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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이 주는 안식 / 롬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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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망이 주는 안식(4)!
성경: 롬5:1-11(신약245면)
설교 : 선교교회 신종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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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義)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主)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和平)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恩惠)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患難) 중(中)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患難)은 인내(忍耐)를

롬 5:4 인내(忍耐)는 연단(鍊鍛)을 연단(鍊鍛)은 소망(所望)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5 소망(所望)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軟弱)할 때에 기약(期約)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敬虔)치 않은 자(者)를 위(爲)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義人)을 위(爲)하여 죽는 자(者)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爲)하여 용감히 죽는 자(者)가 혹(或)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罪人)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爲)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自己)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因)하여 의(義)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震怒)하심에서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怨讐)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和睦)되었은즉 화목(和睦)된 자(者)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因)하여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和睦)을 얻게 하신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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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언

사람은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비로소 오늘을 안식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 불안하면 결코 오늘 안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의 걱정이 있는 사람은 오늘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설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뿐 아니라 건강도 나빠지고, 가정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내일일을 위해서 염려하느냐?  하루의 근심은 하루에 족하니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편안히 잠을 자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해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소망이 있어야 오늘의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볼 때 그다지 소망이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말하는 미래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말합니다. 


<전쟁과 인간의 타락>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이제 세계 각국에 비치되어 있는 무기와 전쟁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종말의 증상중에 아주 중요한 증상을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 6-8절에 보면...


마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마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24: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전쟁의 이유가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상을 위한 전쟁이 아니요, 자국의 이익을 위한 민족주의와 오만방자한 힘을 앞세운 제국주의적인 사고로 인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은 온통 전쟁중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전쟁중에 죽어가고 있으며,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지금 안식이라는 말은 참으로 머나먼 꿈과도 같습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전쟁의 상처가 언제나 치료되고 복구가 될지... 
내일 아침에 과연 내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볼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 한 이라크의 아버지는 지난 90년 걸프전 때, 자기의 가족들을 다 한방에서 자게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죽으면 다 같이 죽고, 살면 다같이 살자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처참합니까?

아무도 이 전쟁을 그치게 할 자는 없으며, 아무도 이 전쟁의 상처를 치료할 자는 없습니다.  전쟁은 가해국이나 피해국이나 할 것 없이 역사적인 깊은 골을 만들어냅니다. 

예)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독일, 한국과 일본, 아랍과 미국

“왜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왜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말해줄 것입니다. 

자,  “왜 사람들은 싸우지요?”  “왜 전쟁을 일으킵니까?”
정의를 위해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더 넓은 영토와 권력과 돈과 쾌락을 향한 욕구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역사상 모든 전쟁은 침략전쟁입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침략함으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지...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의 미국역시 정의를 위해서.... 이라크 국민들을 자유케하겠다고 부시가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 수백 수천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고, 잠에서 덜 깬 부시시한 소리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침략전쟁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죄의 욕구를 가지고 있기에 다툼과 전쟁과 모든 종류의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었고, 만들어진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생각할 때 인류의 내일은 어둡기만 한 것입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 저는 그래서 자식을 낳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 소망이 없기에... 그러한 절망적인 세상에 내 자식을 살게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므로 인류가 소망이 없는 이유는 되어지는 일들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요, 결정적으로 나아질 줄 모르는 인간의 죄악과 탐욕에 있습니다. 


예) 모든 동물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동물을 사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남을 위협하고,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그러한 존재는 지구상에 오직 인간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을 황폐하게 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9에서 하나님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는 단순히 외적인 죄악만을 인한 것이 아니요, “그 마음에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 역시 그러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부패는 세상을 절망적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인간이 설쳐대는 세상에 무슨 내일이 있고, 소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돈과 소망>

지금 우리나라는 사상 유래가 없는 가계부채로 인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미 재작년에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배가 넘는 330조원을 넘었고, 한 가정의 부채는 3천만원을 상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환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부채는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빚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지면 결국은 더 나은 내일이 아니요, 더 나쁜 내일이 기대되고, 돈을 쓰면서도 기쁨도 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예) 내가 아파트 계단청소를 하고 파출부를 해도 내일은 내가 이 아파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어야 오늘의 수고가 보람이 있는 것인데...  그러한 소망이 없을 때, 모든 삶은 파괴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느냐에 따라서 양심적인 가책이 있고, 또한 그것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고와 염려가 있고, 그 돈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죄악의 유혹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돈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고, 언제나 남을 믿지 못하는 의심으로 인해서 정상적인 이웃과의 관계를 맺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예) 한 돈 많은 초신자의 고백 / 교회를 출석하였는데 자기를 담당한 구역장이 자주 연락을 하고, 선물도 하고, 살갑게 하는데...  그렇게 하기를 1,2년이 되도록 마음을 주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교회생활만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인즉은...  “저 놈이 지금은 저래도 언제인가는 필시 돈을 빌려달라고 할 것이다.”  하는 생각에 진정한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를 못하고 마음을 닫고 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 진심을 알게 되고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형제간이라고 할찌라도 언제나 돈과 연결되어서 생각하는 것, 바로 이것이 부자의 불행이고, 그의 삶에 쉼이 없는 이유이다.


서양속담에...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잠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어도...  가족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여자는 살 수 있어도... 사랑은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세상의 모든 추악한 일들 잔인한 일들이 바로 돈으로 인해서 벌어지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썩어질 재물에 우리의 소망을 둘 수 있겠습니까?  돈이 우리에게 소망이나 안식을 주지 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병과 재난>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상에 진정한 소망을 둘 수 없는 이유는 어느 때에 닥쳐올지 모르는 재난과 질병입니다.  전도서 9장 11절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9: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 누구에게 불행이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결핵은 큰 질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의술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 결핵은 큰 병은 아닙니다.  과거에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은 한 마을을 완전히 죽음에 몰아 넣는 마귀적인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많은 종류의 질병이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상해도 그것조차도 바꿀 수 있는 의술이 되어서 왠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이 질병을 두려워하는 것은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월이 갈수록 질병은 더욱 많아지고 치명적이 됩니다.  과거에는 이름도 몰랐던 질병들이 그 위세를 더욱 등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술은 계속해서 발전하지만 병은 계속해서 앞서 갑니다.  과거에 암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은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질병이 세상에 퍼지면서 얼마나 사람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지구 상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름도 모르고 원인도 알지 못하는 질병이 6,0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만일 그 질병이 한가지씩 확산이 된다고 해도 인류는 영원히 질병에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에 의한 환경의 파괴는 더욱 다양하고 치명적인 종류의 세균을 만들어내고,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예) 요즘은 성인병이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나타납니다.  암도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고 합니다.  이는 환경의 파괴와 패스트푸드와 같은 저항력이 없는 음식을 젊은 세대가 더욱 많이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예) 중국에는 지금 광동성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급속도로 괴질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왜 이름이 괴질입니까?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파괴력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예) 교통사고를 통계낸 것을 보면, 전국적으로 고르게, 나이층도 고르게, 사람도 고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 누구도 사고에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차 샀다고 좋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나는 안전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 가장 안타까운 것이 임시 번호판을 달고 처참하게 사고난 차를 보면 그 차를 사고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 한 목사님...  건축중인데...  뭐 아무 문제 없다고 건방을 떨더라구요,  얼마전에 전화를 해보니 코가 석자나 빠졌어요.  업자가 돈을 가지고 못하겠다고 잠적을 해버렸대요...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며, 안전하지 못하고, 세상은 참된 소망과 안식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어디에 소망이 있고, 어디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명확한 답을 줍니다.  본문 1,2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진정한 소망이 없으며,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으나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소망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십시오.

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 안식

②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은혜의 삶에 들어감을 얻었다. => 안식

③ 하나님의 장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을 바라고 즐거워 한다. => 안식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는 이 안식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도, 근심도, 질병도, 죽음도...  그 어느 것도 이 영원한 소망과 확실한 은혜중에 사는 안식에서 우리를 떨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은 단지 모든 일이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잘 될 것이라는 믿음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4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구절은 “다만 이뿐 아니라...”로 시작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어떻다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환란중에도...  => 이 소망과 안식은 사라지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것들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것들이 진정한 소망과 안식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 대신...  

환란은 => 인내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안에서...)

인내는 => 연단을 (흔들림이 없는 그 분의 약속 안에서...)

연단은 => 소망을 (1,2절의 상태가 우리의 것임을 확신하는 믿음 안에서...)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결국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환란이라는 것은 그 모든 소망을 송두리째로 강탈해가는 것이고 당장에 평안을 잃어버리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환란은 더욱 더 소망을 굳세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에 관한 대답입니다.  5-8절을 함께 일도록 하겠습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먼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고난과 환란도 그 약속과 장래의 소망이 변치 않고 확실함을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죄인되었을 때에 시작된 사랑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하고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참된 소망을 삼고 참된 안식을 누릴수 있는 길은 오직 그 소망을 사시는 하나님께 둘 때인 것입니다.  다른 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안식을 누리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딤전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벧전1: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오늘 이 불안한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은 소망을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당신과 당신의 자녀에게 진정한 소망이 되실 분이 누구이십니까?  당신이 혼자 죽음을 맞이 할 때, 당신을 영원한 처소로 영접해 주실 분이 누구십니까?  그리고 죽음의 이별 이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하사 그 사랑을 이어가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시요, 우리 죄를 속하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성경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사람에게 두지 말고 오직 금생과 내생의 모든 것을 주사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둘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 참된 소망으로 안식으로 이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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