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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했을 때 / 삼상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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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실패했을 때
본문 : 삼상 4:1∼11
설교 : 배태현 목사 (뉴질랜드 한인교회)



제가 어렸을 적에 저희 동네에 아주 허름한 빵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에 있었던 그 빵집 창문에는 언제나 먹음직스러운 여러 종류의 빵들과 단팥이 들어간 호빵까지 곁들여서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진열된 여러 빵들 중에는 '공갈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긴 것은 진짜 빵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 입 깨물어 보면 그것을 왜 공갈빵이라고 부르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바로 속이 없는 빵이기 때문입니다. 빵은 빵인데 속 안에 설탕물이 발라진 얇고 바삭바삭한 껍데기만 있을 뿐이지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 사람들이 그것을 공갈빵이라고 불렀습니다. 겉에서 보면 뭔가 근사한 것이 들어있을 것 같은데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이 공갈빵은 저를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갈빵과 많이 닮았다는 것은 제가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기 전에는 그럴듯하게 화려하고,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들어있는 것 같고, 이것저것으로 요란하게 치장되어 있는 것 같아서 제 자신도 제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을 때가 많은데, 막상 어떤 일에 실패를 하고 나면 공갈빵처럼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과 그 동안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제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실패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 진정한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고, 새로운 변화와 성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실패란 실패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패 그 다음에 우리가 그 실패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와 실패자는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실패자가 되겠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실패를 적절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그것은 실패자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실패에 관한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패를 대처해 가는 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여러분에게 함께 본문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어느 날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블레셋이라는 민족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Palestine)을 가리킵니다. 그 둘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만 이스라엘이 그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맙니다. 그 날의 전투에서 죽은 이스라엘 군사의 수가 사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얼마나 크게 패배를 했는 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하고 진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그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법궤', 혹은 '증거궤'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도록 직접 명하신 것으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정금으로 싼 하나의 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이 적힌 돌판과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 싹이 난 제사장 아론의 지팡이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언약궤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거룩한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성막 안에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인 지성소 안에 놓여졌고, 대제사장 외에는 그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동할 때는 항상 언약궤가 맨 앞에 있었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랐으며,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도 언약궤가 백성들의 맨 앞에 있었습니다. 블레셋에게 패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당시 언약궤는 '실로'라는 곳에 있었는데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 언약궤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으로 들어오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언약궤가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전투의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더 크게 패해서 이스라엘 보병 중 삼만 명이 살육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언약궤까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기고,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상황은 그야말로 공갈빵처럼 변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실패들은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람들인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도 많은 실패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사는 일,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일, 영적 싸움을 싸우는 일 등등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실패를 대처해야하는 지에 관한 소중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실패에 대처하기 위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데 됩니다. 우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고, 그 다음에 그 대안을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한 후 어떻게 그 실패에 대처했습니까? 그들 역시 가장 먼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실패했는지를 안다면 다시 도전할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왜 실패했는지를 안다면 다시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또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왜 실패했는 지를 아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는 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같은 실패를 계속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던진 질문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로 하여금 블레셋에게 패하게 하셨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겉으로 보면 자신들의 실패의 원인을 탐색하는 질문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패의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과의 전투는 그 시작부터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투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아무 것도 묻지도, 듣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질문했어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일이 실패하면 항상 하나님에게 그 탓을 돌리는 것이 우리입니다. 실패했습니까?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까? 먼저 냉철하게 내 자신 안에서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밟은 두 번째 단계는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후에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왜 하나님께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신들을 패하게 하셨는지를 고민한 후에 한 가지 새로운 대안을 마련합니다. 그것은 당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블레셋과 대치 중인 이스라엘의 진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언약궤가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 주리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첫 번째 단추부터 잘못 끼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실패한 원인을 자신들 안에서 발견하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져오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실패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아마도 새로운 대안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불신앙을 회개하는 성회를 먼저 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과 오늘의 사건을 비교해 보십시오. 사무엘상 7장에도 블레셋과의 또 다른 전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7장은 사무엘상 4장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실패의 원인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면 주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의 인도로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라는 곳에 모여서 금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결국 블레셋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쳐들어 왔지만 그들은 이번에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진정한 실패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밟은 세 번째 단계는 자신들이 마련한 새로운 대안을 실행해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진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역시 그들은 또 다시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새로운 대안이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으로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이 흔들리도록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언약궤일 뿐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하신 약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임재의 증거임이 분명했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믿고 신뢰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바로 언약궤가 자신들을 구원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마치 공갈빵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속이 텅 빈 그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언약궤가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우상의 신상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상자 따위에 매여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 가운데 충만하신 그야말로 광대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 마련한 대안이, 새로 준비한 방법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기만이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스라엘과 맞서 싸웠던 블레셋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인들은 잠시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블레셋 사람들아, 대장부답게 힘을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히브리 사람이 우리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들의 종이 될 것이다. 너희는 대장부답게 나가서 싸워라!"는 말에 그들의 생각이 바뀝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확신, 자기 암시, 자기 최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나는 할 수 있다"는 식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언약궤를 붙들고 자기 기만에 빠져 싸웠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없는 자기 확신을 붙들고 싸웠던 블레셋의 전투에서 블레셋이 승리를 거둡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없는 껍데기뿐인 자기 기만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의 자기 확신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산성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위로이시며,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마련하는 계획과 대안은 우리의 실패 위에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할 수 있지만 실패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실패 뒤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패했을 때마다 우리는 그 실패에 적절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대처는 오히려 더 큰 실패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실패를 대처하는 바른 길은 먼저 실패의 원인을 찾는데서 부터 시작되는데 문제는 늘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먼저 내 자신의 문제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색하십시오. 특히 감추어진 죄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 문제와 원인을 가지고 새로운 대안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 대안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를 대처하는 우리의 노력은 결국 공갈빵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신앙은 단지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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