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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기적 / 고전 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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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의 기적 
본문 : 고린도전서 1:22~25   
설교 : 곽주환 목사 (구로중앙교회)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져있는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져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고, 헬라어는 그리스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이다. 이러한 뿌리에서 기독교 신앙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유대인들, 히브리인들에게 뿌리를 둔 것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헬라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중심하여 생각한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인간을 중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유대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이었다. 열 가지의 재앙으로 출애굽하게 되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구약 전체를 통해 나타난다. 그들의 반복되는 패턴을 단계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유대인 개인이나 공동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야웨 하나님께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봐 달라고 부르짖고 호소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능력과 기적,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그들은 그들을 도와 주시는 야웨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그러나 또 시간이 흐르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능력과 기적은 까맣게 잊은 채, 다시 그들의 이기와 정욕에 따라 하나님께 범죄한다. 그 결과, 그들에게 다시 환난이 닥쳐오게 되고,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또다시 되풀이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겪어온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에 계속해서 기적을 요구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자리에서 뛰어 내려보라”고 기적을 요구하였다. 특히 구약성경에 보면 나무에 매어 달려 죽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인 사건인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가졌기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강력한 힘을 지닌 슈퍼맨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는가? 십자가 상에서 말도 없이 십자가 상에서 목마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정말로 처절하게, 연약하게 죽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기적을 원하는데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죽고 말았으니 십자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처럼 느꼈다.

이같이 유대인들이 기적을 바랐다면 헬라인 들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었다. 지혜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웅변술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이 발달하고 웅변술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가가 나왔고 그 전통에 이어서 서양의 철학이 발달하였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 참으로 미련해 보였다. 참으로 바보처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유대인 형의 사람이 있고 헬라인 형의 사람이 있다. 유대인 형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슈퍼멘이 나타나서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러한 사람이다. 헬라인 형의 사람은 고상한 삶, 뭔가 깨달음을 기다리는 사람, 지적인 충족을 원하는 사람이다.

먼저 유대인 형의 사람은 기적을 원한다. 기적이 나타나면 믿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사업을 하는데 이 사업이 잘되면 하나님을 믿고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생각. 불치의 병이 걸렸는데 이 병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으면 믿지만 병이 낫지 않으면 않 믿겠다는 생각. 기도했는데 자녀가 시험에 합격하면 믿고 떨어지면 믿지 않겠다는 생각.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되도록 우리를 도와 주신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예수 십자가에 중심을 둔 믿음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악이 많이 있는데 이 악을 하나님께서 확 쓸어버리지 아니하시는가?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젊은 여자들을 정신대로 잡아가는 과오를 범했다. 어떤 정신대 출신의 할머니는 “새롭게 태어난다면 가정을 이루고 예쁜 딸을 나아 길러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가슴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날 이북에서는 몇 사람의 이득을 위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당장 몇 사람이 죽어서 통일이 되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지금 뭘하고 계시는가? 화끈하게 뭔가 보여 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즉각적인 기적에 근거를 두면 십자가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우리는 기적과 표적이 근거를 둔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중심을 둔 믿음이어야 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건다. 나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이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 동안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동안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반대로 오늘날 헬라인과 같은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예수의 사건은 이성적이지 못해서 못 믿겠다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가는 생각이다. 지금 얼마나 과학이 발달된 시대인데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예수가 탄생하다니. 도저히 지혜롭지 못하고 이성에 맞지 않아서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가 있을까? 이런 성경의 내용을 볼 때에 십자가의 사건은 엉터리같은 사건이라서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이같이 오늘날에도 유대인이나 헬라인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기적을 보여줘야 믿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뭔가 생각데로 착착 맞아져야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전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약해 보였지만 그 십자가는 엄청난 힘을 가진 하나님의 능력이다. 산에 호랑이하고 토끼하고 있다. 어떤 것이 힘이 세겠는가? 물론 호랑이의 힘이 더 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 수록 호랑이가 많아지는가? 토끼가 많아지는가? 토끼가 더 많아진다. 유대인들은 강한 힘을 가진 메시야, 기적을 일으키고 어려운 문제를 즉각 풀어줄 호랑이와 같이 힘이 센 메시야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마치 힘없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다. 호랑이와 같이 강한 힘을 지닌자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해 보이지만 호랑이보다 더욱 많아지는 기적을 일으킨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약한 것처럼 보이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미련한 것처럼 보여서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한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면 어떤 능력이 있는가? 십자가는 곧 살리는 능력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도 좋다. 내가 사는 동안 성공하여 부자가 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대학입시에 합격하는 것도 중요하다. 풍성한 양식이 있어서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다.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으면서 사는 것도 중요하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죽음의 문제이다. 우리의 육신이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산다면 어떻겠는가? 비록 삶 속에 고통이 있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유대인들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메시야를 원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바울의 마음 속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 구원의 기쁨을 줄 수 있는가? 물질인가? 명예인가? 학식인가? 건강인가? 아름다움인가? 어떤 것도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헬라인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은 무식해서 읽지 못하겠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렇게 원시적인 내용을 읽고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였고 헬라인은 지혜를 원하였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그러면 십자가는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평화를 이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은 지금 전쟁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십자가는 막힌 담을 헐고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하나님의 지혜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분열이 있었다. 분쟁이 있었다. 싸움이 있었다. 이러한 분열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룬다. 십자가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나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일이 힘들고, 고통 스럽고, 어렵고, 괴로워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만, 미련해 보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져 있다.

하버드 대학의 전총장이었던 나단 퍼시(Nathan Pusey) 박사가 젊은이들은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목숨걸 대상”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어디 젊은이들 뿐이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들 깃발을 찾고 목숨걸 대상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헬렌 켈러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여사님! 당신은 맹인인데 맹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재빨리 “눈은 있지만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가운데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날 채플린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달리는 전차에서 웬 깃발이 하나 떨어져서 채플린은 무심코 그 깃발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채플린이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군중들이 채플린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한 채플린은 그 깃발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갑니다. 그러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채플린이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는 쫓아갑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단면입니다.

채플린은 방향이 없이 표류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렇게 그린 것입니다. 불행한 모습입니다. 흔들 깃발이 없이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정신적 공황, 비전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돈을 향해 달려가고 출세를 향해 달려가고 쾌락을 향해 달려갑니다. 마치 그런 것들이 흔들 수 있는 깃발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목숨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흔들어야 할 깃발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깃발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깃발을 흔들며 온 천하를 달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흔들 깃발은 복음의 깃발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1:23)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가 흔들어야 할 깃발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가 목숨을 걸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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