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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신앙인 입니까? /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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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앙인 입니까? 
사도행전3:1-10
서재중 목사 (여수새문안교회)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자기를 바르게 알아야 어떤 일을 처리해 갈 때 바르게 처리해 나아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등산을 하던 사람이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가장먼저 자기 자신이 있는 위치와 자리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지도가 있고 연락을 할수 있는 통신 시설이 있다고 하드라도 자기자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누구라도 구조하기란 어려울 것이며 쉽게 길을 안내해 줄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아라는 교회가 소개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보시는 교인의 신앙과 자신들이 알고있는 자신의 신앙와는 차이가있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눈이 멀었습니다. 가련합니다. 곤고합니다. 벌거벗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자신을 볼 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해서 부족함이 없도다!" 이렇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안약(말씀)을 사서 눈에 발라 보라고 하시는데도 안약을 사서 볼 생각을 안합니다, 믿음의 금을 사서 자신을 부요케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들은 부자고 부족함이 없는데 왜 금을 사냐고 깨닫질 못합니다.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는데 왜 옷을 사느냐고 항변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대로의 실상을 알지 못하니 이렇게 무식합니다. 그러니 성장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교만과 방치와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아플 때 치료에 앞서 먼저 무슨병이 들었는지를 알아내는거시 급선무입니다 만약어디가 아프며 왜 병에들었는지지 그 원인을 알지못하고 방치해두다간 결국은 병을 키워 그 병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오늘 봉독해드린 말씀은 초대교회 때 사도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짧막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려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입구를 막 들어서려고 하는데 길옆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구걸을 하는 것이였습니다 앉은뱅이를 바라보는 두사도는 앉은뱅이가 불쌍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앉은뱅이에게 다가가서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소 다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곧 이것이니 "나사렛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걸으시오" 하며 손목을 잡아 일으켜세우니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걷게 된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성전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은 기이히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며, 세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로, (2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나옵니다.

이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된 지체장애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걸어보질 못한 사람입니다. 그날도 예루살렘 성전 문곁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성전 문곁에까지 올수가 없었습니다 (2절)하반에 보면 사람들이 메어다 주어서 지금 성전 문곁에 까지라도 온것입니다. 이 사람은 성전문곁에 까지는 올수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힘은 아니지만 성전에 가까운곳까지 왔습니다 .
이 앉은뱅의 특징은

자기의 힘으로 삶을 살아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삶을 영위하는  남 의존적인 사람입니다. 한국교회안에 보면,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동정을 얻어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챙겨주면 교회에 마지못해서 나옵니다 곁에서 전화를 하고 심방을해주고 교회에 가자고 해야 못이긴 듯이 남의 손에 끌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의식이 고정되어있는 편협적인 사람입니다. 자기가 기대한 바를 사람에게서 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기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할 존재이지 뭔가 기대할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할 때는 당연히 문제가 생기게 되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내가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상대가 채워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불만과 불평에 생길 수 밖에요.  앉은뱅이의 의식속에는 삶에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에 자기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할 때 원망과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중간쯤을 보면 이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성전미문에 나와서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구걸하기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앉은뱅이가 성전 미문에 나와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구걸하는 앉은뱅이" "구걸하는 인격" "구걸하는 신앙인"은 남을 섬겨주지 못합니다 남을위해 헌신하지도 봉사하지도 못합니다 그져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쉽습니다 문제는 그의 사고방식이 인식의 구조가 남의손에 있는 것을 늘 바라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될수만 있으면 자기에게 많은 동정과 자비를 바라기 때문에 더 슬픈표정을 지어야하고 더많이 아푼사람처럼 표현해야하고 더 많이 가난하고 없고 초라하다는 것을 억지로라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측은히여기고 관심을 쏟아줄게 아닙니까?

삶의 목적이 구걸에 있다는 것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는데 익숙해진 사람의 의식구조는 소극적이고 자활능력도 자생능력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한때 기독교 신문에 난 이야기입니다.
어느조그만한 도시에 나이들어 신학을 공부하시던 전도사님은 천막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교회는 십여년이 지나도 성장을 하지도 않은것이였습니다 항상 천막교회 그대로였습니다 후에 조사하여 알려진바로는 교회를 개척한다며 이사람 저사람 이교회 저교회를 다니면서 헌금을 구걸하여 사는 수준은 중상류층으로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막에 초라한 모습인 교회는 남에게 구걸하기위해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그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해주고 도와주닌까 생활에는 부족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으로 이런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예외로 많습니다. 십일조생활을 제대로 하면은 자기자신의 신분과 생활수준이 노출되어 바르지못한 자신의 신앙생활이 들통이 날까봐서 하나님앞에 제대로 드리지못한체 삶의 궁색을 떠는 사람은 앉은뱅이의 의식구조를 닮았다고 할것입니다. 이런사람은 남을 바르게 섬겨주지 못합니다 우선 자신의생각이 먼저이고 자기의 생각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이기 때문에 헌신이나 봉사는 항상 뒤로미루기 일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앉은뱅이의 신앙은 고침을 받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신앙의 기쁨과 감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오늘 본문 7-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발과 발목에 힘을얻고 뛰어 일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신앙에는 기쁨도 감격도 찬송도 하나님께 영광도 돌려드릴수 없습니다 앉은뱅이의 믿음에서 일어설수 있을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특히 앉은뱅이가 평생을 한번도 일어서보지 못한 그사람이 어떻게 일어설수가 있었습니까? 일어서서 뛰기도하고 걷기도하고 성전안으로 남의 도움을 받지않고 들어갈수 있었던 그힘은 어디로서부터 온것입니까?

(6절)의 말씀을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앉은뱅이를 구원하고 무디워지고 자신밖에 모르던 앉은뱅이의 믿음을 변화 시킬수가 있었습니다 혹 이 자리에 나는 앉은뱅이의 믿음이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나사렛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본문에 나오는사람은 누구입니까?

(2절하반절)에보면, 앉은뱅이를 성전 미문까지 메고 온 이름없는 불특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를 메고 성전미문에다 메어다준 마음착한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못하고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선한 사람들입니다. 앉은뱅이처럼 뭔가를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뭔가를 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앉은뱅이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에게 속한 것, 세상에 속한 것을 줄뿐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내가 하나님 앞에 좋은 일을 했다고 만족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예수 믿지 않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저들도 얼마든지 고아들을 돌볼 수 있고, 양로원을 돌볼 수 있습니다.  몇 푼 던져주고 내 할 일 다했다? 고 자위하며 착한일을 실천했다며 스스로 만족해하며 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바로 이런사람입니다. 불특정의 많은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이는 사람,되어지는 일을 보면서 구경하는 사람 이런사람에게는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없습니다 다만 그때그때상황과분위기에 편승하여 움직이는 사람입니다.(10절)의 말씀을 보면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에 대해서 잘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되어진일에 대해 놀라며 기이하게 여길뿐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1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같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사도는 앉은뱅이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한 사람들입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앉은뱅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준 사람이요 생명의 주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일꾼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절)의 말씀을보면 정한시간에 기도를 하기위해 성전에 올라간 사람이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능력은 인간적인 재능이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믿음의힘 즉, 기도의힘에서 나온 것 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정한시간 하나님앞에 늘 무릎을 끓은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런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앉은뱅이를 일으켜세울 수 있는 힘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있고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6절)에"금과은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성전안에 들어가는 많은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헌금은 다 있습니다 그러나 두사도는 그 기본적인 금이나 은이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기에 그를 구원한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을 나눠준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하며 누구의 이름으로 섬기며 봉사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에수의이름으로 섬기며 일을하는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상을받고 축복을 받는다고(마10:41)고 했습니다 구야기대에 시날평지에 모여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바벨탑을 쌓다가 흩어지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막대기와 물맷도를 들고 나가싸웠던 다윗은 무적골리앗을 쳐부수고 승리의개가를 울릴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의이름으로 이웃을섬기고 교회를 사랑하고 여러분들의 가정을 섬길 때 주의이름으로 축복하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섬김위에 크게 역사하실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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