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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 / 민 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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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
성경> 민6:1-12
찬송> 137, 356장
설교> 이정우 목사 (장산교회)

●이 시대에 나실인이 필요한가?

‘나실인’이라는 어원은 ‘분리하다. 절제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그 뜻은 구별된 자(Seperated One)를 가리킵니다. 즉 나실인은 성별에 관계없이 일정기간 또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원한 평신도입니다.(레위기27:2) 이들은 자신들이 나실인임을 나타내는 몇 가지의 의무조항들을 지켜야 했는데 이런 것들을 이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세상과는 완전히 구분되어 하나님께 헌신하였다는 증거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는 구약의 율법이기에 오늘날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의 서약을 행한 사람 이야기가 신약 성경에도 나옵니다. 누구냐하면 놀랍게도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외친 바울입니다.

행18:18에 보면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겐그레아라는 곳에서 (앞으로의 남은 선교 사역을 생각하고는) ‘서원을 하고 머리를 깎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복음에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율법과 싸운 사람입니다. 이 바울이 나실인 규례가 율법에 있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스스로 나실인의 규례를 지킨 것은 이 나실인으로서의 규례가 얽매일 율법은 아니지만 그 정신에 따라 지키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함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가 나실인의 규례를 의무조항처럼 지킬 필요는 없지만 그 정신을 철저히 새기고 우리의 영적 유익을 취하는 일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은 말씀 속에서 나실인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며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서의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합니다.

● 1. 자원하여 서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2절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4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등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서원을 하는 것입니까? 서원이란 ‘나는 이런 이런 것들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시편15:4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담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부담스런 일을 왜 다른 사람이 시키지도 않는데 스스로 자청해서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랑을 헌신으로 나타내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실인의 서약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토대가 된 헌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엇인가 자꾸 해 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자꾸 그 사랑을 나타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고백만으로 부족해서 이것 저것 다른 것으로 그 고백을 자꾸 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경우,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 그는 일천번제를 드려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라.

물론 이런 나실인으로서의 서약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이렇게 서약을 하고 나실인의 기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실인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긴장을 합니다. ‘그렇게 쉽지 않는 서약을 나도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실인은 모두 다 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 자원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안심합니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헌신하고 싶어 했던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나실인의 규례를 정한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하여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께 구체적으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408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튼 은혜는”에서는 우리가 체험하는 은혜의 수준을 바다의 깊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다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간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보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결단과 그 은혜를 체험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2. 나실인으로서의 삶은 철저한 자기 절제를 요구합니다.(3-8)

3-8절에 나타난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보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헌신하면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실인이 지켜야 하는 준칙 사항들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정확한 사랑을 표현하고 더 큰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나실인은

①포도나무에서 나온 소산이나 그와 유사한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3,4)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사는 곳은 우리나라처럼 양질의 물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도주를 담아 물을 대신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금하는 것은 보통 힘드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것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나실인이라면 자신의 결단과 의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외적인 요소를 미리 배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알콜 성분이 높아지면 음료수를 넘어 술이 됩니다. 술과 음료의 경계는 참 애매합니다. 그러므로 쉽게 술에 취할 수 있습니다.
술은 인간의 바른 의지를 깨뜨리고 또 잘못된 의지에 대해서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생각날 수 있는 ‘생포도나 건포도까지 먹지 말라’(3)고 한 것입니다.

②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5)

길게 자란 머리는 힘과 충만한 생명력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의 예) 삼손은 머리카락에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머리를 기르는 것으로 인정하였기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머리를 기르는 것과 자르는 것은 그의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되었던 것입니다. 머리카락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리털을 기름으로써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세상이나 자신이 아니며 하나님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고전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③시체를 접해서는 안 되었습니다.(6,7)

시체는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나실인이 시체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죄와 구별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나타내었습니다.

나실인은 이와 같은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증거를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불편해지기로 작정하는 것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불편해지기로 작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더욱 잘 믿으려면 더욱 불편해지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먹는 것 하나까지 절제가 필요했습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하고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사이는 많은 사람들이 많이 먹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적게 먹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더 큰 어려움은 몰라서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절제할 수 없어 많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배에 포만감(飽滿感)이 있으면 흐뭇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배부르게 먹고 난 뒤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육체의 편의를 위해 자기의 육체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편해도 머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길러야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가야할 곳이나 있어야 할 곳을 잘 구분해야 했었습니다. 시체와 접촉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가족들 중에 장례가 나더라도 갈 수 없었습니다.(7) 굳이 그가 가고자하면 이제까지 그가 지켜온 서원기간은 무효가 되었고 정결의 예식을 행한 후에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관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서 헌신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에도 나실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해야 합니다.
누릴 것이 너무 많아 항상 고민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필요 없는 것들로 무거워진 나의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요사이 기름값이 올라가니 절약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차에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차 트렁크에 있는 각종 기구들이 차를 무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좀 더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 3.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9-12)

12절에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적이 있다면 낙심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에게 낙심이라는 선물을 줍니다. 이것을 받으면 안 됩니다. 특히 결단하고 했던 일에 실패를 맛보면 더 이상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혹시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낙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잠24:16에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실패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가 범죄하여 낙심하게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이미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보장받은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헌신의 작정을 하고서는 낙심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실인의 서약을 하고서 실패했더라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귀한 서원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만큼 서원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서원을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원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해 보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그 아름다운 각오와 결단들.
이제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당도 못할 것을 괜히 시작해가지고” “그래 그때 내가 객기를 부린거야”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가봐”
그러나 여러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나 귀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결단, 그 마음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단,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것을 더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 실패를 딛고 일어선 신앙의 위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이라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복하였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도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뼈아픈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야곱을 이야기하자면 실수투성이입니다. 얼마나 많은 좌절의 경험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자손들을 모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사람으로 생을 마칩니다.

신약에 와서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던 사람입니다. 인간사의 이야기로 말한다면 가룟 유다보다 더 큰 배신을 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배반할 것을 성만찬 석상에서 예언을 하였지만 베드로는 가장 확실한 주님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 집의 계집 여종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벽 닭이 울 때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그는 낙심이 되었을까요? 구전에는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만 나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을 좌절로 끝내지 않고 결국은 승리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용서를 믿었기 때문이며 주님이 실패를 믿고 살지 말고 사명을 믿고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나실인을 찾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자 100명만 달라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
100명의 하나님께 헌신된 자만 있어도 세상의 변화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교회에는 몇 사람의 나실인만 있어도 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주후200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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