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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쌍히 여기십시오 / 눅 6: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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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누가복음 6:35~36 
  제목 : 불쌍히 여기십시오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은 이웃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갖다 주신 적이 있습니까?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한 계획을 세워보셨습니까?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모두 꼭 같이 생각합니다. 참된 기독교 정신은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지적하는 신앙의 핵심을 모두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 . .”(약 1:27).

자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구약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내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신약 성경의 예수님의 가르침도 동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사도들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부터 주어진 바나바와 자신의 임무를 이같이 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 2:10).


이웃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무언가 신앙에 큰 결함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문제가 개인이든, 구역이든, 교회 공동체이든 긍휼이 여기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진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꾸준한 사랑의 실천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입니다.

자선행위는 다른 어떤 것도 열지 못할 듯이 보이는 굳게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요구하십니다. 친절한 행동 하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러나 강력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참된 신앙의 증표로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온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최근 언제 여러분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까? 아니 그 마음에 따라서 이웃을 섬기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어떤 식으로든 실질적인 사랑을 나타내 보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현재 여러분의 긍휼의 정도를 숫자로 적어보십시오. 볼펜이 없어도 됩니다. 마음속에 기록하면 됩니다. 그 숫자를 여러분 “개인적인 긍휼지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능지수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긍휼지수 측정해 보십시오. 0이라고 하는 것은 0에서 10까지 숫자를 가지고 한번 정하는 것입니다. 0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불쌍한 사람을 봐도 마음이 냉랭해져 움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10은 불쌍한 사람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테레사 수녀를 쏙 빼닮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 여러분의 상태를 나타내는 숫자 하나를 골라보십시오. 몇 년 전의 여러분의 상태를 지금 묻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앞으로 여러분의 상태를 내가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러분의 긍휼지수를 골라보십시오. 0에서부터 10까지, 그러나 5라는 숫자는 고르지 마십시오. 그건 너무 애매합니다. 나머지 숫자 가운데서 하나를 여러분이 골라서 마음에 쓰시던지 볼펜이 있으면 주보 귀퉁이에 한번 써 보십시오.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고린도 전서 13장 초두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중요하게 여기신 사랑, 바로 그 분야에서 여러분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개인적인 긍휼지수가 위험스러울 만큼 낮은 분은 없습니까? 그런 분은 하나님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는 심각할 만큼 부족함을 지금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부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지수가 한단계 한단계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복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도우면 우리는 더욱 쉽게 하나님의 표준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만 우리가 실상을 인정하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비를 나타내면 진리를 찾는 이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을 여러분은 목도할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진리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개인적인 긍휼지수를 한 두 자리 더 높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반대로 무엇이 여러분의 긍휼지수를 자꾸 떨어뜨리고 있습니까? 그것을 먼저 살펴보고 나서 긍휼 점수를 올리기 위한 어떤 처방이 있을지를 생각해봅시다.

긍휼지수를 떨어뜨리는 첫 번째 문제는 여러분이 살아온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 처한 생활 터전일 수도 있습니다. 긍휼이 긍휼을 낳는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인정이 넘치는 환경은 인정 많은 마음가짐을 갖게 합니다.

전 대학을 다니면서 해발 100미터 이상의 집에 있는, 삼복도로 위에 있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쳐 본적이 있습니다. 야학을 했습니다. 제가 야학을 하면서 몇 달 만에 깨달은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받아야 할줄 아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사랑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긍휼지수가 높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웃음, 사랑, 안정감, 받아들여줌, 그런 것만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좋은 직업 환경에서 지금 근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에서 일을 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지금 바로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높은 긍휼지수는 좋은 가정환경 때문이나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직장 분위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마십시오.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서 자신들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경멸은 경멸을 낳는다는 사실을 고난 끝에 터득하였습니다. 분노는 더 많은 분노를 만듭니다.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불러옵니다. 학대는 끊이지 않는 악몽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의 사람관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가까이에는 “당신 때문에 너무 기뻐요”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어째서 우리 가정은 저렇게 살지 못했을까? 여태껏 배운 것이라고는 두려움과 상처, 배신과 비통함 뿐이었어, 긍휼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내가 자비를 베풀지?”라고 탄식합니까?

“저는 부모님 가운데 어느 한 분에게도 인정이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살면서 나를 보물처럼 대해주는 친척도 없었습니다. 나를 깊이 사랑해 주고 있다고 느낀 친구조차 없었어요”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의외로 여렵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회사출근,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오는 직장들도있습니다. 일도 만만치 않지만 거기서 가지는 인간관계는 더욱 피곤하게 만듭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처신해야만 돼는 그것을 강요하는 직장들 말입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웬 종일 마음을 닫고 지내다 보면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을 닫고 있는 자신을 보고 놀라기도 합니다.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싶지만 그래서는 일이 되지를 않기에 주일날 교회서 생활하는 모습 다르고 월요일 직장에서 모습이 달라 스스로 생각해도 위선자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말씀의 빛 아래서 위로 대신 위축을 받기도 합니다. 격려 대신 침체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득 문득 이런 직장 옮기도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직장 환경 생각하면 낙담되고 진저리도 나지만 요즈음은 “잘 다녀오세요”라고 아침에 인사하는 오십대 여자는 얄미운 여자 명단에 오르는 시대입니다.

인생은 너무 짧고 세상은 긍휼에 너무 굶주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조금이라도 돕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머물러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아니면 여러분이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능히 그리고 기꺼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낮은 긍휼지수에 머무르는 또 다른 이유는 위태한 삶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음에 친절과 긍휼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직업적인 종교인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하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가족의 삶 전부에 치명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서 발길을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나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계속 늘어만 가는 필요한 돈을 꼭 벌어 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인생은 자꾸만 야박해지고 야박해집니다.

자신의 삶을 꾸려나기에도 헉헉거리는 처지에서 긍휼을 베푸는 일을 하기란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운한 사람에게 온정과 친절을 나누어줄 여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말까지 꼭 끝내야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에 귀중한 에너지를 쏟아 부을 처지가 아니라고 혼자 말을 합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부상당한 나그네를 지나칠 때 속으로 자기에게 속삭였을 수도 있습니다. “자네도 곤경에 처해 있지만 나는 지금 빨리 집에 돌아가야 되고 집에 가도 12시가 되어도 다 끝낼 수 없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네” 그러면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을 수 있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모든 일을 근무시간에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직업전선에서 성공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정말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엔진 회전수가 적색 선을 넘어선 생활을 하는 것은 대기업 중견간부들만이 아닙니다.

아이를 키운다고 바둥대는 젊은 엄마들, 지금 이 시간도 자모실에서, 영아부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어머니들, 영상을 통해서 예배하지만 설교를 따라잡기란 낙타가 바늘귀에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게다가 직장 생활까지 하는 엄마들, 집에 돌아오면 또 주부가 해야 되는 일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 속에서는 더 말 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나칠 정도로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도 그 목록에는 있을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이렇게 정신없이 생활하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혼잣말을 되뇌이기도 합니다. 위험스런 삶의 곡예를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긍휼지수가 높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줄 시간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어디엔가 깊이 몰두하고 싶지만 어떤 일도 할만한 여유를 찾을수 없는지 오래 됩니다. 힘과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만남은 전도의 시작”인줄 알면서도 발을 내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인생 걸음을 조금 늦추시기 바랍니다. 느리게 사는 법을 묵상하고 시도해 보십시오. 그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개입해서 사랑을 베풀고 싶은 마음도 생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속 160-180 킬로미터로 달리는 과속인생은 주위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달리는 그 길만 바라볼 뿐입니다. 50-60 킬로로 천천히 국도를 달려 보십시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즐기게 될 것입니다. 길가에 도움의 손을 드는 사람들을 위해 차를 멈추기도 쉬울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느슨한 행보가, 천천히 걷는 걸음이, 일상 가운데 동정을 베푸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따뜻한 감정을 저축해 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위태위태한 생활에서 이제 벗어 나십시오

빠르고 큰것만이 성공의 지수가 아닙니다. 위태위태한 삶의 속도를 조절하게 되면 긍휼지수가 두세 단계는 높아질 것입니다. 조만간 여러 가지 일들을 조정하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삶을 시작하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울산교회 지하, 그리고 본당 1층을 리노베이션 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가집니다. 오십대 나의 인생도 빨리 리노베이션 해야만 쓸만한 사람을 될거라는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은 긍휼지수에 머무르고 있는 그럴싸한 세 번째 설명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문제는 아니지만 혹 여러분 자신의 문제는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지나친 관심, 지나친 동정과 긍휼을 베풀다가 퍼져버린 경우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지나친 긍휼도 사람을 소진시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은혜를 받고 보면 온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더 이상 이기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결심합니다. 이기적인 삶을 살아온 것은 지금가지로 충분하다고 느낍니다. 이제부터는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베풉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여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수도관 노릇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베풀고 또 베풀고 또 베풉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베풉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분노를 느끼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끔 선교사들도 마찬가지 더라고요. 사랑을 전하려 찾아간 선교지에서 조금 몇 달 지나다보면 현지인들을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혹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금방 자신들의 일을 줄이거나 속도를 늦출 수도 없습니다. 비록 전처럼 자비의 행위 가운데 깊은 마음이 담겨져 있지는 않지만 그 경고 를 무시하고 여전히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창 내려앉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친 짓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데 나를 염려해주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지? 마음이 공허하고 분하고 혼란스러워, 나는 주고, 주고 또 준다구. 그러나 보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울산교회는 후원금 몇 푼 보내놓고 나서 날 위해서 무얼하고 있어? 내 생일이 지나가도 기억을 해주나, 성탄절이 지나가도 선물하나 보내주나. 선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날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나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혼란감에 사람들은 빠져 들기도 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사람을 돌보던 추가 반대쪽으로 가서 이제 다른 사람을 헐뜯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젠 내가 받을 차례야”라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불행히도, 여러 해 동안 그 지점에 멈추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10년, 2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여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 울산교회에도 있습니다. 남보다 열심히 주님의 교회일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를 입게 될 때에, 저희는 이쪽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앞장섰던 사람인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멈추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열심히 하다가 상처를 입고 열심히 자기일 하다가 스스로 소진되고 만 것입니다. 불타 버리고 마음은 냉랭해지고 친절을 베풀던 행동의 추는 반대편에 고정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달라는 요청만 들어도 신경질 납니다.

“난 이제 그런 일을 할 수 없어, 전에 어땠는지 생각해 보라구, 내 인생을 거의 파멸시켰어!”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과 자신을 돌보는 것 사이에 균형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반드시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배워야 긍휼을 베푸는 과정에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탈진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야고보서에는 그는 가장 자비하신 분이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그처럼 열심히 베푸는 삶을 사셨던 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젠 됐어, 나는 기도하러 산에 혼자 올라가야겠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원기를 회복해야 되겠어” 라고 산으로, 한적한 곳으로 그 발길을 옮기시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현관문이나 방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 방문이 언제나 열려 있기만 하면 그 문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닫혀만 있으면 그 문은 벽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문은 돌쩌귀와 자물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열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닫아 놓기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결혼 하면 자기들의 집을 지체들을 위해서 개방하겠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개방하면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의 보금자리는 사라집니다. 물론 언제나 닫아두어도 사람 가운데 살게 하신 하늘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를 위한 시간도 꼭 필요합니다. 전도서를 살펴보십시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 .”(전도서 3:1-3).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자신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땀 흘리며 남을 위해 일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발을 편안히 뻗고 웃으며 인생을 즐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휴식을 취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이웃을 위한 긍휼의 에너지를 축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왜 긍휼지수가 낮은지 마지막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랑은 사랑을 기르고, 긍휼은 긍휼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생생한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와 친절을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 주는 수도관이지 저장탱크는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과 나는 전선이고 하나님은 전류입니다. 우리는 전류가 우리 몸을 통과하여 세상에 빛을 발하도록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빛을 발하게 합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총과 긍휼을 감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향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엡 5:1)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권면을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도관 계획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받았습니다. 용서와 구원, 새로운 관계, 응답받는 기도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을 기적적으로 공급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일상적으로 때로는 과분한 것들을 선물로 누리기도 합니다. 일용할 식빵만이 아니라 잔치용 케이크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받는 데만 열중하기 때문에 긍휼지수가 떨어집니다. 그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일푼의 채무자와 같습니다. 이 사람은 산더미처럼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빚 갚을 날이 다가 왔습니다.

채권자가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거래는 거래요, 만일 빚을 갚을 수 없다면 당신과 당신의 예쁜 아내 그리고 귀여운 자녀들도 종으로 팔아 버리고 당신이 평생 동안 일해서 빚을 갚아야 되요”

그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일해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습니다. “주인님,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청을 했습니다. “마음속에 제게 베풀 아주 작은 친절이라도 남아있다면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채권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어음을 찢고 약정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좋소, 당신은 자유요” 그가 맛본 긍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남자의 온 몸에 흘렀을 감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유다! 부채가 탕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한 자매를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 2년 동안 단기선교사로 가서 아주 귀한 사역을 감당했던 자매입니다. 2년 동안 단기사역을 하는 동안에 오빠가 사업을 해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습니다. 빚만 산더미처럼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갚기 위해서 정말 정신없이 지난 8년, 7년 동안을 고생했습니다. 며칠 전에 편지를 해서 목사님, 지난 일들에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빚을 다 갚았습니다. 어쩌면 빚을 갚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제게 편지를 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빚을 다 청산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 친구를 한번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긍휼이 긍휼을 낳도록 하였습니까? 자기의 인생행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까? 아닙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자기에게 몇 푼 빚을 진 사람을 만나서 호통합니다. “갚아 임마! 안 갚으면 법대로 처리해서 한 푼 남기지 않고 다 받아내겠어”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조금만 연기 해 주세요. 제발 인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곧 갚겠습니다.” “절대 안돼, 거래는 거래라는 것을 명심해”라고 호통을 치면서 그 몇 푼 안되는 빚 때문에 그 사람을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결말을 벌써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 악당 같은 놈을 원래의 채권자가 불러다가 말합니다. “네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을 때 나는 최선의 조치를 취해 주었다. 너는 엄청난 긍휼을 입은 자이다. 그런데 고작 몇 푼 네게 빚진 그 불쌍한 사람을 감옥에 쳐넣었다고?”

“자넨 잘못 한거야,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하겠어, 자네와 자네 가족들은 평생 동안 그 빚을 갚아야 해, 이제 한 푼도 어림없어” 그 앞 뒤 없이 행동한 악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저는 어린시절에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분이 치솟았어요. 치리해야 마땅하다고 나는 그쪽에 가편 투표를 했습니다. 50평생 살면서 살펴보니까 부끄럽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주님께서는 자비는 자비를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은혜는 은혜를 낳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엄청난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무일푼 채무자처럼 평생 두고도 상환할 수 없는 엄청난 부채를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우리 인생에 모셔 들이던 그날 감격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날 우리의 모든 죄의 목록은 지워졌고, 찢겨졌고, 불살라졌습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받은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죄 사함 받고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라고 목청껏 노래하던 그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몇 십, 몇 백만원 받을 돈에 집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너무 은총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친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긍휼을 받는데 익숙해져서 거기에 머물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긍휼지수에 만족하십니까? 그 수치 얼마를 기록했는지 여러분은 아십니다. 여러분의 긍휼지수를 한 두 단계 올리기 위해 어떻게 새로운 처신해야 할까요? 두세 단계 올라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가족들이, 직장동료들이 여러분에게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보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틀림없이 살아계셔, 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보라구, 어떻게 저런 친절을 저 김씨가 행할 수가 있어. 뭔가 저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어”라고 그들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 아버지 이렇게 변한 것 보니까 우리도 아버지처럼 신앙생활 해야지 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가슴속에 담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 자비하심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십시오. 긍휼지수를 높이기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비하신 하늘 아버지를 더욱 닮아가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햐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기억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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