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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 눅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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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누가복음 23:34 
제목: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설교:백장흠 목사 (독립문교회)


  교회력에 의하면 우리는 사순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앞두고 재의 수요일에서부터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일 까지를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심을 기억하면서 금식하며 세례의식을 준비하고 세족식, 구제봉사에 힘쓰고 오락이나 호화생활을 하지 아니하며 특히 회개하면서 보냅니다. 사순절은 경건하게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와 십자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대개 누워서 죽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3일간이나 매달려 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연약한 육체를 입으신고로 매우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십자가 지고 가셨고 이제는 못 박혀 죽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이는,

첫째, 죄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속에 있는 저들은 누구입니까? 나도 포함됩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 하였습니다.
죄는 인간을 망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개인이 범죄하면 개인이 망하고 가정이 죄 지으면 가정이 망합니다. 엘리 제사장 가정이 그러하였습니다. 무능한 아버지, 타락한 아들들로 인하여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망하리라” 이유는 범죄한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는 불행의 요인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단은 우리들이 범죄 하도록 유혹합니다.
죄는 두려움을 줍니다. 평안함이 없습니다. 찰스 크래프트(Charles H. Craft)는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죄에 빠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두려움에 대하여 거부당함, 어두움, 고독, 질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잘못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의 두려움이 평강을 빼앗았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까? 범죄한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보면 얼마나 더럽고 가증합니까? 한국 사람들은 일류 국가 사람이라는 것을 자부하려면 기본적인 질서부터 지켜야 합니다. 줄서기, 기다리기 그리고 보는 사람이 없어도 교통법규를 지키는 일이 필요함에도 우리들은 지키지 아니합니다.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아니 하면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믿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신뢰하지 못합니다. 믿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속이더라도 속아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치인을 믿을 수 있나요? 그래도 믿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잘하면 비판하고 물고 늘어지는 습관이 있습니다. 잘하는 일에 대하여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세워주는 게 아니라 흠집을 내고 물고 뜯으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점 중에 하나가 조급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급하다 보니 실수도 많습니다. 말에도 실수하고 행동도 그러합니다. 이런 것이 죄성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정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판단력이 흐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의 것이 좋아 보이고 유혹에 잘 넘어집니다. 그래서 아담 하와가 범죄 하였습니다. 문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황야에는 방울뱀이 살고 있답니다. 그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방울뱀은 다람쥐 잡는 방법이 특이하답니다. 먼저 꼬리를 흔들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면 나무 위에 있던 다람쥐들이 호기심을 발동하여 소리나는 곳으로 내려다본답니다. 그 순간 다람쥐의 눈과 독사의 눈이 마주치면 다람쥐가 겁을 집어먹고 떨어지면 뱀은 단숨에 삼켜버린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범죄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람의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다가 흥분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6) 범죄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만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고 잘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결과는 비참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여주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사는데 물론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살림살이는 잘하는데 며느리가 시어머니보다 한 가지는 못합니다. 빨래입니다. 시어머니 빨래는 눈이 부실만큼 깨끗한데 자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유심히 살펴보아도 별다른 게 없습니다. 여쭤 보아도 신통하게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음에 알려주마 그럽니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합니다. 시어머니를 간호하던 며느리가 빨래 생각이 나서 어머니 빨래? 그러니까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하는 말 “꼬옥 짜거라.” 시어머니의 빨래가 깨끗했던 이유는 바로 마무리의 차이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인생의 마지막 마무리는 십자가를 꼬옥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면 용서하여 주신 답니다.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하십니다.

사죄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32:1절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십니다. 기억해야 할 일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한 스승이 네 명의 제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세상에서 유혹을 받을 때 시험에 들지 않고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결론을 내었습니다. 우리들은 죽음을 생각하면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요. 혹 죽음 이후에 심판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생각하면 죄를 몰아 낼 수 있어요. 스승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죄의 유혹이 올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피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물리치는데 더 강력한 무기는 없다 라고 하더랍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그 보혈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유혹을 물리치게 합니다. 범죄한 우리를 향해 오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얻어 복 있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누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인가요?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 최악입니다. 사형을 시켜도 십자가형으로 죽이는 것은 극형이 선고된 죄수만 달아 죽였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중에 힘든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것입니다. 한 대 때리는 것보다는 비웃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말을 들을 때 힘듭니다. 예수께서 두 손바닥에 못을 박아 매달려있기에 살이 찢기고 피가 계속 흐릅니다.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옵니다. 숨을 내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련을 일으킵니다. 이런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 하면 이때에 발에 박힌 못에 의지함으로 고통이 가중됩니다. 지금 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까? 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다른 사람을 구했다고 하는데 자신은 구할 수 없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와 보라 그럽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해하는 것, 존중하는 것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들을 이미 용서하였다는 말입니다.

아직 미혼인 분들이 지금 배우자를 선택하신다면 어떤 분을 원하시겠습니까? 직업, 학벌. 인물 등일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 중에 71%가 성격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면 어떤 성격인가? 다시 물었더니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하더랍니다. 원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의 잘못을 탓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해하여주고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에는 너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용서함 받았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다른 이를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다.

한 살인범이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유명한 명사요, 고위공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 많은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형은 동생이 죄를 범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된 게 마음이 아파서 생각 다 못해 대통령을 찾아가서 동생을 사면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그 형이 나라에 공헌한 것도 많고 그렇게 간청하니 거절할 수 없어 사면장을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형은 사면장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네가 이 어려운 가운데서 사면을 받아 자유를 얻는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어떻게 살겠느냐? 물었더니 동생은 살기 등등하여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먼저 찾아가 죽이겠고 나에게 불리하게 증언한 증인들을 모조리 찾아 죽이겠다고 하더랍니다. 형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면장을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돌아왔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수없이 많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사함 받은 사람은 사함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장례식을 치루다 보면 딱한 일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지금 그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무엇을 달라고 짜증을 부리며 혹은 즐겁게 노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죄인인 내가 사함 받았다는 것을 알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찬송하면서 눈물로 감격하게 됩니다. 다음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이 있습니다. 늘 죄송스럽게 사는 이들입니다. 셋째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것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고 환경 때문이라고 책임전가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죄인이었는데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사함 받은 확신을 갖고 감사하면서 다른 이들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서하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1.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용서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영국 웰링턴 장군이 구제불능인 병사 한 명을 사형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치려 했고 징계도 해보았다 때려보기도 하고 심지어 감옥에 넣기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았는데 너는 끝까지 반성도 하지 못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이제 네게는 사형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때 그 병사의 한 친구가 말합니다. 장군님 하나 남아있습니다. 꼭 한 번 해보세요. 바로 용서입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조건 없이 용서하였습니다. 용서한다. 나는 너를 무조건 용서한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 병사는 완전히 달라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용서했으면 다시는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용서하였는데 그때 그랬지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편의 잘못을 여자가 용서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들추어냅니다. 언제 말합니까? 기분이 좋지 아니할 때에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한 게 아니라 그대로 둔 상태와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용서한 죄는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려고 한다면 기억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용서는 회수와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용서는 몇 번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입니다. 용서에 대하여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일곱 번쯤 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 한다면 대단히 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 하십니다. 용서는 횟수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4. 용서는 진정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거짓된 용서가 있습니다. 특히 교인들이 범하는 모순입니다. 말로는 용서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면 이는 위선입니다. 용서하였으면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주님의 기도대로 용서함 받았습니다.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 죽음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죽음을 싫어합니다. 자식을 백 명이나 둔 그리고 나이 백 살이 넘은 늙은 왕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그에게 어느 날 죽음의 사자가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안녕 하시오. 이제 나와 함께 세상을 떠날 시간이 되었오. 그러나 왕은 지금 죽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죽음의 사자에게 통사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많은 아들 중에 하나를 대신 데려가 주시오. 난 아직도 제대로 인생을 살아보지 못햇소. 나라를 보살피느라 너무 바빠서 말이오. 죽음의 사자는 그가 비통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불쌍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좋소. 그러나 그대의 아들 중에서 대신 죽겠다는 아들이 있어야 하오. 그리고 죽음의 사자가 왕의 아들들을 모아놓고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아들들 중에서 선 듯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죽음가운데는 불쌍한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알지 못하고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 죽는 죽음입니다. 불안한 죽음도 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운데서 맞이하는 죽음입니다. 죽음에는 부끄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 에게 해를 끼치고 욕을 먹으면서 죽어야 하는 죽음을 말합니다. 멋있는 죽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미래의 소망을 안고 주님 앞에 가는 죽음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를 살리며 대신 죽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주님의 죽음입니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대신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묻기를 너는 무엇하다가 왔느냐 물으시면 무어라 대답할 건가를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구실 다하지 못한 것을 하겠다고 말하겠습니까? 남편노릇 못했는데 잘하겠습니다. 아내의 사명을 다 못했는데 잘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할 겁니까? 지금 하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주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구원받는 게 십자가 죽음의 의미입니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죽은 사람이 4천만 명이나 되고 하루에 십 만 구천 589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 4,566명이 죽고 1분에 76명이 죽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3분지 2나 되는 사람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들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죽음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필연의 사실입니다. 방법은 준비입니다. 영생 얻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이요, 그것도 잘 믿어야 합니다. 사업을 잘하면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듯이 영적인 삶을 바로 살면 그것보다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 평화의 복음, 사랑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설 때에 잘했다. 네가 나에게 면류관을 준비하였으니 받아써라.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죄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하면 무슨 죄라도 용서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신다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사랑하여 용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영혼 구원하는 사명적인 삶을 살다가 이후에 영생복락 상급 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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