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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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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한신교회/3월23일 주일 낮 설교
 
  예수님의 침묵(눅 23:6-12)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이 비난을 받고, 나쁜 사람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고 말문이 막히게 되는데, 이런 때는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위를 가려야 될 일인지, 아니면 침묵을 해야 될 일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침묵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침묵하셨는데,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고난의 종이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고난을 받을 때, 변명하실 수 있었지만,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불공정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묘실에 매장되십니다. 죽으시는 데도 침묵하신 것입니다.
「J. 드라이든」이라는 사람은 '고통 중에 침묵은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때로는 참고 기다리며 침묵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분을 못 삭여 진위를 가리겠다고 울분을 터뜨려 보아야 인격만 손상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침묵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신 다음, 다시 헤롯에게 넘겨져 심문받으시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고소 사건이 유대인들 내부의 문제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개입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서 빠져 나갈 궁리를 합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지방의 분봉왕 헤롯에게 넘깁니다. 헤롯의 통치권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골치 아픈 사건을 떠 넘긴 것입니다. 그 속셈도 모르고 헤롯은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한 헤롯은 여러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심문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답할 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헤롯이 이적을 신기한 것으로 보고 구경거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대답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헤롯이 어떤 사람인데 침묵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침묵은 안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헤롯의 권력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비겁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생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했습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삶을 구경거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야 할 분을 광대의 구경거리 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왕을 몰라 본 것입니다. 시편 14: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했는데, 정말 그 말씀이 맞습니다. 어리석어서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구경거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도 헤롯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시골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전 면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더랍니다. 내일 군에서 높은 사람들이 오시는데, 목사님도 오라고 말입니다. 전화를 받고 나서 목사님이 마음이 상했다고 하십니다. 교회와 목사를 어떻게 알기에 군에서 높은 사람들이 오니까 일방적으로 나오라고 요청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특별히 요즈음 돈이나 권력, 오락과 쾌락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막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과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속주가 아닌 선한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예수 신앙을 마음수양을 위하여 믿는 정도로 낮추어 버리는데, 말문이 막혀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더 큰 문제는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신앙을 생활로 연관시키지 않고 종교적인 의식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신앙이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빨리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다 살고 후회하게 되고, 실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질병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주가 되십니다. 마 16:16절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힘과 능력과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모시고 섬겨야 할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신앙을 고백할 수 없으면 헤롯이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생각한 것처럼 예수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주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여워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혜롯은 예수님을 진지하게 대하기를 거절하고 구경거리, 농담거리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행동이 가관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자기 궁금증을 풀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뻐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헤롯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는 비윤리적이고, 매우 난폭한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자기 동생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여 세례요한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고 세례 요한을 칼로 목베어 죽이는 참수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던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실 때, 혹시 죽었다가 살아난 세례요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예수님을 대면하고 보니 세례 요한이 아닌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평소의 공포심이 청산되면서 호기심이 발동하여 예수님을 희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입을 안 여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묵비권을 행사하신 것이었습니다.
본문 9절에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것도 대답치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다니신 예수님이 헤롯 앞에서는 입을 닫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너의 궁금증이나 풀어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바로 너를 구원하러 왔다. 그런데 네가 나를 광대 취급을 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랴'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에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통하지 않을 인물이기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만약에 예수님이 그 때 헤롯에게 말씀을 하셨다면 어떻했을까요? 한마디로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미 완고하고 패역한 마음으로 굳어진 헤롯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거나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습니다. 만일 헤롯이 인격이 된 사람이라면 그 이전에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잘못을 경고했을 때 당연히 귀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4:4절에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 경고에 대해서 헤롯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헤롯에게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거나 이적들을 행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말로는 안되는 더러운 개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천 마디, 만 마디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 7:6절에 보면,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화인맞아 더러운 헤롯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침묵을 통해서 말로 한 이상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말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말은 적게 하고 일은 많이 하라'고 했습니다. 또 '언변은 1세겔에 사고 침묵은 2세겔에 사라'고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묵이 더 유익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달리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인지, 안 해야 할 말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 자기를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말을 잘하기 보다 말을 절제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야고보 사도가 혀의 위험성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말이 재갈 먹여 다스림을 받는 것처럼 사람의 혀도 그렇게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6절)고 했습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므로 항상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서 제일 많이 드는 시험이 말일 것입니다. 어디든지 말쟁이는 있습니다. 혹시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 따지고 싶으십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다면 차라리 참는 것이 좋습니다. 손해가 나도, 기분이 나빠도 침묵할 때는 침묵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침묵해야 하는 것입니다. 꼭 진위를 가리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을 했는데 마리아가 임신이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조용히 끊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침묵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면 처녀가 임신을 한 일은 큰 일입니다. 사람들이 수근덕거렸을 것이고, 또 요셉도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침묵하고 순종합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인격과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내 기분과 감정보다 하나님과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나만 침묵하면 조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지는데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온 종일 말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말 수를 줄이는 훈련을 좀 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침묵하는 훈련을 해야 경건 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야 1: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무조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말을 잘하는 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도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 앞에서 침묵으로 자기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본문 1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예수님과는 반대로 말을 많이 합니다. 아마 말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진실하지 못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말이 많은 법입니다.
예수님은 말이 없고 대적자들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헤롯은 침묵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윽고 그의 더러운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에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빛난 옷을 입히고 조롱했습니다. 당시 이 빛난 옷은 고위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이 입던 은실로 짠 흰옷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때 자신을 왕이라고 했던 것을 야유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그런 옷을 입히고는 '네가 과연 왕이냐'고 하면서 조롱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이런 자에게 무슨 말이 통하겠습니까? 우리는 왜 예수님이 침묵을 하셨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큰 권력이 있었기에 갈릴리의 목수인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함부로 취급해도 상관이 없는 평범한 사람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악하고 잔인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이 진리를 이야기하신다고 받아드리겠습니까? 마음이 닫혀진 사람이고, 화인맞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받아들일 마음의 상태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침묵해 버리셨겠습니까?
오래 전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친구가 수사기관에 끌려가 간첩과 접선을 했다는 자백을 하라고 강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수사관이 간첩과 내통한 것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소설을 쓰는데 너무 어이가 없더랍니다. '내가 이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해서 침묵을 지켰다'고 합니다. 협박을 하고 폭행을 하고 고문을 해도 침묵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그가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엄청난 거짓 앞에 말문이 막히니 저절로 침묵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헤롯처럼 권위있는 자리에 있다 보면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 없어도 예수님은 알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자기 밑에 있는 사람으로 밖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이 있는데, 그들은 하늘도 무섭지 않은 자들입니다. 교만이 머리 끝까지 찬 자들입니다.
아마 이런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서 자기들이 저지른 그 추악한 사실이 드러날 때, 거기서 저들의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심판주되시는 주님의 추궁에 이번에는 저들이 침묵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 속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을 봅니다. 나약한 것 같지만 오히려 권세자들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이 헤롯보다 더 당당하셨을 것입니다. 눈이 빛나고, 확신에 차 있고,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한 눈에 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지금 헤롯 앞에 있는 순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렵지 않고 더 당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만 많이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말이 있어 말을 하니 말 많을까 하노라'는 말이 있는데, 말의 피해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말을 잘못하면 사단이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생활이 뒷받침되는 침묵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으로 침묵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는 것입니다.








자가를 포기하고 자기 안일과 영광을 구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쌕는 밀알이 되든가 어느 한 길을 택해야만 했읍니다. 그것은 곧 자기가 이
땅에 온 목적을 포기하느냐 성취시키느냐의 피할 수 없는 선택적 순간이었
읍너다. 그는 이런 결정적 순간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해 보려고 하
지 않았옴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계셨읍니다. 그래서 그는 감람산으로 가셨읍니다‥‥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을기시옵소
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읍소서『라고 기도
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주변에서
몇 가지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고난애
대하여 가지시는 제자들을 향한 태도인 것입니다. 첫째로 그가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 것을 아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
하셨읍니다. 본문 27절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H 한 것이나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좇겠나이다"고 장담한 베드로를 향해서 ·,닭이 두
번 을기 전에 테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것은 특별한 의
미를 볼 수 있읍니다. 차라리 이런 제자들을 안 데리고 가시는 것이 예수
님에게는 평안할 것입니다. 잠꼬대하는 모습은 예수님에게 장애물인 존재
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갔다
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다는 사
실입니다. 그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모두 그를 버리게 될 것을 아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음을 볼 수 있읍니다. 자
기의 피땀을 훌리시는 기도를 중단하시면서까지 세 번이나 찾아 오선서 자
기와 함께 기도할 것을 요구했읍니다. 잠자는 베드로를 향하여 H네가 한
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D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
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t라고 하시면서 침통해 하시
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읍니다. 비록 얼마 안 있어 --
기를 버리El 도망칠 약한 제자들인 것를 너무나 잘 아셨지만 주님은 이들
이 자기의 기도의 자리에 다만 한 시간이라도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셨던
그리스도와 함에 445
것입너다. 세째로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자리, 즉 자기의
죽음의 자리에까지 함께 가자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자기가 뭔수
들에게 잡히는 순간 뒤로 돌아블 여지도 없이 사방 팔방으로 활똴이 흩어
져 도망칠 제자들인 즐 아시면서도 그는 본문 42절에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이 자기
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셨읍니다. 비록 연약하고 겁이 많고
그리고 보잘것없는 그의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자기의 위대한 구속일 사
업에 끝까지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원하셨읍니다. 실제 당신의 환경과 사
건에서 제자들의 도움이나 호위가 그에게는 아무런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
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고난의 자리에, 중보의 기도의 자리에,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가자고 하신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소망을 주려 하신 것입
니다. 우리는 이런 성서적 배경에서 오늘의 문제로, 즉 우리의 주변적 상
황에로 눈길을 돌려 이 말씀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현대적인 의미를 찾
아 봅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그의 기도와 고난
에 동참하기를 원하고, 또 요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자
신을 살펴 봅시다. 우리들에게는 얍복강가의 실쫀적인 투쟁의 기도를 거
의 찾아볼 수 없읍니다. 이미 신앙은 건너야 할 얍복강의 절실한 문제가
아니라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들에게는 히스기야의 민족을
위한 기도가 없음을 봅니다. 자신의 병든 생활을 위해 기도함도 없읍니다.
과연 이 민족이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잘 되어가고 있는 것
입니까? 인간은 극한 상황에 다달았을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 나놘 버룻
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자기의 신앙 생활을 위한 하
나님과의 진지한 투쟁을 위해서, 히스기야처럼 이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병든 신앙 생활을 위해사. 그리고 온 인류의 우주적 구원을 위하여 기도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감람산으로 가야 합니다. 작은 문제건 큰 문제건 간
에 우러는 이제 겟세마네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그리스
도의 기도하라는 요청은 언제나 첨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부딪쳐음을 뿌
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순간 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결정장
임을 우리는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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