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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주인공 / 계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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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주인공
계 4: 1-4
광성교회 (김창인 목사)


  오늘은 요한계시록 4장 1절에서 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의 주인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모였을 때 베드로에게 "네가 젊었을 때에는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사람들이 너를 띠 띄우고 원치 않은 곳으로 데려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순교를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바로 옆에 있는 요한에 대해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러 있게 하고자 하나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부터는 요한에 대해서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 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자세히 기록한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쓸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로마 정부의 미움을 받아서 지중해 가운데 있는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주의 날을 당해 에베소 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릴 텐데 어떻게 되고 있는지 걱정입니다. 돌 바위틈에 엎드려 기도하는 중에 하늘이 열리고 환상이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환상의 내용중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도 받지 못했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의 주인공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요한이 받은 은혜는 우리도 받아야 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으로 끝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은혜의 주인공"이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따라 본문에 기록된 은혜는 어떤 은혜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열림의 은혜 (1-)

  '열림의 은혜'는 '하늘이 열리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분명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니 성령이 임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하늘이 열리고 난 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하고 있는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삼층천 즉 하늘 나라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하늘 나라에 갔다 온 다음에 설명을 하라고 하자 말을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하늘 나라가 좋은지 세상의 것으로는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늘이 닫혀 있다고 해 보십시오. 누가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스데반이 전도 열심히 한다고 붙잡혀 공회 앞에 섰을 때 모든 사람들이 보니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풀어서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를 너희가 죽이지 않았느냐? 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외침을 듣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쳐서 죽입니다. 그 때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더니 하늘이 열렸습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 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만은 서 계셨다는 것입니다. 서 계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지금 스데반이 순교를 당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일어나 서 계심은 격려하는 뜻입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그 장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올라오면 환영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 계셨다는 것은 스데반을 향해서 축복을 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열려서 그 장면을 볼 때 스데반이 순교하면서도 웃을 수가 있었고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그렇게 복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각자에게도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하늘이 열려야합니다. 하늘이 닫히는 날에는 절망이요, 낙심이요, 좌절이요, 결국은 큰 변이 날일입니다. 열림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은혜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 후에'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3장에 걸쳐서 기록된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이 있은 후에 라는 말씀입니다. '그 환상을 보고 기록한 후에' 라는 뜻입니다.

'내가 보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보았다는 말입니까?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 섬에 정배를 가서 유배 생활의 어려움 중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는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을 바라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리로 올라 오라'는 말씀은 하늘이 열린 사람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은 인류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밧모 섬에 정배가 있어서 온갖 고난을 당한 사도 요한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열린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에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에게도 항상 하늘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늘 나라요, 우리의 본향이 하늘 나라요, 우리는 그 나라 시민권을 가진 그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이 땅이 아닌 하늘 나라를 늘 바라보면서 사는 천국 시민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항상 하늘 나라가 열릴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열리면 성령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늘 나라가 열리면 하늘의 희망이 새로워집니다. 하늘 나라가 열리면 온갖 축복이 거기에서부터 쏟아지는 것입니다. 만나처럼 말입니다.

  만약에 하늘이 닫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의 비유 가운데 하늘이 닫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이제 주려 죽는구나'라는 탄식뿐이었습니다. 절망이요, 좌절이요, 죽음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하늘을 바라 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델마 톰슨이라고 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군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동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여기에서 1, 2년을 살면 저기에 가서 1, 2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별 별 곳을 다 가 보았습니다. 기후와 환경이 좋지 않은가 하면 주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막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오지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참기 어려운 곳에 배치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그런 온갖 불평을 담아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단 두 줄로 대답을 했습니다.
  [두 사나이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한 사나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기뻐하는데 한 사나이는 냄새나고 더러운 시궁창을 바라다보면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감옥이라고 하는 좋지 않은 환경은 똑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아니면 냄새나고 더러운 시궁창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느냐? 세상을 바라본다면 너는 좌절이요, 실망이요, 낙심할 수밖에 없고 불평 불만 일 수밖에 없지만 하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 때 그 딸이 거기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원주민과 교제하기를 시작합니다. 원주민을 가르쳐 주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자기 일감을 찾습니다. 얼마나 거기에서 보람있는 인생을 찾았는지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 하늘이 열리는 자에게는 이런 아름다운 삶이 전개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체험의 은혜 (2-3)

  체험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까닭에 나는 어머니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남들이 어머니를 찾으면서 그렇게 울고 감격을 할 때도 감격이 전혀 없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 죽음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배우는 것입니까? 내 생활 속에 체험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다윗의 간증과 고백이 여기에서 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능력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또 축복을 배워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림의 떡이 아닙니까? 아무리 배워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림의 떡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축복은 받아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이렇게 되더라 하고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체험이 없다면 신앙인으로서는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믿음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의 모든 약속들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에서 3절을 보면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온갖 유배 생활의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보좌가  나타나더니 어떤 분이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형체라는 것은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래가 형체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까닭입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라 하였습니다. 벽옥이라고 하는 것은 다이아몬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홍보석은 아주 붉은 색을 띄는 보석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즉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모양이 사랑과 공의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만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서광이 둘렸다. 또는 서광이 비추었다는 말입니다. 그 서광을 보니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녹보석은 은혜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보고 하나님을 체험했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밧모 섬에서 유배를 당해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만날 수 있었다 또는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늘이 닫히고 도무지 하나님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사도 요한은 이런 은혜, 저런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늘 나라 즉 위엣 것을 찾고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공간적인 하늘을 처다 보면서 보좌를 베풀고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그 하나님은 성경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항상 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신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공부하십시오. 배우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 속에서 만나는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체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체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본래 이름이 사울입니다. 첫째로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예루살렘에 유학 할 만큼 아주 부자로 살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 때 유대 나라에서 최고를 자랑하고 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울 것을 다 배웠습니다. 셋째로 대제사장의 신임을 받고 대제사장의 권세를 그대로 위임해 주는 위임장까지 받았습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은 큰 부자로 살았기 때문에 되었다는 것입니까? 가말리엘에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워서 되었다는 것입니까? 대제사장에게서 그 엄청난 권세를 위임받아서 되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 가지고도 그는 그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면서 얼마나 유세를 부렸습니까? 다메섹 길에서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빛이 나타납니다. 빛으로 임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다음 사명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때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평생을 그가 목숨을 내 놓고 봉사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의 은혜를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한번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깊이 기도하는 중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로 이끌려 갔습니다. 하늘 나라는 내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을 이끌고 갔습니다. 삼층천 하늘 나라 세계를 보여 주시는데 세상에 다시 살아 돌아와서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상 하늘 나라는 설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삼층천이 너무 좋은지라 빨리 자기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죽음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내 놓고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이런 은혜 때문에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바울 사도처럼 내가 나 된 것은 이러 이러한 체험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되었다라고 간증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체험의 은혜는 이렇게 귀하고 갚진 것이요, 복된 것입니다.


  셋째, 중심의 은혜 (4-)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을 보면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

  2절과 3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를 둘려 이십 사 보좌가 있고 거기에 이십 사 장로들이 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십 사 장로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가운데 있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장로들이 앉은 보좌가 둘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이십 사 장로라고 하면 세상에서 이십 사명의 장로만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보좌를 둘려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장로는 오늘 날 믿는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들입니다. 이십 사 장로는 반드시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 예수 중심으로 사는 사람,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로 흰옷을 입은 것처럼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다하고 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미국과 캐나다 경계를 흐르고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굉장하지 않습니까? 제가 어려서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꼭 보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일본의 후지산입니다. 가서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또 하나는 미국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였습니다. 몇 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남미에 가면 이과수폭포가 더 크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수 위로 캐나다 쪽에 외줄을 건너 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무엇 하러 매어 놓았겠습니까? 미국 땅에서 아저씨 한 분이 외줄 위를 아슬 아슬하게 걸어서 캐나다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져서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캐나다까지 무사히 왔습니다. 거기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때 외줄을 타고 온 분이 "내가 저 외줄을 타고 다시 건너갈 것을 믿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의심없이 믿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누구든지 나서서 내 등에 업히십시오. 그러면 내가 업고 건너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섰겠습니까? 안 나섰겠습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나가더니 등에 업혔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기자 한 분이 "너는 겁이 나지 않느냐? 어떻게 업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아이가 "이 분이 내 아버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그 아버지의 아들만이 업혔고 아저씨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업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저 아저씨가 건너온다' 하였지만 아들은 '내 아버지가 건너온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저씨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저씨는 좀 나은 편입니다. 사돈의 팔촌쯤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몇 촌쯤으로 느끼고 계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친정 아버지 보다 더 가깝게 느끼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촌쯤으로 느끼십니까? 혹시 아저씨쯤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내게 돈이나 벌어 주는 내 집의 머슴쯤으로 여기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내 아들 딸을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가정 교사쯤으로 여기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들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원망합니다. 사업을 하는데 하나님이 돈을 벌어 주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저씨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등에 업히니까 아버지가 보란듯이 건너가는데 우리가 대로를 걸어가는 것 같지는 못했을지라도 양손을 펼치고 걸어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중심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오른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면 왼쪽으로 손을 펴서 중심을 잡고, 왼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면 오른쪽으로 손을 펴서 중심을 잡으면서 그 아슬 아슬한 곳을 갈 곳 까지 다 갔습니다. 중심을 잡는 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사람은 대지를 버티어 서고도 쓰러집니다. 중심을 잡으면 위험한 외줄도 얼마든지 타고 갈 곳 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중심, 내 믿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중심 잡은 사람이 이렇게 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중심, 내 인생도 하나님 중심, 우리의 생활도 예수 중심, 말씀 중심이 될 때 중심을 잡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고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중심의 은혜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 믿음도 곧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겠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의 주인공 사도 요한은

첫째로 하늘이 열리는 은혜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가 밧모 섬에 정배 생활 중에서도 하늘이 열림으로 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에도 날마다 하늘이 열리는 열림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바로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체험의 은혜의 주인공입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시고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고난 중에서도 영적인 힘이 샘솟을 것입니다.

셋째로 중심 잡은 은혜의 주인공입니다. 사람이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가정도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중심이 잡히지 않은 가정은 흔들립니다. 무질서해 집니다. 결국은 파멸입니다. 내 인생도, 믿음도 반드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십 사 장로가 하나님 중심으로 둘려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 중심,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된 사람만이 승리하고 복되고 흰옷 입고 면류관을 받아야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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