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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 반드시 이겨야 한다 / 삿 16: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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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반드시 이겨야 한다 / 사사기 16:15-22
사랑의교회 / 옥한흠 목사


성경을 한두 번 읽어 보신 분이라면 '삼손'에 대해 익히 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여 년 동안 블레셋의 속국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삼손을 세워 블레셋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극적으로 등장해서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최후를 마침으로, 드라마틱한 생을 살다 간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보면,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 삼손을 믿음의 조상으로 특별히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탁월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삼손의 일대기를 사사기서에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삼손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유혹,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유혹을 주로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험이나 유혹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간교한 수단을 일컬어 '시험' 또는 '유혹'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이 경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과연 유혹의 늪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중 마귀의 유혹을 면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번도 유혹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죄를 짓지 않고 자기를 지켜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직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에 있을 때에도 마귀는 거침없이 찾아가 유혹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유혹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잘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찾아가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누구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오늘도 유혹하는데, 바로 그 현장이 세상입니다. 따라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똑똑히 주변을 살피면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윈 루처(Erwin Lutzer)라는 분의 말에 동감합니다. "유혹,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일단 나를 유혹한다는 것은 나를 전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가 나를 유혹합니까? 그것은 "전쟁하자. 나와 싸우자."고 나를 불러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적인 전쟁, 유혹과의 전쟁입니다. 여기에서 지면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삼손을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럼 몇 가지로 정리를 하면서 함께 깨닫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은 우리의 거룩을 공격해서 죄를 범하도록 하는 데 있다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 들릴라를 알게 되면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그가 미인계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5절을 보면 블레셋 방백들이 들릴라를 미혹의 미끼로 이용하여 삼손에게 접근한 목적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겨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결국 들릴라를 통해 삼손의 그 힘의 비밀을 알아 내어 그를 꺾으려고 했던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원래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은 거룩한 사람, 드려진 사람, 헌신된 사람을 의미하는 구약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민수기 6장에 있는 말씀대로 머리에 칼을 대지도, 술을 마시지도, 죽은 자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일정 기간 동안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하고 드리기로 약속한 사람을 일컬어서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 1주간 동안 하나님께 나 자신을 거룩하게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머리도 안 깎고 술도 안 마시면서 1주일 동안 거룩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일반 나실인과는 또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보통 나실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작심하고 약속하는데 비해, 삼손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으로 하여금 그가 태어나면 절대로 머리에 손을 대거나 칼을 대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일평생을 그렇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삿13:5)

따라서 그가 나실인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삼손은 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바쳐진 사람입니다. 만약 그 머리에 칼을 대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거룩을 범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힘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거룩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들릴라를 앞세워 이 비밀을 캐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평생 바쳐진 나실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들 중 남자분들을 몇 십 명을 앉혀놓고 "여러분, 자신을 거룩하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질문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 사람도 "나는 거룩합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놀라서 "왜 자기를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목사, 선교사, 순교자, 아니면 이름 앞에 '성'(Saint)이 붙은 성자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처럼 날마다 회사에 나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정신 없이 쫓기는 사람이 무슨 거룩합니까? 다음에 천국 가면 거룩해질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실인입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 하면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창세 전에 우리를 아들로 부르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들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는 거룩한 성령의 사람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¼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모두는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우리의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심지어 여가를 즐기는 시간도 거룩한 제사입니다. 젊었을 때도 거룩한 제사요, 늙었을 때도 거룩한 제사입니다 우리의 삶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올려드리는 제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바로 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실인이요, 거룩한 성도요, 거룩한 제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레오나르드 레이븐 힐이라는 분이 한 말인데 이 속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지 않은 세상으로 데려와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 남겨 놓고, 그를 그 속에서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고 있는 영광, 행복, 능력은 다 거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에서 싫어하는 예수를 생명 걸고 믿고 그를 존귀히 여기며 경배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때는 이해할 수 없는 희생과 대가를 치르려고 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일을 간혹 거부하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하고 신비한 기쁨을 우리 영혼에 간직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가 멸시나 천대를 마다하지 않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까?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 능력, 영광이 거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를 미혹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거룩에 흠집을 내어 우리에게 있는 영광이나 힘을 빼앗아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유혹을 가리켜 '내 팔꿈치에 있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유혹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목사가 더 가까이에서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안 차리면 어디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마음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는지 정확하게 꿰뚫어봐야 합니다. 곧 우리의 거룩을 더럽혀서 죄를 범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유혹은 영적으로 방심하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을 계속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들릴라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삼손이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방심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들릴라는 아주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삼손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자기...그 신비하고 놀랍고 엄청난 힘, 정말 매력 만점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 천하에 어디에 있어요. 내가 완전히 홀딱 반했어요. 그런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 나한테만 말해줘요. 날 사랑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벌써 삼손이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 합니다. '뭔가 나를 노리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들릴라가 요염한 자세로 자기를 추켜세우면서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어오자, 그만 우쭐해져서 자기 거룩을 가지고 장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힘? 어디서 나오느냐고? 마르지 않은 칡넝쿨 일곱 개를 가지고 와서 날 한번 묶어 봐. 그러면 알 거야." 그리고 몇 일이 지났습니다. "내 힘 말이야? 한번도 써보지 않은 새 줄을 가지고 나를 묶어봐. 그러면 내 힘이 없어져." 그리고 또 몇 일이 지났습니다. "내 머리털 일곱 가닥을 저 베틀에 넣어 같이 직조해봐. 그러면 내 힘이 날라가고 없어." 이런 식으로 장난을 했습니다. 이것은 방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정신 차린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머리가 다 밀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떠나고 힘도 떠나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방심한다는 것은 영혼이 졸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신앙이 미지근해졌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맛에, 세상 재미에 마음이 자꾸 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점점 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점점 멀리 놓고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의 교제도 점점 뜸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뭔가 지금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것을 일컬어 방심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방심해지면 대신 육신의 정욕이 힘을 얻게 됩니다. 거룩의 힘이 약해지면 탐심의 힘이 생깁니다. 삼손이 방심하게 되자 나실인이 된 자기의 거룩을 팔아서라도 여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유혹이든지 탐욕, 욕망의 단계로 접어들면 헤어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날마다 선악과 나무 옆을 지나다녀도 전혀 유혹을 받지 않았었는데, 마음에 탐심이 생기자 선악과 나무를 보는 눈이 벌써 달라졌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해서 저것만 먹으면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방심하는 자의 마음에는 탐심이 일어납니다. 탐심이 힘을 얻습니다. 만일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가까이 하지 반드시 우리 마음에 어떤 이상한 것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당시 삼손은 사사로서 절정기에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블레셋에서 해방시켜 평화를 누리며 사는 때가 벌써 수년이 지났습니다. 자기 나이로 봐도 지금 한참 젊음을 과시할 수 있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귀와 칭찬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이 정도 정상에 서게 되면 자칫 방심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 수 있으므로 가장 조심해야 될 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정상에 섰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또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역경을 견뎌내는 사람이 백 명 있다면, 성공과 번영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 삼손이 서있는 자리는 굉장히 위험한 자리입니다. 자칫 긴장을 풀고 방심하고, 엉뚱한 데로 눈 돌릴 수 있는 기회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귀 역시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들릴라를 이용해 지금 삼손에게 치명적인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삼손은 넘어갔습니다.

다음은 초대 교회 시대 유명한 교부 암부르스가 한 말입니다. "삼손은 사자의 목을 조여 죽일 수 있었으나 자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한 사람이었고, 삼손은 원수의 쇠사슬을 쉽게 끊을 수 있었으나 자기의 정욕의 쇠사슬을 끊지 못한 사람이었다. 삼손은 원수의 보리 밭에 불을 지를 수 있었으나 자기는 한 여인이 지른 정욕의 불에 타 죽어 버린 사람이다." 방심 하자마자 거룩한 힘은 떠나고, 정욕의 힘이 서서히 삼손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방심합니까? 신앙생활이 미지근해집니까? 신앙생활에 매력이 떨어집니까? 무엇인가 다른 데 더 마음이 끌립니까? 그래서 영적으로 점점 어두움이 짙어집니까? 점점 석양이 가까워오는 영적인 상태를 여러분이 느낍니까? 그렇다면 굉장히 위험한 때입니다. 이런 방심의 시험과 위기를 느끼는 경우는 대부분 생활이 안정되고 형통하여 자신감을 가질 만한 때에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방심하면 정욕이 우리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이처럼 정욕이 우리 마음을 서서히 지배하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요, 순교자였던 본 훼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잠자고 있는 듯 하지만 갑작스럽고도 맹렬하게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욕망은 육신을 사로잡아 정복합니다. 갑작스럽게 비밀스런 불꽃이 연기를 피우며 끓어오릅니다. 육신은 타오르며 불꽃가운데 휩싸입니다. 이것이 성적인 욕망이든 야망이든 허영심이든 복수심이든 명성과 권력에 대한 사랑이든 돈에 대한 욕심이든 혹은 세상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야릇한 갈망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 사라지는 대신 피조물 안에서 모든 기쁨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사라지게 되고, 피조물에 대한 갈망만이 내 안에 남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난 욕망은 가장 깊은 어두움으로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덮어버립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이것 모두가 욕망이 우리 마음을 서서히 지배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기 현상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이런 현상이 조금이라도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방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들릴라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보다 정욕이, 거룩보다 탐욕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하나님이 지금 방심하고 있는 자를 향해 외치십니다.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자를 향해서 외치십니다. 신앙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 미지근해진 자, 게을러진 자, 세상에 대해 눈을 돌리는 자를 향해 지금도 외칩니다. 얼마나 지금 위험한 시기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셋째로 삼손은 유혹을 피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16절을 보면 묘한 말이 나옵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왜 번뇌하고 죽을 지경에 빠졌습니까? 무엇 때문에 갈등 합니까? 무엇 때문에 고민합니까? 무엇 때문에 잠 못 자고 씨름을 합니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이 생긴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이야. 내가 이 여인의 말대로 그 비밀을 가르쳐줘서 그 힘을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 나는 하나님 앞에 서약된, 하나님 앞에 드려진 거룩한 사람인데, 이것을 실토해서 나중에 그 뒷일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나? 내가 잘못되면 이 백성들이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될까?" 이런 양심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가 마음에서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갈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유혹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면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아닌데...내가 이렇게 따라가서는 안 되는데...내가 자꾸 이 사람과 만나서는 안 되는데....' 이런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여러분의 마음 속에 갈등이 일어납니까? 괴로움이 생깁니까? 밤에 잠도 못 자고 고민을 합니까? 그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직 신앙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양심을 통해 지금 들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럴 때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 앞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무릎 꿇고 "아버지 하나님, 살려주세요. 내가 지금 벼랑에 섰습니다." 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유혹 앞에 "안돼!"라고 말하고 도망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끝장 나고 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삼손은 그런 번민하고 갈등하는 소중한 기회를 바로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남모르는 마귀의 유혹을 앞에 놓고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마음 한구석에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자꾸 들립니까? 양심의 가책이 생깁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반응을 잘해야 됩니다. 이럴 때 유혹 앞에서 "안돼!"하고 소리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절호의 찬스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자기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요셉이 얼마나 어려운 시련을 많이 겪었는지 모릅니다. 당시 노예 신분이라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아무런 입지가 못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상관의 아내가 유혹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갈등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단호하게 "안돼!" 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렇게 변형시켜 이야기합니다. 요셉이 계속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다가, 어느 날 어떻게 되었는지 보디발의 아내의 침실까지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 순간 요셉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이거 큰일났구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이 큰 악을 범하여 하나님 앞에 득죄하겠느냐?' 그리고는 "나는 절대 하나님 앞에 득죄할 수 없습니다."는 말을 거기서 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갑자기 치마를 벗어서 자기 침실에 있는 신상의 얼굴에 씌웠습니다. "이제 네가 말하는 하나님은 보지 못해." 다시 요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나님은 보십니다." 하고 말하고는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가 마음에 고민하고 갈등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 세계가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는 순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 때문에 유혹 앞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돌아설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 순간에 엎드려 구하기만 하면,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 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은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이런 저런 모양으로 당하는 유혹, 시험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허락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바로만 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기대기만 하면, 우리는 반드시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요셉을 비롯한 성경에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시험에서 이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당하고 이길 수 없는 시험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피할 길을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돌파구를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길이라는 말 앞에 부정관사 'a' 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곧 하나의 길이 아닙니다. 'The Way', '그 길'입니다. '그 길'을 만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래서는 안되겠구나!'는 양심의 가책과 마음의 갈등이 생기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시는 돌파구를 향해서, 'The Way'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 기회를 놓침으로 결국 유혹 앞에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넷째로 유혹에 지면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삼손이 결국은 들릴라에게 자기 거룩의 비밀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 결과 머리가 밀리면서 하나님이 떠나고, 삼손의 힘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두 눈이 뽑혀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소와 같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유혹에 지면 거룩의 머리가 밀립니다. 거룩의 힘이 떠납니다. 그리고 두 눈이 뽑혀 영적으로 봉사가 됩니다. 영적으로 분별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유혹에 져서 죄를 범하게 되면 우리 어깨에 무거운 짐이 얹힙니다. 밤낮없이 그 영혼이 쉬지 못하고 고통 하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한번의 실수로 인해서 눈이 뽑힌 사람이 많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인해서 머리가 밀려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인해서 한평생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정이 깨지고 자녀들이 고통하며 헤맵니다. 몸에 병을 얻습니다. 명예를 잃어버립니다. 재산을 날립니다.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습니다. 결국은 앞날에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한두 번의 유혹 때문에 그것을 이기지 못하다가 망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 한두 명이 아닙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요즘에 많은 성도들이 죄 짓는 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해 실감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인데 한 번쯤 이런 잘못도 범할 수 있지." "죄를 범해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또 용서 받을 텐데..." 하는 식입니다. 한 술 더 떠서 "나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도 천국은 간다." 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정상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죄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미 교회를 떠나버린 어느 남자 집사의 경우 아내 모르게 몇 년 동안 다른 여자와 살면서 나중에 그것이 들통이 났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지 하나님 앞에, 아내 앞에, 자식 앞에 참회해야 되는데 오히려 전혀 잘못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지. 뭐가 문제냐?" 가정을 깨면서도 마음에 어떤 아픔과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죄를 무서워하십시오. 유혹을 받고 죄에 빠지면 비참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삼손의 밀린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22절) 삼손이 머리가 밀리고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리면서 감옥에 살 때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가 정말로 했을 일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를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적어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다시 거듭나는 철저한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맷돌을 돌리면서 피눈물을 쏟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털이 점점 자라기 시작하자 그에게 힘을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그를 다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사사로서의 위대한 일을 남기고 그의 생을 마감하도록 해 해셨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죄를 한번도 안 지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한번도 안 넘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 전과범입니다. 전과자 중에서도 재범할 확률이 너무 높아 감시대상자에 해당합니다. 항상 잘못될 가능성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이미 죄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깎인 머리를 다시 자라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거룩을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십니다. 가정을 치유해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정상으로 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날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일에 더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하려고 노력하면, 마귀가 가까이 와도 감히 우리를 꺾지 못합니다. 한번 넘어졌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시 삼손처럼 회개하고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제 이 험한 세상을 살 동안 삼손처럼 강한 영역을 가지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데 앞장설 수 있도록 거룩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유혹에 대해서 단호하십시오. 지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쩌다가 유혹에 넘어지면, 넘어지는 그 자리에서 좌절하지 말고 삼손처럼 철저하게 회개하여 다시 치유 받고, 힘을 회복함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유혹이 너무 많은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오늘도 함께 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삼손처럼 유혹을 받지만 주님이 오늘도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주님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유혹에 빠져서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이 시간 양심을 회복시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는 영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손처럼 철저하게 회개하고, 밀린 머리털이 다시 자라 힘을 회복하고 치유 받는 은혜를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이 더럽고 악한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바꾸어 놓는 거룩한 주의 도구들이 되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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