생명을 움직이는 것은 진정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짐(7:8~13)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하는 것조차도 그들의 능력과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획의 실행자이시고 모세와 아론은 그것을 대변할 뿐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의 술객들도 동일한 이적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능력을 능가함을 보여 줍니다. 그렇지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는 표현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실제로 애굽 왕 바로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사의 결정은 하나님께 있고, 그 실행도 그분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솔직히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한 어떤 것이 여러분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이 느껴집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오늘을 사는 사람은 '오!'라고 하는 감격의 삶을 '늘' 사는 사람입니다. 삶은 깨치고 보면 일체가 신비이고 거저이고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 그것이 구원받은 삶이요 영생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 찬미요, 감사요, 감격입니다. 어떤 처지나 경우에서든지 나의 나됨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삶.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다'의 삶.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경륜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임했습니까? 존귀하거나 부유하게는 임하지 않았지만, 「순전한 믿음을」갖도록 하였습니다. 부유하거나 권세가 있었지만, 강퍅하여 버려진 바로 보다는, 순전한 믿음을 지녀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야말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강퍅한 바로도 이토록 사용하신다면 순전한 성도는 더더욱 고귀하게 사용하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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