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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고난과 하늘의 영광 / 마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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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고난과 하늘의 영광> 마17:1-13
설교 이수영 목사 (새문안교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다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 부르는 이 이야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잠시 되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시고 그때부터 비로소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오히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책망하시고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말씀하셨으며 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 제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그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신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더 중요할 수 있는 다른 현상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의 변화뿐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 나누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말씀을 제자들이 들은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엎드려져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기에 눈을 들었지만 이미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변화하심뿐 아니라 그 산에서 제자들이 목격한 모든 광경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제자들에게 그 모든 광경을 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본문 2절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했는데 그 변형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얼굴과 옷이 해같이 빛나고 희어진 것은 예수님의 영광과 주권과 순수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넘어서서 그의 본래적이고 영원한 초월적 영광을 잠깐 동안이지만 제자들에게 보이신 사건입니다.

3절에서는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고 전합니다. 구약성경의 두 큰 인물이고 각각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옆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돋보이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모든 계시가 예수님에게서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했습니다. 성경에서 빛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분이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심을 재확인하신 사건입니다. 모두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할만큼 그가 권위를 지니신 이심을 확실히 하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마3:16-17)와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들렸던 이 말씀이 이제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려 할 때,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을 때에 다시 들렸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벧후1:16-18는 이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여기서 우리는 그 때 그 산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경험이 "그의 크신 위엄", "지극히 큰 영광", "존귀와 영광"이란 표현으로 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지신 예수님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늘의 영광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두 번째 관심사로 나아갑니다. 즉 "하늘의 영광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압축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그 모든 특별하고 놀라운 광경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비록 예수님께서 머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시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임을 가르치신 사건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9:30-32에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영광 중에서 예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것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와 십자가는 제자들이 생각하듯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하늘의 영광은 함께 가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고난 당하셔야 할 메시야"라는 이해되지 않는 말씀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뿐 아니라 훗날 그들 자신이 겪을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고 이기도록 용기를 주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특별히 보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에게만 허락되었던 이 특별한 경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갖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하늘의 영광이 있다는 것과, 하늘의 영광을 누릴 이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까지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산 이야기는 그 산에서 있었던 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산을 내려오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 속에서도 변화산사건의 의미는 계속 드러납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 질문의 의미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말3:1)이라 했고, 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출현과 연관하여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사라진 엘리야를 본 제자들은 말라기 선지를 통해서 주어진 예언과 서기관들의 말들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여쭌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 어찌하여?"라는 의문사에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말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의 그 물음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방금 엘리야가 온 것을 목도하고 내려오던 중이었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나 산에서 본 예수님의 변화하신 광경과 하늘로부터 들린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영광의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이 재차 확인했음을 전제로 할 때는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는 물음은 서기관들은 아직도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고 따라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가리키며 한 말일 수 있습니다. 즉 서기관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비판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제자들이 엘리야를 특별한 상황에서 잠깐 보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 그가 다시 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여기 이렇게 와 계신데 왜 서기관들이 말하는, 메시야에 앞서 오리라 한 그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메시야시라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아직도 자신들 속에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음을 드러내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 밑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물음, 즉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면 고난 당하고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말은 그가 참 메시야가 아니시라는 것 아닌가? 사실 메시야가 오기 전에 오리라 한 엘리야도 아직 안 오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이 의문을 해소시키고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1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그리고 13절에 보면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때에야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냈던 것입니다. 마11:10 이하에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0-11, 14). 오리라 하던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말은 곧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야시라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대답의 함축적 의미는 "그러므로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비록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지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다. 산에서 나의 그 하늘 영광을 너희에게 보여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의 의미에 대해 앞서 내렸던 중간결론을 다시 한번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하늘의 영광이 있다는 것과, 하늘의 영광을 누릴 이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이 있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까지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참 구세주이시므로 그의 말씀을 신뢰하고 끝까지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세상적으로 화려한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의 삶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고, 우리 또한 걸어야 할 길이지만, 그 길이야말로 참된 영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이 십자가의 고난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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