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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나 살리라 / 마 20: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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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이수영 목사
제목 : 그러나 살리라
본문 : 마20:17-19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하신 말씀, 아주 분명하게는 세 번째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예고는 이전의 예고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고의 장소와 시점에서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분명히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때는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을 때였고 그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분명히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것은 갈릴리에서였습니다(마17:22-23).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고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실 때 하신 것입니다. 

본문 17-18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했습니다.  이제 그 동안의 예고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으니 만큼 앞서 예고하실 때보다 긴장감이 더욱 넘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예수님의 세 번째의 명백한 예고가 앞섰던 예고들과 다른 두 번째 차이점은 그가 당하실 고난들을 보다 상세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삼일에 살아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8-19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 하신 말씀 가운데 "인자"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실 때 사용하신 독특한 호칭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시되 특별히 메시야로서의 사명완수와 연관시켜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즉 본래 영광 중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려 사람의 아들로 낮추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다시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당신 자신을 가리키시는 이름이 "인자"였던 것입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이방인"이란 로마인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로마 총독 빌라도와 그의 명령을 집행한 로마군사들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공회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는 있었으나, 로마의 법은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요18:31에도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그대로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절차를 밟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당하실 고난의 내용들을 여러 가지로 예고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눅18:32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롱"을 조금 더 자세히 전합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채찍질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형벌이었지만, 보통 십자가의 처형을 집행하는 과정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채찍이 보통 채찍이 아닙니다.  여러갈래의 채찍 끝에는 작은 납덩어리들이 달려있어서 채찍을 치면 그 납덩어리들이 살에 박혔다가는 채찍을 잡아당기면 그 납덩어리들이 살점들을 뜯어내는 그런 채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조롱과 침뱉음과 채찍질 등 모든 고난은 그대로 다 예수님께서 당하셨음을 우리는 복음서의 증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27:26-31을 봅니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다시 살아나실 것을 함께 언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19절에서 보듯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매 예고 때마다 끝에 덧붙이시기를 잊지 않으신 말씀 즉 "그러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신다는 그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저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로 번역되어있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려면 "일으켜 세워지리라", "살려지리라" 같이 수동태로 옮겨져야 할 부분입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 가운데 내던져지겠지만 그것은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돌보심 가운데 그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제삼일에"라고 한 것은 3일 동안이란 말이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때를 "제구시"라고 일제히 전하고 있습니다.  "제구시"란 오후 3시를 말합니다.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시고 주일 새벽에 이미 다시 살아나셨으니 만 하루 반만에 다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죽음 가운데 계셨던 날은 단 하루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는 지체없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서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넣은 악의 세력과 그 불의의 승리는 결코 오래갈 수 없고 순식간에 허사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이 사실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우리들 각자의 십자가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은 쉽게 치를 수 있는 추상적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점이 뜯기고 피투성이가 되게 하는 채찍질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 옷을 발가벗기우고 가시관이 머리에 씌워지며 갈대를 손에 들려지는 것과 같은 희롱, 침 뱉음을 당하고 머리를 얻어맞는 것과 같은 모욕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고난은 이런 외적인 고통만이 아닙니다.  내면의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질 축제와 거기서 누릴 기쁨을 향하여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축제의 기쁨에 대한 기대에 젖어있을 때 홀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해야 했던 예수님의 단독자의 외로움은 우리들의 십자가에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거듭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직후에 있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20절 이하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세베대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했는가 하면, 나머지 열 제자는 그것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위와 영광에 대한 관심에만 사로잡혀 있음을 보셔야 했던 예수님의 절대고독은 또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믿음은 이러한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신 대로 과연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를 다시 살려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라, 그러나 살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리라", 이 말씀은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와 억압에 대한 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고난 뒤에 반드시 따르는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리라", 이 말씀 붙들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메어주시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메고 가는 우리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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