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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입니까? / 시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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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입니까?(시8:1~9) 
울산소망교회 (박세종 목사)


4절을 다시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는 누구인가?" "예수를 믿는 나는 어떤 사람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옛날 헬라의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델피신전에 있는 하얀 대리석에 새겨 놓고는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사람을 가리켜서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나는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질 것인가?
내가 나아가야 할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였고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예를 들면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찬성인가 반대인가? 이라크에 우리 나라 군대를 파병하는 것에 찬성인가 반대인가?
어떻게 살아야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떤 삶이 올바른 인생일까? 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아름답게 살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말에 "팔자"라는 말이 있죠?
주어진 환경대로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이건 매우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팔자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말을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누구이길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인생이 천하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손에 잡았다 놓으면 사라질 세상 지위의 고하를 가지고 사람을 무시합니다. 재산의 유무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오죽하면 감옥소에서도 유전무죄요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무시합니다. 그래서 몸에 있는 지방을 빼려고 흡입수술을 하다가 생명까지 잃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변형된 사람은 사람 대접조차도 못 받는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철학자 키케고르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온 천하는 잃어버리더라도 네 생명을 견지하면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존엄합니다.
이 생명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웬지 아세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고 한번 밖에는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살아줄 수 없는 나만의 것이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생을 화가와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똑같이 화폭이요, 똑같은 물감이고 똑같은 붓인데도 왜 걸작이 나오고 왜? 졸작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림 그리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와 정성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헬라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위대한 자녀가 태어난다"
가정을 그리는 어머니를 보세요!
집안을 청소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고
일정한 수입인데도 적자를 내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가정의 미래를 위하여 설계를 하고
자녀에게는 스승이시고
남편에게는 내조자가 되어 올바르게 인도하는 배의 선장과도 같은 정말 1인 다 역을 합니다.
문제는 1인 몇 역이나 얼마나 wonder woman이냐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주부의 사명을 얼마나 고귀하게 생각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가정과 자녀를 걸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고 졸작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울산의 모 동네는 집 나가는 여자들이 많다죠?
아침에 눈뜨면 이 집도 나가고, 저 집도 나가도 댁의 집 아내는 계십니까? 이게 아침 인사말이 될 정도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머니, 아내로서 역할이 존귀하고, 존엄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남편 버리고 나가겠습니까?
자식들을 내 팽개치고 야밤 도주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어머니요 아내로서 살아가는 아내의 역할을 가치 없게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내가 내가 하는 이일이 존귀하다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버리게 하는 행동을 저지릅니다.
나는 돈 버는데 넌 뭐하는거냐!
딴 여자들은 결혼했어도 배도 안나오고 예쁘던데 넌 왜 그러냐?
집구석에만 있으면 돈이 나오냐 금이 나오냐 딴 여자들은 돈도 잘 번다는데 하면서 아내의 존귀함을 돈이나 미모로 격하시키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구석에 있질 않고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이여! 그대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화와 존귀의 면류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들이여!
돈 좀 번다고 그러지 말고 아내가 하고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세요.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역할을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걸작으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내 인생을 걸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5절을 보겠습니다. 첫 부분입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다같이!
"분수를 알자"
우리는 존귀합니다. 천하보다 소중하다고 하였습니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다! 식의 독단이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린 존귀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구요?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였다"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들의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나온 말이 "검사답다"라는 말이 생겨났죠.
참 좋은 말입니다. "무엇답다"
선생은 선생님다워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다워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다워야 합니다.
이 "답다"라는 의미는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에 맞게 행동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몇 백 만원 하는 외제 명품이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진짜를 못 사면 짜가라도 사들고 다니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가짜로 치장합니다.
이게 왜 이래요?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녀는 카드 빚을 못 갚아서 신체 포기각서를 썼다. 이것은 왜 그래요?
사채업자만 탓할 것입니까?
자기의 분수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 "기적이란 없다"고 합니다.
한 개인이나 국가가 흥왕하는데는 반드시 흥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흥하는 것이고, 개인이나 나라가 망하는 이유도 망할 이유가 있기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쌀이 남아돌 때 어떤 짓을 하였습니까?
쌀로 막걸리를 해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1달러! 1.200원만 있어도 1주일을 살 수 있다는 나라가 아직도 있는데 그 쌀로 막걸리로 마셔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 나라를 흥하게 인도하시겠습니까?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기억!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를 아껴야 합니다.
사치를 죄악으로 여겨야 합니다.
낭비를 치욕으로 여겨야 합니다.
명품을 자랑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 백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다 벗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베풀어주면서 살아가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복을 쏟아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다같이! 분수를 알자!


6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이것보세요!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 나에겐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의 한자를 보면
'사'자를 심부름 '사'자이고 '명'자는 목숨 '명'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수행할 때 목숨을 걸고 심부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계2:10에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였고 고전 4장에서는 "사람들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길지어다"하며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를 탐험한 리빙스턴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위험합니다. 가지 마세요 그만해도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다 ― 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 사명을 가진 사람에겐 열의가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정열적입니다.
왜? 생명을 내걸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걸린 일인데 소홀히 하겠습니까
그냥 대강대강 넘어갈 수 있을까요?
무책임하고 무성의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글자 하나를 써도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물건하나를 만들 때에도
환자에게 주사를 놓을 때에도 자기 살처럼 생각하고 주사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주사를 놓으면서 그러더군요
선생님! 아플거에요!
그래서 엉덩이를 좀 세게 때릴 테니까요 그럼 덜 아프니까요. 찰싹찰싹! 그런데도요! 이상하대요 그날 주사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나도 안 아팠습니다. 주사 맞으면 아프니까요 하며 간호사로서의 사명감 있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내 마음까지도 이해해 주는 그 주사는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감격과 감동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사명을 가지세요. 예배자의 사명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우선 순위에 두고 있습니까?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니 이 일을 나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자 그러면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셔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꾸어줄지언정 꾸러 다니지 않는 풍성한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 가진 사람들로만 현대의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1980년대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머리가 길다고 정문에서 바리깡으로 머리깍여야만 했던 그 노동자들이 없다면 어찌 공장이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다! 존귀한 존재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구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역할의 차이는 있어도 지위의 차이, 가치의 차이는 절대로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존귀와 영화의 관을 씌우셨다"한 것입니다.
손을 가슴에 대고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지면서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존귀한 존재이다!!
나는 소중한 존재다!
세상을 향해서는 분수를 지키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사명자가 되어서 나의 인생을 명작으로 가꾸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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