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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은 저주인가? / 로마서 8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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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 : 11∼18, 고난은 저주인가? ,                  임학균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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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1-18]


1. 서론

인간은 왜 고난이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질문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일 것입니다. 가능하면 행복하기를 바라고, 건강하고 보람됨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또한 우리의 인생입니다.
마가복음 5장 25절 이하에는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12년간 앓아 온 병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지만, 치료는 고사하고 있는 재산만 다 까먹고, 이제 남은 것은 상처와 고통스런 육체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고통은 질병과 그것으로 인한 수치심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크리스챤 소설가 가운데 "미우라 아야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소설들로는 "길은 여기에" "양치는 언덕" 그리고 우리나라의 T.V로도 극화 방영되었던 유명한 소설 "빙점"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우라 여사의 자서전인 "길은 여기에"를 보면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결핵으로 거의 사경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유사한 질병으로 고생하는 신실한 남자 친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미우라 여사의 고통은 결핵과 그로 인한 절망감이었습니다.
구약의 욥기에 나오는 주인공 욥은 정말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한계점이랄 수 있는 고통의 정점까지 다다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슬하에 10남매를 두었으며 엄청난 재산과 많은 종들을 거느린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자식들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자기의 육체까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그 부인의 악담(惡談)처럼 하나님을 저주하지도 않았으며 자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기 1장 21∼22절을 보면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고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하든지... 내 마음 평안해..."로 시작되는 찬송가 470장의 가사를 보면 그 찬송을 지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그 찬양의 작시자인 스파포드 교수가 그 찬양을 작사한 배경을 보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파포드 교수는 자신의 재산을 시카고 대화재(大火災) 때 모두 잃어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위로파 유럽행 여객선에 승선하여 여행하던 부인과 네 딸들이, 항해 도중 선박 충돌로 침몰하여 사망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 고난을 잘 극복했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 평안해"라고 고백하며 찬양시를 만들었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으로 시작하는 찬송가 511장의 프렌티스 부인도 유사한 상황에서 그 찬양을 작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원치 않는 재난이나 질병으로 오랜 세월을 고통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육체의 질병이나 다른 종류의 재난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어디 이들뿐이겠습니까?


2. 고난과 고통

고난(苦難)과 고통(苦痛)은 차이가 있습니다. 고난이란 특정인에게 닥친 괴로움 자체를 말하고, 고통은 고난의 결과 느껴지는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승인 하에서 마귀에 의하여 저질러졌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잘 이겨냄으로서 오히려 더욱 큰 은혜를 입게 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고, 어떤 이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습니다. 또 어떤 이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온통 망가지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치 않는 고통은 왜 우리들 주변에서 맴돌면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간만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는 인간 외에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통에 걸린 자들을 고쳐주신 사역은 그 분이 행하신 일 가운데 뺄 수 없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3. 고통과 고난은 인간 차별을 하지 않는다

고통과 고난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빈부와 성별, 인종을 가리지 않습니다. 악인과 의인도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고난과 고통은 찾아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까지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죄인들이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단하는 고통은 나름대로 이해가 가지만, 이미 주의 이름으로 구원 얻어서 의인된 성도들이 고통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고통이 죄인들의 그것과 다른 점은 의인들의 고통은 하나님이 외면치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 의인도 고난을 당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81:7]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히 13:12]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2) 말세에는 특히 고통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세에는 영적 고통을 겪습니다. 다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생활의 고통을 겪습니다. 복잡해져 가는 문명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황폐해져 갑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4. 하나님은 왜 성도들에게 고통은 겪게 하시는가?

1) 고통은 기쁨을 주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영광을 얻기 위한 과정이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잠간입니다: 요한복음 16:21에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해산 할 때에 부인들이 산통에 얼마나 힘들어하는가는 산부인과에 한두 번만 다녀와도 잘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 산통을 겪고 난 뒤에는 해산의 기쁨에 그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도 첫 아이를 낳을 때에 밤 11시부터 산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출산한 시간은 다음 날 오전 9시 15분이었으니까 거의 10시간 전후의 산통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 제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던지, "차라리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낳고 말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사람도 저도 그 때의 일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귀엽게 잘 자라주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것만으로도 그 때의 고통은 모두 치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통이 오는 이유는 기쁨을 위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 그 분은 죽음의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큰 고난은 없을 듯 싶습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2)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려고 오는 섭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인지는 모르지만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된 질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한 것으로 보아 아주 고통스러운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자기의 육체에 가시가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므로 스스로 높은 체할까 하여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란 것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3) 터를 견고케 하고 강하게 하려고 고통을 주시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온 뒤에 땅은 더욱 굳어지는 법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강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베드로전서 5장 10절을 통해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4)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말하기를 자신이 고난을 통해 고통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여 범죄하였으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이 천천(千千) 금은보다도 더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시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5] 고통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뢰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컷던지 살고 싶은 마음까지도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그것은 세상과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고 주신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고통을 무작정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즐거운 일만 있으면 사람이 나태해 지기 쉽습니다. 고통은 우리들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과 자신에게 더 유익한 은혜를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올 때에 그 고통은 반드시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죄 함으로 인하여 오는 형벌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의로운 생애를 위한 고통을 겪는 것은 큰복인 것입니다.

4, 고통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셨고,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하여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시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3]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 140: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해결책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시 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3) 고난을 헤쳐나갈 길은 반드시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4]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에도 함께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영혼은 병들어 있다는 영적 불감증의 증거입니다. 문둥병의 상징적 비유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문둥이는 썩어 들어가는 살을 떼어 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답니다. 이처럼 죄에 무디고, 형제의 고통에 대하여 무디다면 그 사람은 영적 문둥병자요, 고통불감증 환자입니다.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5) 고통은 시험(test: 좋은 의미의 시험)과 유혹(tempt: 나쁜 의미의 시험)의 둘 중 하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을 면해 주겠다는 못된 유혹"과 또 하나는 "이 고통을 통해 나의 신앙이 시험을 받아 더욱 견고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유혹이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마귀가 사용하는 수단이라면, 시험은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기 전이나. 성도들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시험이란 단어는 모두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4장의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좋은 시험이었을까요? 나쁜 유혹이었을까요? 놀랍게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유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과 기도로 물리치심으로 우리에게 승리의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은 어느 쪽이어야 하겠습니까? 이왕 당하는 고통이라면 썩어질 것을 위한 고난보다는 영광을 위한 고난을 선택하여 헤쳐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편 유혹과 시험은 동시에 함께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유혹을 이겨내면 그것이 오히려 성공한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과 마귀가 동시에 그를 시험하고 유혹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욥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시험과 유혹은 죽을 때까지 따라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과 형태만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끝까지 영적 긴장심을 풀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허물이 사함 받았고, 그가 상함으로 우리 죄악이 용서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의인의 고통이나 고난은 영적인 영광을 가져 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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