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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란날에 부르라 / 시 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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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날에 부르라 /  시 50:15
사직동 교회 (김철봉 목사)


[시편 50편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실천해야지!’ 하면서 결심하고 다짐하면서도 번번히 실패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야지 하면서 운동복에다 운동회까지 구입해 놓고서도 겨우 며칠 하다가는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식사모임에 가더라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 많이 나와도 ‘정말 절제해야지!’ 다짐해 놓고서는 그만 마음 약해져서 과식을 해버립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족들 앞에서 화를 내거나 목소리 높이지 말고 ‘부드럽고 점잖게 말해야지!’결심 또 결심해 놓고서는 그만 또 실패해 버립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용두사미... 라는 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현상들이 많습니다. ‘매주일 감사헌금 드려야지!’ 결심하였으나 훈련이 되지 않아서인지 빼먹는 주일들이 많으시지요? 주일학교 교사로 1년 52주 개근하리라/ 찬양대봉사 1년 52주일 개근하리라./ 구역예배 참석 개근하리라.... 이렇게 결심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지요. 특별히 기도생활만큼 결심도 자주 하고, 실패도 많이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새벽기도 신자가 되어야지/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씩 기도해야지/ 예수님처럼 새벽 미명에 기도해야지/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 하지 않고 그냥 이불 속에서 게으름 피우고 잠자다가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처럼 되지 말아야지/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해야지!’

요즘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떠하십니까?

그런 대로 잘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결심이 흐지부지되어 스스로 화가 나고,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고 낙심 중에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기도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세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별 이상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불행입니다. 삶이 어수선하고 기쁨과 소망이 희미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는데서 생기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기도가 잘 안됩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가지고 당장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나는 요즘 환난이 없으니 특별히 기도할 필요가 없다/ 환난이 닥쳐오면 그 때 기도해야지/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환난 날에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알고 보면 하루 하루의 삶이 모두 환난 날입니다. 여기 ‘환난 날’이란 (day of trouble)입니다. 고통스러운 날, 괴로운 날, 힘드는 나날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느 하루 수고롭지 않는 날들이 언제 있었습니까? 매일 매일이 고통스럽고 수고로운 날들입니다. 믿음의 선조 모세가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11:28, 6:33)”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삶에는 괴로움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심지어 내일이라는 시간마저도 사실은 염려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살아보시니까 어떻습니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있습니까? 어느 날 하루 쉬운 날이 있었습니까? 사실 매일 매일이 전쟁이요, 싸움이요, 씨름이요, 투쟁이요, 긴장의 연속입니다. 교통사고, 질병, 입원 치료, 수술, 불의의 사건사고, 방심, 죄의 유혹, 이단 마귀의 음모와 공격, 살인, 전쟁, 부도, 사업실패, 부부갈등, 자녀의 방황, 부모님의 중병(치매), 자녀양육.....


그러므로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정말 수고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괴롭기도 합니다. 이것이 솔직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구약 시대에 살았던 욥을 묵상해 봅니다. 그는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역경은 다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그는 요셉처럼 한 나라의 총리대신도 아니었습니다. 모세처럼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다윗처럼 무수한 전쟁터를 누볐던 장군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은 최고 정상의 자리에까지 올라 선 사람들이니까 그에 상응하는 고통과 환난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평범한 신앙의 사람치고는 그에게 닥쳐온 고통과 환난이 너무도 심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아픔을 이렇게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 것, 언제나 밤이 갈꼬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어찌하여 내가 胎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나를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욥7:3-4, 10:1, 3:11, 14:1)


도대체 욥은 어떤 환난을 당하였습니까? 어느 날 도적과 강도들이 밀어닥쳐 양 7천, 약대 3천, 소 500, 나귀 500 그리고 이 많은 가축 떼를 돌보는 종들까지 모조리 죽이거나 탈취해 갔습니다. 급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착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7남 3녀 자녀들이 한꺼번에 태풍에 의해 집이 무너지면서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욥의 몸에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을 가지고 긁지 않으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정도로 환난이 닥쳐왔는데 욥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욥은 기도하였습니다. 욥이라고 어찌 울지 않았겠습니까? 어찌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가장 친하던 친구들마저 빈정대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욥을 의심하였습니다. 숨겨놓은 죄가 많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가장 가깝다는 아내마저 남편 욥을 비웃고 비난하고 심지어 저주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기도할 마음이 남아 있겠습니까? 완전히 좌절하고 탈진해 버릴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나 한지... 근본적인 의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합니다. 환난 날에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욥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원통함을 하나님을 향해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10:1,2,9, 16:20, 19:25-26, 23:10)

그렇습니다. 욥의 경우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기도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1) 환난이 많으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풍파가 심합니다. 또 환난 질고가 많습니다.(찬247장 1절)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이다(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러므로 기도만 하여라.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요16:33) 환난이 많은데 기도안 할 수 있습니까?

2) 환난중이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환난 중에 계십니까?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해서 환난을 이겨내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받아들입시다. 앞뒤가 막혀 있습니까? 좌우도 막혀 있습니까? 그러면 위를 쳐다 보십시요. 하늘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늘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마귀는 환난 중인 신자에게 낙심과 의심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3) 지금 큰 환난이 없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만찬을 통해서 당부하셨습니다. “마귀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밀 까불듯이 흔들고 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눅22:31-32, 46)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우선은 환난이 없다고 생각되어 졸고 있었습니다. 자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얼마 후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즐거운 것은 ‘기도하는 것과 응답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아뢰고, 부탁드리고, 부르짖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에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가 가장 즐거우시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쉬워서 기도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즐기십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신다면 기도시간을 더 많이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정말 시간이 없어서 기도 못합니까? 양심적으로 대답해 보십시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질없이 보내고 있는지 각자 한 번 돌아 보십시요. 기도하는 시간을 아깝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좋으시다면, 하나님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신 분이라면 어찌 ‘기도하는 시간’이 아깝겠습니까?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나날들은 모두 환난의 날들입니다. 환난 날에는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해법이 없습니다. 환난은 싫고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환난이 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찾아오십니다. 우리 또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찾고, 하나님의 응답을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성경은 충고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깨어서 기도하라고. 그런 대도 계속 잠만 자고 있으렵니까? 선지자 요나처럼 잠만 자고 있으렵니까? 지금 온통 세상이 난리인데도 배 밑창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서 잠만 자고 있으렵니까? 폭풍이 대작하고, 내가 탄 배가 깨어지고 전복되려고 하는데 계속 잠만 자고 있으렵니까? 세상의 선원들이 잠만 자고 있는 선지자 요나를 발견하고 책망을 합니다. “배가 깨어지고,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자는 자여 어쩜이뇨?“ 이 얼마나 부끄러운 장면입니까? 우리들도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를 꾸짖을 것입니다. 이미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당신들, 우주의 주재시요, 창조주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서 왜 이 환난의 날에 그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거요? 왜 잠만 자고 있는 거요? 당신들 기도 덕분에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요? 제발 기도 좀 하시요!“ 우리의 자녀들이 발을 동동 굴리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 왜 새벽에 일어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도 죄입니다. 기도 소홀히 한 죄를 회개합시다. 회개하였으면 당장 오늘부터 열심히 기도합시다. 기도만이 살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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