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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 창 3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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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이철 목사
▶ 본문 : 창 39:19~23
▶ 제목 :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과 가난으로 겪는 고난, 사고나 재난으로 생기는 고난이 있고 인간관계의 갈등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이 자신의 잘못으로 오는가 하면 자기의 잘못과는 관계없이 바르고 의롭게 사는데도 이러한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겪을 때는 내 탓이기 때문임을 알기에 견디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내 탓이 아닐 때는 억울한 생각이 들고 애매하게 겪는 고난이기에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잘 견디어야 하지만 특별히 억울하고 애매히 당하는 고난도 잘 견디어야 합니다.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고난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고난이 자기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기보다 자기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애매하게 겪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의 노예로 팔려올 때도 노에가 될 이유도 없이 단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노예가 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노예가 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노예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억울한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자기 여주인이 자기와 동침하자고 유혹해오는 것을 주인과의 신의를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럴 수 없다는 자세로 뿌리친 것 때문에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착하고 바르게 살아도 소용이 없겠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감옥밖에 없구나.. .’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각을 본문에서 읽을 수는 없지만 20절에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받게 하시매...

요셉은 이렇게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또 애매한 고난을 받았지만 그것에 대해 요셉은 말 한마디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또한 요셉이 그것 때문에 사람을 원망하거나 죄절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다 잊고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형들에 의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와서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주어진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을 나타냈던 것처럼 감옥에서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고 형통한 자가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감옥에서 끌어올리시고 바로왕 앞에 서게 하시며 꿈을 가진 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에 서게 되며 자기 가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됩니다.

요셉이 그러한 하나님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기까지는 그에게 닥친 고난을 잘 감당한 데 있습니다. 특별히 애매하게 받은 그 고난, 받을 필요가 없는 고난을 겪었을 때에 잘 참고 견디었기 때문에 요셉에게 좋은 날이 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인생이 되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넘치기를 원하면 모든 일이 잘 될 때에 바로 설 뿐 아니라  억울하고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도 잘 지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잘 지탱하지 못해서 넘어지고 결국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해서 애매히 받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까?

본문 말씀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다른 성경을 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벧전 2:19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베드로전서는 그 당시 심한 고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베드로 사도의 편지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고난을 받았습니까?

사실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고는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받습니다.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 당시 성도들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았기에 그 고난을 잘 참으라고 사도 베드로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받는 고난을 어떻게 잘 극복할 수 있는지의 비결을 19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받는 고난의 슬픔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잘 견딜 수 있는데 비결이 있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가 겪은 고난을 잘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믿을 사람도 없고 의지하고 하소연 할 때도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애매한 고난을 견딜 수가 있었는데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첫째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A. D300년경에 마카리우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에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동네 사람들 까지도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 동네의 어떤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 아기의 아버지를 캐물으니까

마카리우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소문에 소문이 전 마을에 퍼져서 마카리우스를 이중인격자로 수도원에 탄핵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도 그렇게 경건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가 미심쩍어 하면서도 분명한 증거가 있기에 그 사람을 해고시키고 마카리우스는 수도원에서 쫓겨나서 평민이 되어 세상에서 일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 그 아이를 낳은 어머니에게 양육비로 쓰라고 생활비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기 어머니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어서 아기 아버지는 따로 있는데 마카리우스라고 하면 자신의 입장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노라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동네 사람들이 이 마카리우스를 칭송하게 되었고 그 수도원에서도 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왜 가만히 있었냐는 질문에 마카리우스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 때가 되면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변명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을 이런 것을 말합니다.

요셉이 그러한 누명을 쓰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무 말 안하고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때가 되면 밝혀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명을 벗겨주시고 그를 높이 들어 쓰시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요셉이나 마카리우스처럼 누명을 쓰고 고난을 당할 때가 있겠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에게 좋은 일을 주실 때도 있고 우리가 보기에 좋지 않은 일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전도서 7:14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일만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고난도 주시고 애매히 받는 고난도 주십니다. 결국은 그러한 고난도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선을 이루게 되며 그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결과를 생각하게 될 때에 애매히 받는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애매히 받는 고난을 생각해 보면 ,만일 그가 그런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왕의 신하들이 들어가는 옥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왕의 신하들이 들어가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왕 앞에 설 수가 있었겠고 왕 앞에 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애매한 고난을 받게 하시고 감옥에 들어가게 하신 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의 생애를 인도하시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시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오묘하고 놀랍습니다.

이사야서 55장의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고 우리 생각보다 높은 하나님은 고난도 쓰십니다. 심지어는 애매한 고난도 쓰셔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모든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프만 여사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누에고치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여러 마리의 누에고치가 나비로 탈바꿈하려는 중이었습니다. 너무도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려고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 한 마리가 그토록 작은 구멍을 통해서 천신만고 애쓰더니 결국은 빠져 나와서 공중으로 훨훨 날아 올라갔습니다.

나는 마침 또 나오려고 애쓰는 고치를 발견하고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과 자비가 많다고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습니다. 내가 넓게 열어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나비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결국은 오르지 못하고 바닥에서 맴돌다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나는 깨달았습니다. 작은 구멍에서 고통하며 힘쓰며 나와야 그 몸의 영양분을 날개 끝까지 공급하고 날개가 나올 때에 심하게 마찰되면서 날아오를 만큼  강건해진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 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애매하게 고난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더 강해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더 힘차게 날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애매한 고난까지 주십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이 고난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애매하게 겪는 고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애쓰고 주님 앞에 충성을 하고 최선을 다 했는데도 겪는 고난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승화시키시고 더 강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이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벧전 2:19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 모두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고난 받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 아닙니까? 또 부족하고 연약하며 흠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자신이 보기에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 같지만 고난에는 다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고후 5:21처럼 그 분은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신데 그분이 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애매히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고난도 보통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으로 못이 박혀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돌아가시는 고난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고난을 받으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내시고 사람들을 저주하셨습니까?

만약에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주님은 애매히 받는 고난을 겪으셨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 선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남을 욕하지 아니하시고 남을 저주하지도 아니하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애매한 고난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애매히 고난을 받음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만일 애매히 받는 고난을 참아내면 그것 때문에 위로를 받고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존 셀린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남태평양의 대주교라고 불릴 정도로 남태평양에서는

유명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분의 간증이 미국감리교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선교사가 되기 전에 권투선수였다고 합니다.

주먹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선교사가 되어 남태평양의 어떤 외딴 섬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는데 선교하기가 어려운 때였습니다. 한번은 교회에 항상 말썽을 피우는 어떤 청년이 있어서 충고를 하면서 야단을 쳤더니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고 화를 내고 욕을 하며 선교사 얼굴을 때린 것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원래 권투선수라서 맞고 나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가는 것인데 주먹이 나가려는 것을 다른 손으로 잡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아내고 청년에게 다른 쪽 뺨을 내밀었습니다.

그 청년의 독기어린 눈을 선교사님이  사랑스런 주님의 눈으로 보았더니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더 이상 때리지는 못하고 정글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청년이 마을로 찾아와 진정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하여 세례를 받는데 그곳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세례명을 받는 풍습이 있어서 어떤 이름을 갖겠냐고 했더니 존 셀린이라고 불러달라고 자기는 그분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선교사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감명을 받아서 선교하면서 겪었던 모든 어려움들이

그 한마디에 씻어 내려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고 하면서 자기가 그 청년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맞았을 때에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았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너무 컸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고 견디면 그것 때문에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주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이유 모를 어려움 속에서 슬픔을 가지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 앞서서 애매하게 고난을 받으셨던 그 주님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을 믿게 된 것을 생각하면 , 내가 하는 적은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수님을 보게 되며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참는 것입니다.

남에게 모함을 받을 때에 참는 것 ,이유 모를 재난과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참고 견디는 것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쓸 때에 견디기 어렵습니다.

제가 어떤 원로 목사님께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을 여쭸더니 그분은 주저하지 않고 목회를 하다가 사람들에게 억울한 말을 듣고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조를 하여 한 마디도 변명할 수 없는 때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것을 잘 참았을 때에 목회가 바로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목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는 억울한 말을 들으면 견디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전체 앞에서 밝혀내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점점 더 어려운 고난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겪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참습니다만 아직도 견디지 못할 때도 솔직히 있습니다.

목회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 있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놀라운 파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의 원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가정생활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고 참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여러분 자신도 복 받고 가정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작은 불이익도 감수하지 않고 작은 오해나 듣기 싫은 말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고난이라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아내면 하나씩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비로소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빛이 나타나고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가정과 직장이 변하고 우리가 속한 교회와 구역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말을 잘 하고 논리가 있고 힘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과 같이 , 요셉과 같이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아내는 삶이 있을 때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라기는 애매히 받는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요셉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참고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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