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금은 싸울 때(?) / 행 15:36-41

  • 잡초 잡초
  • 654
  • 0

첨부 1


지금은 싸울 때(?)
(사도행전 15:36-41)
예은교회/ 김학현 목사


참으로 가슴이 답답합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 내부의 갈등을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평화의 보루인 유엔을 무시하고 전쟁을 하는 미국이나, 대량살상무기를 감추고 그런 것 없다고 하는 이라크도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성조기를 앞세우고 애국을 말하며 거리로 나가는 이들과, 촛불을 들고 두 여중생을 계속 우려먹으려는 이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대치를 끝내야 합니다. 현 상황은 마치 싸우기 위하여 산다고 할 정도입니다.

정치적인 이슈가 되는 이런 설교를 안 하려고 했습니다. 어느 편을 든다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 성도들도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주의 종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제 소견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이미 한 번 설교한 내용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교회 사도들 앞에 소개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한 제자들이 바울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바울을 소개함으로 사도들과 같이 사역하도록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떼어놓을 수 없는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크게 다투고 헤어집니다. 본문을 통하여 싸움과 그 싸움의 결과, 싸움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싸웁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며칠간 머물며 2차 전도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가 안 데리고 갈 것인가 하는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싸움은 이런 작은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마가(요한)는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바보에서 밤빌리아로 가려고 다 배를 탔는데, 무슨 이유인지 마가 요한은 도중에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행13:13)

바울은 그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38절)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그러나 바나바는 친척이기도 하여 그랬겠지만,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용서하고 데려감으로 다시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37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이렇게 생각이 다르자 둘은 몹시 다툽니다. (39절) “서로 심히 다투어” 작은 의견충돌이 아니고 매우 큰 싸움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싸운 것은 성격이나 은사의 차이가 아닙니다. 성격도 서로 다르고 은사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들이 다른 것은 생각입니다. 마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입니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큰 싸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을 해도 마가일 뿐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따라 원래 마가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도 그렇고, 우리국민의 내부갈등도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생각의 차이입니다.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생각의 차이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미국은 미국이요, 북한은 북한입니다.

다투면 헤어집니다

생각은 생각일 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생각이 마가를 바꿀 수 있거나, 우리의 생각이 미국이나 북한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생각이 다른 것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싸웠고 그 싸움의 결과 둘은 헤어졌습니다. (39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그렇습니다. 싸우면 갈라서게 됩니다. 서로의 친밀하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싸운 사람들만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으로 마가는 변한 게 없습니다. 같은 원리로 우리가 싸운다 해도 미국은 미국일 뿐이며, 북한 또한 달라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손해는 우리 민족에게만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고향인 구브로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각자 다른 길로 갔습니다. 하나의 전도대가 두 개의 전도대로 갈라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둘 다 성공적으로 선교를 하도록 하십니다. 둘 다 선교사로서 성공합니다. 그것은 둘의 싸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우고 갈라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싸우는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이런 원리로 보면 하나님은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통해서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 혼란과 갈라짐도 분명히 사용하실 것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갈라진 것은 아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제자들인 요한이나 베드로도 사용하셨지만, 가룟 유다도 사용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용되느냐의 문제만 다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유다처럼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쟁하는 자로 쓰임받기를 원하면 안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고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가장 좋아할 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미국보다 더 무섭고, 북한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암5:4-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어떤 나라도, 어떤 장소도, 어떤 사람도 구원자가 아닙니다. 오직 구원자는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의 침입을 받을 때 또 다른 이방민족에게 손을 벌리는 예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십니다. [사17장]에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람과 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동족을 치기 위하여 이방과 손을 잡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이사야는 이방나라와 동맹을 맺고 동족을 치는 이스라엘의 파렴치한 짓을 규탄하며 먼저 망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성도들끼리 싸우면 모두 망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을 ‘만왕의 왕,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여 싸움에 능하신 분으로 말해줍니다. 전쟁을 옹호하는 것처럼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신약에 비춰진 구약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화평에 있습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어떤 사안이 다르든 같든 간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평화라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 진리는 달라서는 안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생각이 달라 갈라졌지만, 그들에게 있는 복음에 대한 본질적 생각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하나님과의 생각은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복음 사역은 그대로 합니다. 그게 불행 중 다행입니다. 바울이 옳은가? 바나바가 옳은가?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같은 원리로, 성조기와 촛불 중 어느 것을 들고 나가느냐 하며 싸울 때가 아닙니다. 시대와 함께 이것도 저것도 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화평입니다. 먼저, 성도들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은 성도들이 성조기를 들거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길 원하는 게 아니라, 골방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거리가 아니라 골방입니다. 혼란한 때일수록, 싸움이 극한 때일수록, 성도의 살아있음을 기도로 보여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그리스도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