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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 / 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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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명 / 서울영천교회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설교제목 /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1-6


요즘 퀴즈프로그램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 블란서, 미국 등등 선진국일수록 퀴즈프로그램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상금도 상당히 높은 퀴즈프로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퀴즈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알아들을 만한 수준의 퀴즈가 많이 있는가 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의 퀴즈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 예수님의 퀴즈 >

  6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직역을 하면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넘어뜨리고 인간을 속이고 인간에게 상처를 주고 인간을 망하게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를 인하여 실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기에 예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들은 물론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때문에 넘어지고 예수 때문에 속상하고 예수 때문에 울분이 일어나고 예수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다가 예수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 때문에 실족하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살펴보면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간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3절에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선생님 메시야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뒤에 다른 사람이 또 옵니까?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세례요한에게 가서 내가 들려주는 말씀을 듣고 너희들이 지금 여기서 보는 그대로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서 소경이 본다, 앉은뱅이가 걷는다,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다,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앞의 내용과 뒤의 말씀이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연결이 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금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은 그 잘나고 똑똑한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안 믿고 있는데 창기와 세리와 가난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 기적의 의미 >

  소경이 본다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못 보던 소경이 눈을 떠서 보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앉은뱅이가 걷는 것은 기적입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 것도 기적입니다. 귀머거리가 듣는 것도 기적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기적입니다. 소경이 보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면 소경이 안된 것도 기적입니까? 소경으로 있다가 소경상태에서 눈을 떠서 보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소경이 안되고 사는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합니까?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앉은뱅이가 한번 되었다가 거기서 걷는 기적을 만나야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지 않고 사는 이것은 기적입니까?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 이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불행이 인간에게 왔는가? 이것은 죄 값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이런 질고가 오고 고통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들을 만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정상이라고 합니다. 두 눈을 가지고 보고 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정상이 곧 하나님의 기적으로 깨달아지고 감사가 일어나고 그 정상 속에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을 깨닫고 사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예수를 잘못 믿으면 예수 때문에 우리가 넘어집니다.

  구상의 ‘말씀의 시상’이란 시의 한 대목을 보면 ‘영혼의 눈에 끼였던 무명의 백태가 벗어지며 / 나를 에워 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 창 밖 울타리 한 구석 /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자기의 눈에 끼여있던 백태가 벗겨지니까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불신의 백태가 끼어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안보였는데 이 무명의 백태가 벗어지고 나니까 천지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내가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상당히 함축적인 말입니다. ‘평소에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기적인 것을 깨닫습니다.’ 열 손가락을 움직이며 살았던 무심히 보아오던 이것이 내가 영혼의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의 기적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창밖에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이 부활의 시범을 보는 듯 합니다.’ 내가 죽어 부활이 되는 그 영광의 세계가 개나리꽃이 활짝 피는 여기에서 그 부활의 시범을 봅니다. 그래서 사뭇 황홀합니다.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 정상도 기적이다 >

  여러분, 이 시인은 ‘평소에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이것이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깨닫고 보니 이것이 기적이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은 왜 정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를 못합니까? 정상적인 거기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말을 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벙어리 되었다가 입이 열려야 전도를 하겠습니까? 말을 할 수 있는 정상의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손발이 움직이고 있을 때, 내가 먹고 입고 살기에 정상일 때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정상에서 걸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몸이 약해서 병상에 있더라면 오히려 행복할 사람인데 건강하기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경이기 때문에 넘어지는 게 아니라 본다고 하다가 넘어집니다. 앉은뱅이이기 때문에 넘어지는 게 아니라 걷는다고 자신있게 뛴다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귀머거리가 넘어지는 게 아니라 듣는다고 하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때문에 실족하지 않도록 믿음의 눈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19편에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인이 본 놀라운 영적세계 감각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고 이 지상의 공간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있고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하루하루 밤낮이 바뀌는 여기에 하나님의 속삭임이 있다,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고 있도다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나’라고 하는 시를 남겼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진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언제 실족합니까? 왜 실족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 때문에 넘어집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넘어진 자를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소경을 보게 해주는 자입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해 주는 자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는 분이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시는 분인데 왜 그 좋으신 예수 때문에 우리가 넘어지냐는 말입니다.

< 무지는 넘어지게 한다 >

  무지해서 넘어집니다. 예수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예수를 다 바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내가 예수를 바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안다는 말은 그 분의 의도하심을 깨닫고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내가 깨닫고 그 분 앞에 내가 믿음으로 응답을 해야만 내가 예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지금 그 예수님이 영광받을 일을 내게 주셨는데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면 나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를 모르므로 실족합니다. 무지함으로 실족합니다. 이 무지함을 극복해야 됩니다. 무지는 합리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무지를 극복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영적인 무지를 극복하려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넘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개관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영지입니다. 영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신앙고백서를 외우기 때문에 내가 영적으로 유식한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다고 하는 개념은 전부 ‘인격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신학이라는 신학서적을 다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내가 알아져야 합니다. 아무리 요리문답책을 공부하고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음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무지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무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하나님으로서 내게 접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사울을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율법의 선생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능통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능통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예수님은 몰랐습니다.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그 예수가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사울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예수가 인격적 예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나와 동행하는 것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해야만 영적 무지가 극복되는 것입니다. 이 무지로 인하여 우리가 넘어집니다.
 
< 무각은 넘어지게 한다 >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를 때 넘어집니다. 하나님이 의도하는 일을 모를 때 넘어집니다. 이것을 ‘무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가 필요하고 주님 앞에 영성이 열려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열려 있는 기도가 있는 자는 깨달아집니다.

  < 무책임은 넘어지게 한다 >

  무책임할 때 넘어집니다. 무지, 무각, 무책임, 이 세 가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넘어집니다. 무책임을 단순히 ‘무책임이다’ ‘책임지지 않는다’라는 어떤 도적적인 관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무책임은 영적인 의미에서는 실행없는 헌신을 말합니다. 위장된 헌신, 주님 앞에 믿음으로 살기는 사는데 실속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책임을 극복해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3무를 극복해야 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 세 가지를 전매특허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 앞에 온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보내주시겠다고 한 메시야가 왔는데도 모릅니다. 예수가 하고 있는 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세리와 창기들과 먹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메시야가 하고 있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하나님 앞에 한 가지도 열매가 없는 그런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지금 예수 때문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주님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은 “너희들은 나 때문에 넘어지지 말아라 내가 메시야다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갔더냐” 너희가 옷 잘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 나갔더냐 옷 잘입은 사람은 궁궐에 있느니라 헛수고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만난 여기서부터 넘어지지 말아라 내가 메시야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것을 너희 선생에게 가서 말해라” 그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 누가복음 17장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라고 했습니다.

  넘어지지 말라 하시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도 넘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지지 않아야 되는 것은 당연하고 남을 실족시키는 일도 하지 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사는 자신도 넘어지지 말아야 되지만 내가 가르치는 그 영혼을 결코 넘어지게 해서는 안되는 스승으로서의 강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아이를 실족케 하는 일이라면 이는 우리에게 너무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경고를 하셨습니다.

  < 사역의 요건 >

  교사사역은 교사로서의 형식을 제외한 일곱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아야 됩니다. 가르침의 주체가 진리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냐?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시스도가 진리의 주체입니다.
  두번째는 아름다움이라 했는데 아름다움이란 내용은 조화를 말합니다. 교사들끼리 서로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혼자만의 탁월함이 아니고 교사들끼리 이것이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들은 개인적으로는 탁월해야 됩니다.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다 일등이 되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는 일등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꼴찌를 섬기는 일등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꼴찌도 일등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개인적으로는 특출하십시오. 그러나 교회에 와서는 그 특출함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화요 아름다움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가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어 유세를 하러 다닐 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어코 비행기를 타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로 와서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는 그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교사직을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참모들이 이러면 유세하는데 차질이 오기 때문에 제발 가까운 교회에 가기를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지미 카터씨는 유세하던 첫 주일부터 본 교회로 돌아와서 여전히 자기가 맡고 있는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날 카터에게 아주 유수한 언론사의 기자들이 카터를 취재 차 왔습니다. 그래서 카터가 기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자 여러분, 오늘은 이곳에 왔지만 다음 주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로 가서 섬기기를 바랍니다.”

  그는 후에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와서는 어린 아이를 섬기는 교사로 돌아가서 일을 한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줍니다. 우리는 교회 밖에서는 다 한자리씩 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한 자리 하려고 하지 마세요. 교회에 와서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교사들은 개인적으로는 특출하십시오. 그러나 교사회에서는 서로 섬기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바랍니다.

  세번째는 애정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애정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따져 올라가면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모든 것을 우선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세운 것은 내가 유능함도 아니고 내가 필요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라는 동기입니다. 여러분을 여러분 되게 한 것은 여러분이 이 교회에 필요존재가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정이라는 것은 모든 조건에 선행하는 조건입니다. 아무리 미운 아이라도 그 미운 아이를 품을 수 있는 조건은 애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영혼을 사랑한다면 어린이의 어떤 허물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교사가 된다는 뜻입니다.

  네번째, 희생입니다. 내 것이 닳아 없어지는 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 육체, 내 물질이 희생되는 조건입니다.

  다섯번째, 순종입니다.
  여섯번째, 땀입니다.
  일곱번째,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변화의 도전

  요즘은 여러 가지 시대적인 변화가 많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보보스(bobos)’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류층을 일컫는 말입니다. 앞의 ‘보’는 부르주아의 ‘bou'를 말하는 것으로 물질의 귀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뒤에는 ‘보헤미안’으로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둘을 합하여 ‘bobos족’이라 합니다. 모두가 보보스가 되고 싶어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합니다. 정신적으로 풍요합니다. 돈 있고 명예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는 상류층의 사람을 보보스족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보보스 열풍이 우리나라에 거세게 불어왔습니다. 중국도 지금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상류층이 6%라고 하는데 8,000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지금 50억짜리 아파트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고 합니다. 상상을 못하는 귀족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상류층은 수치로 따져보면 얼마 안됩니다. 그런데 이 보보스족의 열풍이 우리 사회를 지금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요즘은 보보스와 대치하는 두 가지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모모스족’(momos)입니다. 영어로 ‘mo’는 순수한 우리말을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보보스족 처럼 살려고 좇아가다가 결과는 모모스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mo'는 ‘모든 것이 빚이다’라는 말인데 한참 좇아가다 보니 코스닥, 벤처기업 등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사람도 끝에 가면 다 빈털터리 라는 것입니다. 한참 뛰어가고 보보스족 흉내내다가 정신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빚이라는 것입니다. 뒤의 ‘mo'는 ‘모든 것이 사기다’ 라는 것입니다. 모모스족이 굉장히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빚에 울고 사기에 울고 지금 이렇게 해서 망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보보스족을 흉내내다가 철도 안들어서 모모스족이 다 되어 버립니다.

  맺는 말

  여러분, 잘 살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예수 때문에 넘어지는 유대주의자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무지, 무각, 무책임을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 시대의 유대인 되기 쉽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은 알지 못하면서 살기 쉽습니다. 그 분이 원하는 일에 우리가 헌신하고 희생하고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에 우리가 쓰여지고 바쳐져야 되는데 나 따로, 예수 따로, 땀이 없는 신앙생활은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땀을 요구하고 순종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어찌 교사사역에만 해당되는 일입니까?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이 일곱 가지 조건을 새겨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로 인하여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예수로 인하여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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