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께 드린 지극한 사랑의 표현 / 눅 7:44-50

  • 잡초 잡초
  • 475
  • 0

첨부 1


제 목 : 주님께 드린 지극한 사랑의 표현
본 문 : 눅 7:44-50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여인이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에 나오는 사건과 다른 세 복음서의 사건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향유를 부은 사건은 같은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유대 지방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주님께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 옥합을 깨고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눅 7장의 사건은 우선 그 장소가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도 주님께서 한참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건은 향유를 부었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에는 두 차례의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가셨을 때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에게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초대에 응하셔서 식탁에 자리를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낯선 한 여인이 주님께서 이 집에 와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을 일부러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식탁에 앉는 자세는 왼손을 식탁에 고이고 발은 뒤로 길게 뻗고 반은 누운 채로 앉아서 주로 오른 손을 사용해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앉으신 뒤쪽으로 갔습니다. 주님을 보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자기도 몰래 주님의 발 위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너무도 송구스런 마음에 자기 머리카락을 풀고 그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시몬이 주님께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천한 여인, 죄가 많은 여인이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는냐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빚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대답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이 여인을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 한 젊은 영국 기사가 애굽 군에게 포로로 잡혀 재상 살라딘에게 끌려갔습니다. 그 기사는 곧 처형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 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살라딘에게 두 손 모아 빌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영국에 나를 목숨처럼 아끼고 기다리는 아내가 있습니다. 살라딘이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게 자네가 죽고 나면 부인은 곧 자네를 잊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걸세“ 그래도 이 기사가 아내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자 살라딘은 장난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 자네 아내가 오른 손을 잘라서 보낸다면 내가 자네를 풀어주겠네” 아내를 사랑하는 기사는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전령 편에 이 소식이 영국까지 전해졌습니다. 아내는 주변 모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자기의 오른 손을 잘라서 상자에 담아 살라딘에게 보냈습니다. 감동을 받은 살라딘은 그 기사를 풀어주었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잘려나간 아내의 손을 부여잡고 정말 통곡을 했습니다. 그 지극한 사랑에 너무 감격을 했습니다. 이후 아내의 오른 손이 되어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감동을 받아 교회에 이 여인의 동상을 세웠고, 마을 전체가 그 사랑을 기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극한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정말 지극한 사랑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을 크게 감동시켜드렸습니다. 47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여자의 이 지극한 사랑이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지극한 사랑으로 그녀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48절에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그 누가 봐도 용서받을 수 없던 여인이었는데 주님께 친히 용서의 선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요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셔서 단 한 가지만을 물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같은 것을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생명을 버려까지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같은 것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본문의 여인처럼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보여드려야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지극한 사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주님께 대한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본문 37을 보면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문헌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여인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이 죄인이라는 칭호는 창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 39절을 보면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그러니까 주님을 초청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도 한 눈에 이 여자가 창녀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은 그 동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창녀였습니다.

  당시 율법에 죄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 그 자체도 죄라고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리새인 집의 식탁에 초대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이 여인은 불청객이고 바리새인의 식탁에 들어왔다는 것이 미리 알려졌다면 당장 쫓겨날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 식탁 자리까지 찾아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랍비의 교훈에는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낯선 여인과 4규빗 그러니까 1.8미터 이내로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주님 뒤로 와서 주님의 발을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씻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율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초청 받지 않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랍비의 교훈을 어겨가면서 까지 공개적으로 외갓 남자의 몸을 만졌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사후에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마디로 주님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라면 자기의 이 딱한 처지를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자기의 이 처참한 상황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주님께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박노해의 “태양의 눈”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눈먼 사람은 빛이 없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거나

    시력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너무 눈부신 빛에 눈이 멀어버려 세상이 캄캄해진 사람이다

    눈먼 사랑은 너무 강력한 사랑에만 꽂혀서

    다른 사랑의 생명줄이 모두 끊어져

    벼랑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랑이다

    눈먼 믿음은 태양 같은 유일 진리만 우러러보다

    세상의 모든 진실에 눈이  먼 믿음이다


  오늘 본문의 여인이 바로 이 태양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라는 태양의 빛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그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눈에는 주변의 수군거림도, 그 누구의 책망도, 자신의 마지막 남은 체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랍비의 교훈도, 사회적인 규범도 지금 이 여인에게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태양이신 예수님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눈이 멉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늘 그 마음이 애가 탑니다.

  시 42:1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목이 타는 사슴의 눈에는 물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주님 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본문 38을 보면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그토록 사모하고 또 사모하던 주님을 가까이서 뵈오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던지 주님의 발이 그 눈물로 적셔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약학자는 ‘사람이 아무리 눈물을 한꺼번에 많이 흘린다고 그 눈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적실 수가 있느냐?’ 반문하면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여인은 눈물병을 가져와서 그 눈물병을 깨고 그 안의 담겨진 눈물을 다 쏟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 가운데 슬픔의 눈물을 받아두는 눈물병이 있었습니다. 보통 작은 유리로 만든 호리병처럼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슬픔을 당해서 눈물을 흘리게 될 때 그 흐르는 눈물을 이 병에 담아서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큰 슬픔을 당했을 때 이 병을 가지고 모여 함께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이 눈물병을 함께 그 무덤에 묻어주었습니다. 이처럼 눈물병에 모아둔 눈물은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슬픔 중에 머금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고 진실된 마음을 상징합니다.

  저는 두 가지 다일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이 여인이 그 자리에서 눈물도 흘렸을 것이고, 자신의 소중한 눈물병을 깨고 흘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주님 앞에 눈믈을 흘림으로써 자신의 주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눈물을 흘렸던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딱한 처지가 불쌍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참고 견뎠고 남은 것이 악밖에 없어 악으로 버텨왔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오니 견딜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창녀가 됐고,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주님 앞에 오니 한스러운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서러워 울고 또 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입니다. 그래도 자신을 사람답게 맞아주신 분이 주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 주신 분이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주실 분이 주님밖에 없습니다. 너무 고마워 눈물이 흐릅니다.

  주님께서 그 눈물을 받으셨습니다. 그 눈물에 담긴 그 깨끗하고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 눈물로 쓴 진실된 사랑의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찾으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 주님의 은혜 때문에 흘리는 눈물 그 눈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여기서 시인은 흠도 티도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께서 바치라 하시면 나의 눈물을 드리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흠도 티도 없는 내 가슴속에 순수하게 숨어있는 눈물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눈물이 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담긴 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향유를 부었습니다.

  본문 38을 보면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이 제사 준비해 온 옥합을 깨고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비슷한 사건을 기록한 막 14:5을 보면 향유를 담은 옥합의 경제적인 평가는 300데나리온에 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향유를 담은 옥합의 값은 노동자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해 보면 1500만원 정도이고, 10만원씩 계산해 보면 3000만원이나 되는 거금입니다.

  지금 이 여인이 이 값비싼 향유를 주님에 발에 붓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한 순간에 3000만원을 날려버린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낭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 사랑과 3000만원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옥합을 깨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행위를 ‘거룩한 낭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거룩한 낭비를 서슴없이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게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내 생명까지 드릴 수 있는 마당에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우리가 이 여인의 행동에서 전부를 드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주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고 있습니다. 이 옥합은 아마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그것으로 주님의 발에 붓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전적인 헌신’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답니다. 그 때 설교를 듣던 한 여인이 목사님께 따졌답니다. ‘목사님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이 진짜로 가능합니까? 현실적으로 80%나 90% 헌신하라고 설교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때 이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부인 당신은 남편이 당신에게 80%만 헌신해도 만족하시겠습니까? 나머지 20%를 다른 여자에게 헌신해도 괜찮으십니까?” 이 목사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남편의 헌신이 100% 다여야 하듯이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도 100%여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전적인 헌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헌신은 전적인 헌신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린 헌신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찬양을 봉헌송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 길 오르신 주님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헌신이 전적인 헌신이어야 하겠습니다. 아낌 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다시 요 21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물음 앞에 설 때 본문의 여인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모하여 주님께 나아가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뜨거운 눈물로 사랑의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주님께 자기의 가장 소중 것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 기도/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모하여 주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께 뜨거운 눈물로 사랑을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 헌신케 하옵소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