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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 / 막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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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 (막 13:7)
이름 : 강성찬
날짜 : 2003-03-23


난리의 소문이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난리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전쟁이나 병란 분쟁, 재해 따위로 세상이 소란하고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태 작은 소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 합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난리(폴레모스)는 '전쟁, 싸움, 전투', '논쟁, 다툼'을 의미합니다. 전쟁과 전쟁에 관한 소문들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강화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 24:6 눅 21:9) 고 합니다.

약 4:1의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에서  '싸움, 투쟁, 충돌, 알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감람산 강화를 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주님께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그 징조는 어떠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징조에 대하여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세에 나타날 종교적 현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각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세에 나타날 우주적인 재난을 뜻합니다.

  그리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국가간의 분쟁이 심화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난리의 소문을 들으며 할일이 무엇인가 살펴봅니다.


  종말의 때를 생각하며 준비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종말은 역사적인 종말 곧 주님이 오시는 종말과 개인이 죽을 맞이하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재림의 때에도 큰 전쟁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아마겟돈이라는 전쟁입니다.

(계 16: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이 아마겟돈을 잘못 오해 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계돈 떼어먹었다고 머리채 휘어잡고 싸우대요. 교회서도 그러다가 교회가 박살나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계는 무서버~ 우리 교인들은 교인들끼리 이익을 남기기 위한 계는 들지 말아야해요.

세계 마지막 전쟁은 아마 계돈 전쟁일거야~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다구 목사님이 말씀하셨거든요. '아마게돈'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3000년동안 지구상에는 3300여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경쟁이 한창이었을 때 양국이 가진 핵탄두는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3만5000여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세력 확장을 위해 전 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5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지적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 오는 구나하며 준비함녀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말아야 하고 동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재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는 크든 작든 생명의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죽음 후에는 부자와 나사로처럼 천국과 지옥의 나눔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종말이 준비 되어야 합니다.




  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장작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섰습니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자기의 화형 집행 형리를 감독하던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죄송하오나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을 당하는 몸이옵니다. 만약 저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저의 종교를 믿지 마시고 저의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순교자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여 의아했던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 순교자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러 가는 사람처럼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치안판사는 너무나 놀랐다고 합니다.<담대한 믿음의 순교자>




이 비범한 힘은 믿음에서 왔습니다. 죽음이 불신자들에게는 불안한 것이요. 두려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으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불안하며 두려웁지 아니 합니다.




무디 선생은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후일 신문에 동부 노스필드 출생인 D.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 그 때에 나는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살 것이다. 그 때는 늙고 병든 육체를 떠나서 영원한 높은 집으로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나의 몸은 사망이 침범하지 못하고 죄가 더럽히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

이런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침대에 누워서 이런 너무나 멋있는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땅이 물러가고 내 앞에는 하늘 문이 열리는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내 어찌 이것을 싫어할까. 저 나라에는 음침한 골짜기가 없고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어서 가보아야 하겠다. 오늘은 내가 면류관을 쓰는 날이다" <무디의 죽음>

난리의 소문을 들으면서 주님 오시는 재림의 징조가 보이는 가 살피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하되 바른 판단을 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믿음이 준비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일 대학에 역사와 문명을 가르치는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이라고 하는 교수는 '전쟁의 기원' (On the Origin of War) 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깊은 역사 연구 속에서 전쟁의 동기, 전쟁이 왜 있어졌느냐 하는 것을 총괄적으로 말하고 있다합니다.




  심리적 전쟁동기론을 말합니다.

상대가 두렵기 때문에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이 넉넉하면 힘의 여유가 있으면 요사이 말로 초 강대적 여유가 있으면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이락의 전쟁도 대량 살상 무기가 테러 분자들에게 들어가 미국 국민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미국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북과의 관계에서 염려하는 일들이 이러한 일이라고 합니다.




  실리적 전쟁동기론을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와 혹은 자국에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때문에 생기는 전쟁, 이것은 실리적 전쟁동기론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어떤 날 아침 일찍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초등학교 정도 되는 두 형제가 장난하면서 따라오고 또 그리고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호두 다섯 개를 꺼내서 그 동생에게 주면서 형과 나누어 먹어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내가 받은 거니까 나는 세 개를 갖고 두 개는 형이 갖으라고 그랬는데 형은 말하기를 내가 형이니까 셋을 갖고 네가 둘을 가져야 옳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아웅다웅 싸우는 겁니다. 이걸 보고 대통령은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뒤따라가던 비서실장이 물었습니다. "애들이 왜 싸우는 겁니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개 문제로 싸웁니다." "아니 애들이 무슨 세계 문제라니요?"


  명분적 전쟁 동기론을 말합니다.

지난 역사를 봅니다. 2차대전 때, 독일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죽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사람이 최고랍니다. 영국 사람들은 앵글로 색슨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승리자의 명예, 승리자의 영광, 개인으로나 민족적으로 명예를 자랑하면서 소위 명분적 전쟁동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서로의 명분을 내세우는 것을 봅니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납니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인간이 반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겸허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전쟁대신 평화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쟁을 통하여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됩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 자녀를 잃은 부모의 한 맺힘, 신체 일부분을 잃은 장애인들의 고통, 심각한 전쟁의 후유증을 약간의 돈으로 보상 할 수는 없습니다. 선한 전쟁보다 악한 평화가 낫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쟁 보다는 평화의 방법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불어 평화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955년 6월 25일 밤, 2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딴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그 집의 식구들은 저녁식사를 위해 식탁에 모여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심하게 비행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얼굴을 검게 위장하고 기관총을 든 미군 두 사람이 들어서서는 물었습니다.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 가족들은 너무도 놀라 말을 잇지 못하였으나, 다섯 살 난 막내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친구잖아요." 미군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지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소?" 미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천국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연합군 작전입니까?" "그렇습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위해 미리 낙하산 부대가 투입된 것입니다. 그 미군 두 사람은 착륙당시 부상을 입어서 그 외딴집에 잠시 머무르며 치료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창문으로 내다보니 독일병사 세 사람이 그 외딴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둘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은 독일병사들에게도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기울여 그들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결국 그 외딴집에는 독일병사와 미군병사가 한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들은 놀랍게도 서로 악수를 청했습니다. 밖에서는 적일지언정 그 외딴집에서 만큼은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는 더 이상의 적은 없군요."(인터넷 정보클럽-더 이상의 적은 없군요)




  내가 누리는 평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서로를 위하여 헌신하려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미국 남북전쟁시의 이야기라 합니다. 전쟁에 나갈 청년들을 제비를 뽑아서 결정했습니다. 청년들은 모두 모병관 앞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뽑히면서 한 청년도 뽑혔습니다. 그에게는 딸린 식구가 많았습니다. 늙은 부모도 있었고 처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얹혀서 사는데 그의 출정은 곧 그 날부터 굶게 됨을 의미하였습니다. 청년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다음 날 청년들은 모병관 앞에 모였습니다. 모두 다 가족을 이별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을 보내는 부모형제 처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 다른 잘 생긴 청년이 모병관에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대신 가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모도 안계시고 결혼도 안했습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모두들 놀랐습니다. 이 경건한 모습의 새로운 청년은 한사코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감동한 모병관은 둘을 바꾸어서 보냈습니다. 남는 사람은 자기의 목거리를 그리고 떠나는 사람은 자기의 회중시계를 기념으로 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남은 청년은 자기를 대신해서 출병한 친구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을 공회당에 나가서 전사자의 명단을 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무서운 전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피아간에 거의 대부분이 죽어야 했습니다. 결국 대신 나간 젊은이의 이름도 전사자 명단에 올라 있었습니다. 남은 이는 그의 시계를 꺼내들고 울었습니다. "친구야 너는 나를 위해 대신 죽었구나." 그는 자신이 죽고 이제 친구의 몫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심을 다짐합니다. "네 삶을 살아주마." 그는 이제 그 경건했던 친구처럼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새 생명을 확인하며 시계를 만지며 친구를 가까이서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쁜 때나 슬픈 때나 그는 시계를 꺼내 놓고 친구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는 언제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이제 너를 위해 기도하며 너의 복을 빌어주마. 친구야 힘을 내어라." 정말로 시계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힘을 공급하였습니다. 언제나 친구의 후광은 그와 함께 있었음을 너무도 확실하게 느끼고 살아나갔습니다. 말년에 그는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를 위해 희생 하신 분들을 기억하며 보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령한 면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자신을 희생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으니 이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 주여 !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용서하며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목케 하며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알리고

회의가 자욱한 곳에 믿음을 심으며

절망이 드리운 곳에 소망을 주게 하소서.

또한 어두운 곳에는 당신의 빛을 비취며

슬픔이 쌓인 곳에 기쁨을 전하는 사신이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먼저 위로를 베풀고

이해받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 안에서 그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성 프란시스-평화의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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