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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 창 1: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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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창1:24-28
오대식 목사 (높은 뜻 숭의교회)



길지 않은 목회의 기간이지만 목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저는 좌절과 실의,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일이 하기 힘들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 무슨 이유로 해서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또 그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격인 목사라고 하는 것이 무척이나 수치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사노릇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까지 그 수위가 높아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많은 괴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저도 좀 덜 된 인간인지라 대체로 표정관리가 잘 안되는 사람이라서 그런 괴로움들이 있을 때 마다 얼굴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런 표정들이 얼굴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제 주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는 합니다.

“교인 중에 누가 목사님을 많이 힘들게 합니까?”

우리의 시각은 늘 한정적이고 단순해서 목회자가 고민에 빠지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 때문에 힘이 들거나 어렵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일 자체가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 교회의 잘못된 과거와 또 기독교의 어두운 현실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한 젊은 목사로서의 저는 많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를 걱정하고 시대를 위해 기도해 주고 이 땅을 축복해야 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누구도 교회가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도 그렇고,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일을 힘들어하는 이유의 결론을 말하자면 그것은 제가 평생을 몸답고 살아야 할, 부둥켜안고 끌고 가야 할 기독교와 교회가 사회로부터 평가절하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교회는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나 다니는 곳이라는 평가를 심심치 않게 받을 때마다 그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사로서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고 아직도 교회의 교회됨을 망각한 채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교회를 더욱 세속화시키는 모습이 자주 나타나고 있을 때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력 처음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을 때 소년부 아이들을 맡으며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연말까지 아이들의 출석수를 배로 늘려 놓으라는 부탁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수 늘리기에는 영 재주가 없는 한 젊은 전도사의 긴 고민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수를 늘리고 교회를 크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목회자의 능력이 되는 가치관 속에서 저는 목회의 길을 가야할 것인지 포기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씨름까지 했던 그런 무능한 전도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한국교회는 이런 성장 제일주의로 인해 세계의 교회가 놀랄만한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고 그 결과 교회는 이 땅에 복음이 전달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왕성한 전파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또 높은 십자가 철탑의 예배당들이 전국 곳곳에 구석구석 세워지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는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이 그 최 일선에서 주를 위해 지금껏 뛰어 왔던 장본인이요 교회 성장의 산 증인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주 여러분들이 해 주신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 교회의 교인 중 96%가 수평이동을 한 분들이고 교인 중 82%는 1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 온 분들이며 60%이상이 소위 대형 교회에서 오신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한국의 교회들을 크게 성장시킨 장본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땀 흘리며 교회와 하나님만 보고 달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팔고 땅을 팔아 교회를 세워 왔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들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밤을 세워가며 새벽잠을 설쳐가며 기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렇게도 애착을 갖고 세워 왔던 그 교회들이 진정 자랑스러우십니까? 그렇게 힘들게 성장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실제로 1992년도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 교회협의회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교회에 관해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의 70, 80년대의 폭발적인 양적 성장은 세계교회가
놀라움을 갖고 주목하는 바이나, 그 내용을 보면 무속신앙 즉
샤마니즘의 신앙형태와 유사한 점이 많이 드러난다”

즉 세계 교회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특성은 ①사분오열로 인한 수많은 종파, ②영성의 혼탁함, ③교회의 물량주의 ④성직자들의 세속화 등,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많은 교회에서 불거지고 있는 문제로 인한 교회의 위기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결과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문제가 무엇이라고 여기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건강하지 못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바른 기독교의 정신을 갖고 바른 영성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 중요한 것을 많이 노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영성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데서 오는 신앙적 오류가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욕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한데서 나타나는 오류인 것입니다. 성장주의 관점으로 볼 때 창1:27-28 의 오해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7-28)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제국 때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항상 정치적인 정복과 병행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국가적 전쟁을 일으켜 왔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도전을 받을 때와 타 종교의 진멸을 위해 항상 군사를 일으켜 왔습니다. 그 사상은 중세 십자군전쟁으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계속 이어져 17세기부터 유럽열강에서 경쟁적으로 시작된 식민지 쟁탈에 다시금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정벌을 떠나는 서방국가들의 군함에는 항상 선교사가 동행하게 되었고 그들은 총과 성경을 늘 병행하여 내밀고는 식민지 원주민들을 구속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이 모두 ‘선교’라는 명목 하에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가 갖고 있던 ‘땅에 충만 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 해석은 ‘소유’ 라는 측면과 ‘물리적 공간’ 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하고 넓히는 것을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 목표로 삼으며 주님의 지상명령으로 생각해 교회는 힘과 노력을 다 해 저들의 신앙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집단공동체는 교회인데 그 집단의 욕심은 교회의 성장제일주의로 대변되어 왔습니다. 이 성장신드롬은 70년대부터 시작되어 한국교회에 번진 신종 부흥운동인데, 이 성장제일주의로 인해 한국교회는 세계의 교회가 놀랄만한 고도의 성장을 이루어 온 것입니다.

성인동화작가인 이현주 목사님의 책 ‘알게 뭐야’에는 몇 편의 성인을 위한 동화가 나옵니다. 그 중 ‘맹집사의 하루’ 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 속의 주인공인 맹집사는 예수를 믿고 난 후 그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해 전도를 하며 살겠다는 나름대로의 다짐을 하나님 앞에 하게 됩니다. 그는 매일 빨간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는 산을 올라 산 속에 있는 절의 이정표와 절의 문에 스님들 몰래 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 맹집사는 하루도 그 일을 못하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 같아 매일 전국의 산을 오르고 또 오릅니다.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애써 해 왔던 신앙의 운동들이 결국 이런 수준의 것들이었다는 점을 꼬집는 우습지만 조금은 슬픈 동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웃지 못 할 동화이 한 장면이 그대로 현실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몇 해 전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에서 기독교 동아리의 학생들이 동국대 본관 앞에 놓여 있던 그 학교의 상징인 불상의 가슴에 실제로 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넣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웃지 못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렇듯 건강하지 못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목회자의 고민으로 되돌아가 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혼탁한 영성의 상황에서도 목회를 계속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면서도 아직까지 끈질기게 목회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기독교의 영적 심각성으로 인해 힘들어하면서도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혹 아십니까? 그래도 교회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래도 우리 교회와 기독교는 그렇게 절망적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가 그래도 소망이 있다고 믿는 편인데 그것은 우리 교회가 아직까지는 자정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늘 문제의 뒤에는 이 장정의 능력이 뒤따라 변화되고 개혁되어 왔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희망이 아직 있는 것입니다.

비록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이 잘못되어 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반성하며 자성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기로 결의하고 지금까지 세계를 향해 저질렀던 잘못된 죄악들의 고백과 회개를 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주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1991년 3월, WCC 가 주관하여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 세계대회’ ( JPIC 세계대회 -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가 역사적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전 세계 138개국 교회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 대회는 기독교역사 약 2000년 만에 처음으로 기독교의 죄악들을 참회하고 지금까지 잘못된 성경의 해석을 바로잡는 참으로 의미 있고 역사적인 대회였습니다. 이 2000년 교회사 중에서 가장 엄청난 대회였던 이 모임이 어디에서 열렸는지 혹 아십니까? 바로 서울이었습니다. 1991년 3월, 서울 잠실의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이 역사적인 회의가 열린 것입니다. 이 뜻 깊은 모임에서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던 창세기 1:27-28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는 반성을 했고, 뼈를 깍는 아픔으로 고쳐나가자고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의 뜻을 재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것은 소유의 개념이나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정신이라는 것을 고백하였고 그 하나님의 정신은 바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존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회의 이름이 바로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 대회였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교회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으로 특별히 경제적인 의미의 올바른 분배를 말합니다. 오대식 목사의 개인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세계 138개국 교회의 신학자들의 해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에 의해 올바르게 경제적인 분배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식 분배와는 다른 것입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고, 배부른 나라는 배고픈 나라를 돌아 봐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평화 Peace, 평화란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억눌리고 고통 받는 자가 없는 것을 말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이 일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도 교회의 사명으로 못 박아 놓았습니다.

창조의 보존 Integrity of Creation, 창조의 보존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의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정신을 가지고 오늘 함께 본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창조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욕심을 버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온 땅에 퍼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8:19 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 모든 자연 즉 모든 피조물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길만 닿으면 모조리 황폐해져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그런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은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아픔은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없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세상이 고대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입니까?

도시의 야경을 빨갛게 수놓은 교회의 십자가 불빛을 보면서 생육하고 번성했다. 땅에 충만했다고 만족해 할 수 있습니까? 예배당을 짓고 기도원을 확보하고 묘지를 만들고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교회 주위의 땅을 사들이는 것으로 생육하고 번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난했던 교회가 엄청난 예산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진정 이 땅을 정복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을 마음에 품고 그 정신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보존해 나가지 못할 때 교회는 지금껏 그래 왔듯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도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1999년 2월 11일 LA의 흑인지역인 사우스센트럴 지구에서 한 건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무슨 장례식인지 시 고위 인사들, 시의회 의원들, 뉴욕타임즈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기자를 비롯한 수많은 취재진들, 그리고 조문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LA지역의 흑인들. 무엇인가 평범하지 않은 장례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대부분 흑인들로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슬퍼했던 죽은 그 사람은 바로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홍정복 씨라는 당시 52세의 수퍼마켓 여주인이의 죽음에 대한 장례식이었는데, 식장에 참석하지 못한 흑인들은 식장 주변을 꽃과 촛불로 둘러놓았고 또 일부는 그의 수퍼마켓에까지 몰려가서 사랑한다는 메모를 붙여 놓기도 하였습니다.

“도저히 주차할 수가 없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당신은 남을 돕는 일을 맡은 천사였어요. 마마.
우리가 꼭 범인을 잡을께요.”

이 홍정복 이라는 여인은 15년간 그 곳에서 식료품상을 하면서 어려운 흑인들을 도운사람입니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가난한 흑인 산모에게는 분유를 마음껏 가져갈 수 있게 했고, 굶주리는 아이들과 노인들에게는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LA흑인사회에서 ‘마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1992년 LA폭동이 있었을 때, 많은 흑인들이 한국인이 경영하는 수퍼마켓을 부수고 약탈했는데도 그곳 마마가 경영하는 가게만큼은 흑인들이 몰려 와 자기들이 보호해 주고 막아줄 만큼 흑인 빈민들이 사랑하는 그런 어머니와도 같은 분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히스페닉계의 강도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흑인들이 슬퍼하며 꼭 범인을 잡아주겠노라고 하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인 것입니다. 1999년 2월 당시 한국의 모든 일간지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보도했었습니다.

2000년 미주 크리스챤 신문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LA지역의 한인교회는 800개가 넘고 한인 목회자는 공식적인 사람들만 약 1300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교회가 무엇을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까?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 많은 수의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시대가 무첫 어수선합니다. 우리 사회가 불안합니다. 전쟁의 잔임함, 경제 질서의 붕괴, 계층의 갈등, 도덕과 윤리의 증발, 모든 가치관이 사라지고 혼란만이 가중되는 오늘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이 땅을 주의 사랑으로 정복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마음에 찾아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우리를 교만과 고집 속에 홀로 두지 마시고
성령께서 항상 깨닫게 하시며 건강한 신앙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혼란과 혼탁의 사회에서도
전쟁과 분열의 세대에서도
오직 주의 사랑으로 이 땅을 정복하게 하셔서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그런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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